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419m 아버지, 아브라함이여!(눅 16: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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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19m
눅 16:19-31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19]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20]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21]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23] 그가 음부에서 고통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24]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25]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26]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27]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28]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29]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30]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31]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사람은 누구나 죽습니다. 그런데도 막상 죽음이나 사후세계에 대해 얘기하면 다들 불편해 합니다. 믿는 사람도 예외는 아닙니다. 성완종 경남기업 회장도 장로였다는데 이번에 자살했습니다. 그분이 정말 내세를 믿었다면 자살했겠습니까? 그러면 사람들은 왜 사후세계에 대한 과제를 거북해할까요?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자기 자신을 가장 잘 압니다.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고, 현재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자기가 잘 알기에 두려운 겁니다. 내세에 대한 얘기가 소망이나 격려가 되기보다 오히려 두렵고 부담스러운 겁니다. 기독교 신앙의 궁극 목표는 천국입니다. 우리는 절대 교양이나 문화생활을 위해 신앙생활하지 않습니다.
본문의 주제가 사후세계입니다. 본문은 마치 주님이 천국과 지옥을 주제로 시나리오를 쓴 것처럼 보입니다. 어느 부자가 호화스럽게 살았습니다. 그는 호의호식을 사며 살았습니다. 이런 대단한 부자뿐 아니라 딱하기 그지없는 병든 거지도 등장합니다. 이 시나리오의 주인공은 거지입니다. 몸은 온통 피부병으로 말이 아니고, 부잣집 대문간에 버려져 있었다는 것으로 볼 때 장애인이거나 중증환자인 것 같습니다. 병든 거지가 부잣집 대문간에 널브러져 있었다는 것은 그래도 그 집에서 늘 잔치가 열리니 뭔가 얻어먹을 것을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집에서 반긴 것은 오직 개뿐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부자의 호화스러운 삶도 병든 거지의 최악의 삶도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부자도 거지도 다 죽었습니다. 22절을 보면 부자는 죽어서 장사되었다고 한 반면에 거지는 장례조차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거적때기에 싸서 성 밖 쓰레기 소각장인 힌놈골짜기에 갖다 버렸을 겁니다. 여기까지가 연극으로 치면 제1막입니다. 세상을 무대로 부자와 거지의 삶을 대조적으로 그린 겁니다.
그런데 제2막은 무대가 이 세상이 아니라 저 세상입니다. 그 두 사람이 죽어서 그들이 영혼이 각각 육신을 떠나는 순간 믿기 어려운 반전이 일어납니다. 두 사람의 처지와 운명이 완전히 뒤바뀝니다. 거지는 아무도 찾아주는 사람도 없이 쓸쓸이 죽었지만, 그가 세상을 떠나는 순간 천사들이 찾아와 그 영혼을 받들어 아브라함의 품으로 안내했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이 찾아와 문상한 부자는 저승사자가 와서 음부로 끌고 갔다고 합니다. 본문은 가려진 베일을 찢듯이 무덤 저편의 세계를 우리에게 입체적으로 보여줍니다.
거지가 천사들의 안내로 간 아브라함의 품은 천국입니다.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천국을 그렇게 묘사했습니다. 부자가 간 음부는 원어로 <하데스>인데, 악인과 불신자가 가는 지옥입니다. 성경에는 하데스와 비슷한 <게헨나>라는 말도 있습니다. 이것은 불구덩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말 성경은 하데스를 음부로, 게헨나를 지옥으로 번역했습니다. 여러분, 죽음은 절대 끝이 아닙니다. 끝이면 참 좋은데 그게 아니라는 게 문제입니다. 자살하는 사람은 죽음이 끝이라 생각하여 이 세상의 고통스런 생활을 마감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데 그것은 정말 치명적입니다. 그것은 오판입니다. 그곳이 아브라함의 품이든 불타는 하데스이든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원한 사후세계의 시작입니다. 바로 여기에 죽음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그래도 죽으면 모든 게 끝난다고 생각하십니까? 성경은 절대 그렇게 얘기 안 합니다. 주님이 시나리오를 써가며 정교하게 거짓말을 하시겠습니까? 우리에게 사후세계가 있다는 중요한 정신현상이 꿈입니다. 지그문트 프로이드는 꿈의 내용이 중요합니다. 꿈을 분석해 심리를 해석합니다. 그런데 칼 융은 꿈의 내용보다는 꿈 자체가 중요합니다. 잠재의식 자체가 중요하다는 겁니다. 융는 꿈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계시라고 합니다. 우리가 잠잘 때 우리 현실세계와 비교할 수 없이 꿈의 세계를 날아다닙니다. 꿈은 죽은 후의 세계가 있다는 하나님의 계시라는 게 융의 얘깁니다. 사람이 죽으면 육신은 썩지만, 그래서 육신만 보면 모든 게 거기서 끝인 것 같지만, 영은 새로운 내세를 시작합니다. 아브라함의 품 아니면 하데스입니다. 제3의 자리나 길은 없습니다. 연옥은 없습니다. 천국 아니면 지옥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의 부자와 거지는 어째서 사후 운명이 아브라함의 품과 하데스로 갈렸을까요?
