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315m 사랑과 배신(마 26: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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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5m
마 26:14-25
사랑과 배신
[14] 그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15]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16] 그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17] 무교절의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유월절 음식 잡수실 것을 우리가 어디서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18] 이르시되 성안 아무에게 가서 이르되 선생님 말씀이 내 때가 가까이 왔으니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네 집에서 지키겠다 하시더라 하라 하시니 [19] 제자들이 예수께서 시키신 대로 하여 유월절을 준비하였더라 [20] 저물 때에 예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앉으셨더니 [21] 그들이 먹을 때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하시니 [22] 그들이 몹시 근심하여 각각 여짜오되 주여 나는 아니지요 [23]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24]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25] 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이르되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하시니라
여러분은 지난 2000년 역사 가운데 가장 용서 받지 못할 죄인 한 사람을 꼽는다면 누구를 드시겠습니까? 아마 거의 다 가룟 유다를 꼽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유럽 사람들은 주로 성경에 나오는 이름으로 작명합니다. 그런데 유다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독일에서는 법으로 금하고 있습니다. 애당초 주님은 어째서 가룟 유다 같은 사람을 제자로 삼으셨을까요? 주님은 유다가 배신할 것을 이미 다 아셨을 겁니다. 그래서 일찍부터 가룟 유다에 대한 이런 저런 변명과 해석이 많았는데, 그 중 하나가 유다복음입니다. 유다복음은 탄소동위원소 연대 측정법으로 확인해 보니 매우 일찍 나온 책입니다. 주후 220-340년 사이에 기록된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유다복음은 위경입니다. 위경은 정경을 흉내 낸 가짜 문서라는 뜻입니다. 외경과도 다릅니다. 외경은 거의 정경에 채택될 수도 있었는데 다소 미흡한 부분이 있어 정경에서 탈락된 책이 외경입니다. 가톨릭에서는 외경도 성경에 넣습니다만, 위경은 가짜입니다. 유다복음은 위경입니다.
그 내용은 주님이 가룟 유다의 배신 덕분에 십자가에 달리셨고,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다 죄를 속죄받을 수 있었으니, 구속사적으로 볼 때, 가룟 유다야 말로 가장 결정적으로 주님의 구속사역을 도운 일등공신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열두 사도 가운데 가장 위대한 사도였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가룟 유다의 명예를 회복시켜야 한다는 게 유다복음의 핵심 주제입니다. 이것은 억지입니다. 사실 왜곡입니다. 정말 주님의 구속사역에 가룟 유다의 존재가 필연적이었다면, 왜 주님이 24절에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물론 주님의 십자가 사건에 가룟 유다의 배신이 개입되었으나, 이것이 주님의 구속사역에 필수불가결한 조건이 된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가룟 유다 없이도 충분히 구속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가룟 유다를 연민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은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정경에 나오는 가룟 유다는 어떻습니까? 그가 어떤 경로로 주님 앞에 나와 제자가 되었는지도 명확하지 않습니다. 왜 배신했는지도 분명치 않습니다. 학자들은 주님 제자 중 적어도 두 사람 정도는 열혈당원이었는데, 그 중 한 사람으로 가룟 유다를 꼽습니다. 열혈당은 극우파 민족집단이었습니다. 하마스나 알카에다, 헤즈볼라, IS등이 주님 시대에는 열혈당이었습니다. 시몬은 확실히 열혈당원 맞습니다. 또 한 사람이 가룟 유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니까 유다는 처음부터 끝이 달랐습니다. 실제로 당시에는 메시아가 오시면 이스라엘을 정치적으로 독립시켜 영광스런 메시아 왕국을 가져올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있었습니다. 고난의 메시아가 없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마지막 예루살렘 입성 때 자리다툼까지 벌입니다. 심지어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는 주님께 청탁까지 합니다.
이것은 주님을 끝까지 정치군사적 메시아로 봤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막상 예루살렘에 입성해 보니, 주님은 거사할 생각은 하지 않고 자꾸만 딴소리를 하십니다. 마태복음 26장 2절입니다.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리라 하시더라.” 12절도 보십시오.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 이제 곧 봉기한다가 아니라 자꾸만 죽는다고 하십니다. 그러니 자기들이 기다려온 메시아와 다릅니다. 그 길로 대제사장을 찾아가서 말합니다. 15절입니다.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주님에 대한 실망과 좌절을 배신으로 보복합니다. 그래도 그렇지 3년간이나 따라 다니며 그의 인격을 경험한 사람이 어떻게 배신까지 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자꾸만 가룟 유다의 인간성을 의심하게 됩니다
가룟 유다는 양심이 불량했습니다. 본문 20절 이하는 주님과 제자들이 마지막으로 가진 만찬 장면입니다. 주님은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이 깜짝 놀라 근심스런 표정으로 ‘저는 아니지요?’라고 되묻습니다. 그때 가룟 유다는 잽싸게 떡에 손을 넣습니다. 떡으로 입을 막으려고 말입니다. 그 순간을 모면하려고 한 겁니다. 주님이 그 생각을 아시고 ‘떡 그릇에 손을 넣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가룟 유다는 얼른 손을 빼면서 능청스럽게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 하고 되묻습니다. 이미 이때는 가룟 유다가 대제사장에게서 은 30을 받은 이후입니다. 주머니에 은 30을 만지작 대며 ‘저는 아니지요?’라고 한 겁니다.
