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329m 최후의 헌상(마 21:1-9, 막 14:3-9,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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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29m
마 21:1-9, 막 14:3-9, 12-16
최후의 헌상
마 21:[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 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2]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3]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4]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6] 제자들이 가서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하여 [7]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8]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막 14:[3]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4]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5]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6]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7]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8]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9]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막 14:[12] 무교절의 첫날 곧 유월절 양 잡는 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여짜오되 우리가 어디로 가서 선생님께서 유월절 음식을 잡수시게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하매 [13] 예수께서 제자 중의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성내로 들어가라 그리하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를 따라가서 [14] 어디든지 그가 들어가는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의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먹을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냐 하시더라 하라 [15] 그리하면 자리를 펴고 준비한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라 하시니 [16] 제자들이 나가 성내로 들어가서 예수께서 하시던 말씀대로 만나 유월절 음식을 준비하니라
오늘 본문은 고난주간에 있었던 일입니다. 주님 생애 마지막 한 주간에 있었던 가장 아름답고 향기로운 헌상들입니다. 마태복음 본문은 바로 오늘 있었던 사건이고, 마가복음 첫 번째 본문은 수요일에 있었던 사건이고, 두 번째 본문은 고난주간 목요일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주님의 공생애 말기는 외로우셨습니다. 더구나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오늘부터 십자가에 달린 금요일까지는 더욱 그랬습니다. 이때는 사람들이 다 배신하고 하나같이 비굴했습니다. 누구도 나서서 주님을 변호하거나 구명운동을 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세 사람, 나귀를 바치고, 옥합을 깨뜨리고, 다락방을 제공한 사람은 주님께 위로가 되었습니다. 주님 마지막 가시는 길에 힘이 되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최후 헌상을 구체적으로 보겠습니다.
그들은 모두 무명의 봉사자들입니다. 성경은 끝내 이 사람들의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겸허한 무명의 봉사자들임을 강조하기 위해섭니다. 그들이 헌상한 것은 결코 하찮거나 대수롭지 않은 게 아닙니다. 종려주일인 오늘 나귀를 헌상한 사람의 경우 이 사건이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구약 스가랴가 구체적으로 예언한 사건이었습니다. 마태복음 21장 4-5절입니다. “[4]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이미 500년 전에 선지자가 구체적으로 예언한 사건의 성취입니다. 그럼에도 나귀 주인은 완전히 숨습니다.
마가복음 14장 3절 이하에서 주님은 그 여인이 부은 향유를 장례 준비로 보았습니다. 누구도 몰랐는데 그 여인은 주님의 죽음을 예견하고 향유를 옥합 채 깨뜨린 겁니다. 주님은 그 여인에게 찬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복음이 전해지는 어느 곳마다 그 여인이 행한 일이 전해질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도 그저 한 여자라고 합니다. 이름이 없습니다. 무명의 헌상자로 남습니다.