거지는 이 땅에서 가난하고 병든 노숙자로 살았기에 천국에 가고, 부자는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았기에 지옥에 간 겁니까? 그런 법은 없습니다. 본문에는 이에 대한 명시적 답은 없지만 암시는 있습니다. 왜 거지 나사로가 천국에 갔을까요? 그의 이름을 보십시오. 나사로입니다. 부자는 이름이 없는데 거지는 이름이 있습니다. 나사로는 하나님이 도우신다,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라는 뜻입니다. 이 이름이 그대로 병든 거지의 신앙과 영적 정체성을 뜻한다고 보는 게 옳은 해석입니다. 혹 나사로라는 이름 하나만으로 그 거지가 경건한 신자였다고 단정하는 게 지나치다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이 말씀은 실화가 아닙니다. 주님의 창작이요 시나리오입니다. 주님이 특정 인물을 설정하고 그 사람에게 이름을 붙일 때는 당연히 그 캐릭터의 성격이나 정체성에 맞게 이름을 붙이셨을 겁니다. 주님의 비유 가운데 직접 이름까지 붙인 경우는 이 거지 나사로가 유일합니다. 의도적으로 이름을 붙인 겁니다. 그래서 나사로라는 이름이 갖는 의미를 우리는 간과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틀림없이 이 병든 거지가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암시하려고 그 숱한 이름 가운데 하나님이 도우신다는 나사로라는 이름을 붙이셨습니다. 이 거지는 피상적으로만 보면 불행한 인생일 뿐이었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으며 산 복된 사람입니다. 그는 이 세상 그 어디에도, 그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을 수 없던 불쌍하고 딱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랬기에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만 바라고 살았던 신자였습니다. 그래서 그가 천국에 간 겁니다. 하나님만 바라고 기대하며 살았으니 당연히 하나님이 그를 아브라함의 품으로 인도하신 겁니다.
그러면 부자는 왜 하데스로 갔을까요? 그가 부정축재를 했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지옥에 가서 처절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제발 물 한 방울만이라도 내 혀에 떨어뜨려 달라고 호소하는 걸 보면, 그의 처지가 생전 나사로와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최악입니다. 어째서 그가 이 꼴이 되었을까요? 본문 27절 이하를 보면 그가 하데스로 간 이유가 나옵니다. “[27]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28]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나는 이미 이 꼴이지만 내 형제만큼은 사후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달라고 호소합니다. 이런 그의 간청에 아브라함이 그들에게 모세가 있고 선지자가 있으니 그들 말을 들으면 된다고 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모세와 선지자가 있다는 것은 성경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여기서 부자가 과연 어떤 사람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부자는 세상에 살 때는 모세와 선지자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다는 겁니다. 만약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다면 대문간의 나사로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을 겁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기보다는 자신을 의지하며 살았고, 그 많은 부로 가난한 이웃을 도우며 살기보다는 오직 자신의 영화만을 위해 살았습니다. 30절을 보면 부자가 ‘만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서 그들에게 가서 전하면 회개할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도 그가 지옥에 간 이유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가 생전에 회개도 없이 살았다는 겁니다. 나사로가 살아 돌아가 죽으면 끝나는 게 아니라 사후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자기 형제에게 전해주십사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대답이 기가 막힙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31).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으면 죽었다 살아가서 전한다 해도 믿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지금 우리는 구약뿐만 아니라 주님의 말씀까지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믿지 않으면 죽었다 살아온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절대 믿지 않는다는 겁니다. 본문의 거지와 이름이 같은 사람이 성경에 나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라버니 예수님 친구 나사로입니다. 죽었다가 나흘 만에 살아 돌아온 사람 나사로입니다. 그 현장에 유대인이 많았습니다. 그 기적을 목격한 유대인이 다 주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까? 한 사람도 회개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나사로뿐 아니라 주님까지도 죽이려고 했습니다. 마음이 더 강퍅해졌습니다. 죽었다 살아난 사람을 보고 회개한 게 아니라 더 악해졌습니다.
부자가 간 하데스를 보겠습니다. 그곳은 이글거리는 불구덩이입니다. 거기가 무서운 이유가 무엇입니까? 타서 죽거나 해소되면 좋은데 죽지는 않고 영원토록 불에 타는 고통을 느끼는 곳입니다. 영혼이 용광로 안에 있습니다. 이게 지옥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손가락 끝에 물 한 방울 떨어뜨리는 게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만큼 괴롭고 힘들다는 겁니다. 이게 지옥입니다. 아브라함이 물 한 방울 요청하는 부자에게 답을 하는데 절망적입니다. 네가 있는 곳과 나사로가 있는 곳은 건널 수 없는 계곡이 있다고 합니다. 이 말은 부자와 나사로의 사후 운명이 더는 변경할 수 없는 상태로 고정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죽는 순간 그의 사후 운명은 고정됩니다. 가능성이나 기회는 살아있을 때 뿐입니다. 그래서 살아있을 때가 중요합니다. 생시의 삶이 사후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합니다. 내가 살아 있을 때 믿고 회개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죽으면 하고 싶어도 못합니다. 부자는 늦게나마 회개의 중요성을 깨닫고 사후세계의 중요성, 전도의 필요성을 느꼈지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기도도 살아있을 때 해야 합니다.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물 한 방울 달라고 호소하고, 형제들만큼은 이곳에 오지 않게 해달라고 탄원해도 다 거절됩니다. 여러분, 살아있을 때 한 번이라도 더 기도해야 합니다. 죽어서 기도해봤자 하나도 응답되지 않습니다. 이 부자의 참혹한 상황은 우리에게 살아있을 때 사랑하고, 자선하고, 기도하고, 회개하고, 신앙생활 잘 하여 자신의 영원한 운명을 책임 있게 관리하는 사람만이 결국 아브라함의 품에 안김을 가르쳐줍니다. 이 사실이 우리의 마음속 깊은 깨달음을 가져오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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