가룟 유다는 돈을 너무 밝혔습니다. 본문 앞을 보년 한 여인이 옥합을 깨뜨려 주님께 향유를 붓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분개하여 값 비싼 것을 왜 허비하냐며 꾸짖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는 같은 장면에서 가룟 유다가 길길이 뜁니다. 향유를 300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줄 수도 있다며 날뜁니다. 딱 보면 감정가가 나옵니다. 게다가 가난한 자를 돕자는 겁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은 그가 가난한 자를 위함이 아니고 도적이라고 합니다. 돈궤를 맡아 관리하며 조금씩 훔쳤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제자들 가운데 누구도 눈치를 못 챘습니다. 그만큼 철저했고 그만큼 이중인격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재정을 맡은 것은 신임을 얻었다는 증거인데, 그게 다 위선이었다는 겁니다. 제자들 가운데는 직업이 세리도 있었습니다. 마태가 바로 그 제자입니다. 그런데도 재정 관리는 가룟 유다가 했습니다. 주님이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고 했을 때도, 제자들 가운데 누구도 가룟 유다를 의심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만큼 가룟 유다는 남몰래 돈을 사랑한 사람이었습니다. 목사도 가장 문제가 되는 게 돈입니다. 돈 싫어하는 목사는 없을 겁니다. 목사가 돈을 밝히면 돈 때문에 망합니다. 숱한 목회자들이 돈 때문에 다 실패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집니다. 가룟 유다를 보십시오. 남의 돈에 눈이 멀었다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3년간 동고동락한 스승을 은 30에 팝니까? 은 30은 당시에 노예 한 사람 값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팔아도 너무 헐값에 팔았습니다. 마태복음 26장 6절 이하에 나오는 여인은 예수님의 머리에 은 300도 아끼지 않고 향유를 부었는데, 가룟 유다와 얼마나 대조적입니까? 그러니 가룟 유다가 그 아까운 것을 왜 그리 허비하느냐고 흥분할 만합니다. 가룟 유다는 자기가 사랑한 돈 때문에 망했습니다.
가룟 유다는 회개할 줄 몰랐습니다. 사람은 죄 지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제자라 하여도 죄 안 짓고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겐 회개가 필수입니다. 우리는 회개를 통해 얼마든지 용서 받고 새출발할 수 있습니다. 회개를 통한 사죄의 복이 우리에게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가룟 유다는 끝까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그의 가장 큰 불행이었습니다. 사실 실수나 배신으로 말하면 베드로도 만만치 않습니다. 가룟 유다는 한 번만 배신했지만, 베드로는 무려 세 번이나 부인하고 저주했습니다. 마태복음 26장 74절입니다.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곧 닭이 울더라.” 베드로는 세 번이나 이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즉각 눈물로 회개했지만, 가룟 유다는 끝까지 시침 떼고 있었습니다. 유다에게도 회개할 수 있는 기회가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가 나를 팔리라’고 하시며 콕 집어 말해도 가룟 유다는 끝까지 미친 척합니다. 반면에 베드로는 세 번이나 저주하고 부인했는데, 저 멀리서 닭소리가 들리자 통곡하며 회개했습니다. 베드로는 미물의 닭소리를 듣고도 회개했는데, 가룟 유다는 주님이 직접 말씀하셔도 회개할 줄 몰랐습니다. 물론 마태복음 27장에 가면 가룟 유다도 후회를 합니다. 스승을 판 돈을 다시 되돌려 주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그는 끝내 자살합니다. 회개는 반성이나 뉘우침이 아닙니다. 삶의 역전입니다. 잘못된 것을 깨달았으면 가슴만 칠게 아니라 과감히 되돌아서야 합니다. 뉘우쳤으면 즉각 일어나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여전히 돼지우리에 앉아 아무리 반성한들 소용 없습니다. 가룟 유다는 반성은 했으나 변화된 삶은 없었습니다. 이쯤되면 정말 가룟 유다는 태어나지 않았다면 좋았을 사람입니다. 단테 신곡 지옥편을 보면, 지옥 맨 아래에 가룟 유다가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을 가까이서 모시고 살았던 12사도 가운데 하나가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사람이 되어 지옥 아랫목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가룟 유다의 이야기가 오늘 우리에게 가장 진지하고 엄숙한 메시지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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