다락방 주인도 마찬가집니다. 최후의 만찬을 하던 목요일 저녁, 주님이 이 땅에서 드신 마지막 식사 한 끼입니다. 그걸 도운 사람이니 얼마나 고맙고 감사합니까? 오늘까지 성찬식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만, 그가 누구인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본문을 보면, 오직 나귀를 타신 주님, 나드 향유를 덮어 쓰신 주님, 최후 만찬장의 주님만 보입니다. 이게 바람직한 헌상자들의 모습입니다. 나는 숨어야 합니다. 주님의 이름, 영광, 존재만 드러나야 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이렇게 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저마다 자기 이름을 내고 선전하느라 주님을 드러낼 길이 없습니다. 요즘은 주님이 실종된 상황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나귀주인, 옥합주인, 다락방주인처럼 이름 없고 얼굴 없는 헌상자로 돌아가야 합니다. 뒷전에 계신 주님을 앞으로 모셔야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 뒤로 숨어야 합니다. 이게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흠 없고 티 없는 것, 준비되고 예비된 것을 주님께 헌상했습니다. 마가복음 11장 2절입니다.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아직 누구도 타 보지 않은 나귀를 헌상한 겁니다. 주님께 바치는 것은 이런 겁니다. 남이 타던 것은 안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는 첫 새끼, 첫 열매, 첫 소득을 헌상하는 겁니다. 깨끗하고 온전하고 무흠한 것이 헌상의 기본 원칙입니다. 그래서 옛날에 제사장들이 제물을 사전에 검사했습니다. 흠이 없고 깨끗한 짐승이라는 공인을 받아야 비로소 하나님께 제물로 바칠 수 있었습니다. 나귀주인은 아직 한 번도 누가 타 보지 않은 새끼를 바칩니다. 향유도 마찬가집니다.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렸다고 합니다. 물을 타지 않은 향유입니다. 구약 때 성전에서 향유를 많이 썼습니다. 성전에서 쓰는 향유는 제조법이 까다로웠습니다. 가장 순수하고 순전한 향유라야 하나님 성전에 바칠 수 있었습니다. 다락방도 마찬가집니다. 주님의 최후만찬을 위해 없던 방을 새로 꾸민 것은 아닙니다만, 사전에 준비된 방이었습니다. 마가복음 14장 14절 이하를 보십시오. “[14] 어디든지 그가 들어가는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의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먹을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냐 하시더라 하라 [15] 그리하면 자리를 펴고 준비한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라 하시니.” 준비된 방입니다. 어떻게 그 사람이 사전에 준비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급조한 방은 아닙니다. 주님께는 반드시 준비되고 예비된 객실을 드려야 합니다. 사전준비 없이 임기응변으로 드리는 것은 접수되지 않습니다. 나귀주인처럼, 옥합주인처럼, 다락방주인처럼 준비되고 예비된 것을 드려야 하나님이 기쁘게 접수하십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주님이 필요하다고 하니 고민하지 않고, 시험에 들지 않고 내드립니다. 헌상의 중요한 원칙 가운데 하나입니다. 마태복음 21장 3절을 보십시오.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나귀주인은 머뭇거리지 않았습니다. 향유를 바친 여인도 보십시오. 귀한 향유를 가져와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었다고 합니다. 아낌없이 온전히 드렸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아까워서 여인을 책망하는데, 정작 향유주인은 주저하지 않습니다. 옥합에 담긴 귀한 향유를 조금 덜어서 바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예 옥합을 깨 몽땅 쏟아 붓는 것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그 향유를 흠향하시며 온 천하 어디서든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 이 여인의 헌상이 기념되리라고 하십니다. 다락방주인도 마찬가집니다. 주님이 제자들을 통해 유월절 음식 먹을 곳을 내달라 하라고 하니 다락방주인은 즉시 방을 내어줍니다.
예루살렘을 걸어서 들어가면 될 텐데, 굳이 나귀새끼를 타고 들어간다고 하면 우리는 즉시 시험에 빠집니다. 향유도 옥합 채 깨서 드리니 우리는 욕하게 됩니다. 다락방도 즉시 내어드리니 우리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주님이 쓰시겠다는 말 한 마디에 그들은 선뜻 내 줄 수 있었을까요? 주님은 어느 시대든 이런 헌상자를 택해 당신의 구속사역의 동역자로 삼으십니다. 주님이 그게 나귀든 향유든 다락방이든 쓰시겠다고 할 때, 왜 우리는 선뜻 내드려야 할까요? 주님은 날 위해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고, 나를 위해 지옥까지 내려가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필요하다고 하면 인색하면 안 됩니다. 목사가 달라할 때는 안 주셔도 됩니다만, 주님이 달라 하실 때는 내드려야 합니다. 부디 종려주일에 다시 한 번 주님을 생각하며 주님께 감사하고 주님께 헌상하고 산다는 게 어떤 것인지를 주님 십자가를 생각하며 고민하고 결단하시기를 바랍니다.
원문 자료와 첨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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