푸른교회 아카이브

그 소년을 내게 데려오라!

베드로, 요한, 야고보를 데리시고 산 위에 올라가셨던 주님이 다시 하산하셨을 때 아래에 남아 있던 제자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율법학자들, 서기관들과 함께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게 어떤 논쟁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귀신들린 소년 하나도 구하지 못한 상황에서 벌인 토론이었던 만큼 제자들이 훨씬 더 불리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너희가 무슨 변론을 하느냐?> 주님의 물음에 먼저 대답하고 나선 사람은 제자들이 아니라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였습니다. <제가 말 못하는 귀신이 들린 아들을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데려왔으나 고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선생님이 좀 고쳐주십시오!> 소년의 아버지는 몹쓸 귀신도 쫓아내지 못하면서 입씨름에만 정력을 쏟고 있는 제자들이 무척이나 못마땅했습니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처럼 제자들과 율법학자들 간의 논쟁을 구경만 하고 있을 처지도 아니었습니다. 그랬기에 주님을 뵙자 대뜸 제자들에 대한 불만부터 토로했던 것입니다. 아무튼 귀신 들린 소년을 붙잡고 난감해하며 율법학자들의 공세에 몹시 곤혹스러워하던 제자들로서는 주님의 출현이 여간 다행스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주님의 반응은 냉담했습니다. <믿음이 없는 자들아, 내가 너희를 얼마나 더 참으랴!>(막 9:19) 이 간담을 서늘하게 한 주님의 일갈에 당시 제자들의 표정이 어땠을지는 짐작이 갑니다. 주님은 이미 사태의 본질을 꿰뚫어 보신 겁니다. 원래 논쟁이란 옳고 그름을 논리적으로 따져 승패를 결정짓는 일입니다. 율법학자들과의 논쟁에서 고전하던 제자들은 당연히 주님이 자기들의 편을 들어 그 논쟁을 승리로 이끌어 주실 줄 기대했는데 주님은 도리어 그 논쟁을 일거에 소멸시키시고 화제의 중심을 본래의 자리로 되돌리셨습니다. 한 소년의 고통이 어느새 사람들의 관심에서 밀려나고 대신 제자들과 율법학자들 간의 언쟁이 사건의 핵심이 되어버린 왜곡된 현실을 다시 역전시키신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과 제자들 간의 현저한 관심의 차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만큼 율법학자들과의 논쟁을 승리로 이끌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귀신 들린 소년을 구하는 것이 일차적인 관심사였습니다. 그랬기에 물과 불에 자주 쓰러진다는 그 귀신 들린 소년을 사건의 중심으로 불러내신 겁니다. <그 아이를 내게로 데려오라!> 이로써 주님은 소년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자기들끼리만 벌이는 논쟁의 기만성에 분노하신 것이고, 제자들과 율법학자들은 논쟁의 이기고 짐이 문제가 아니라 <생명을 살릴 능력이 있는가>의 도전에 직면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이 시대 교회에도 여전히 중요하고 대단히 절실한 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각종 주제는 갈수록 첨예하고, 논쟁의 기술도 세련되고 더욱 풍성해졌지만 정작 생명을 살리는 능력은 점점 더 빈약해져 가는 게 사실입니다. 그야말로 경건의 모양만 있을 뿐 경건의 능력은 상실한 것이 바로 이 시대 교회의 어김없는 현주소입니다. <고통받고 있는 소년은 어디에 두고 엉뚱한 논쟁만 일삼느냐? 귀신 들린 소년의 현실을 외면하는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니니라. 그 아이를 내게 데려오라!> 그렇습니다. 지금도 한쪽에서의 풍요와는 달리 저마다의 사연과 온갖 고통의 무게에 짓눌려 힘들어하고 아파하는 이웃들이 참 많습니다. 그럼에도 교회가 정작 해야 할 일은 하지 않고 딴전을 부리며 공허한 논쟁에만 매달린다면 귀신 들린 소년의 아버지는 다시 주님께로 달려가 <구할 능력이 없더이다! 밤낮 싸우기만 하더이다!>하며 우리를 고발할 것입니다. 

제발 사랑을 쌓아 갑시다. 조금씩이라도 남의 아픔을 나눠 질 수 있는 능력을 주십사고 기도합시다. 그럴 때 모진 세상 풍파에 마음이 상하고 정신이 어지럽던 소년도 다시금 기운을 차릴 것이고 그 아버지는 뜨겁게 감사할 것이며 우리들의 생명을 돌보고 살려내는 능력도 한결 성장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