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308m 있든 떠나든(고후 5: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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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08m
고후 5:8-10
있든 떠나든
[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9]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우리도 훗날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섭니까? 안 믿는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10절입니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우리>가 가리키는 대상은 바울과 고린도교회 성도를 가리킵니다. <다>라는 말은 누구도 예외 없이, <반드시>는 필연적으로 어김 없이를 뜻합니다. 심판대 앞에서 삶의 대가를 받는다는 겁니다.
사실 이런 말씀은 우리를 기쁘게 하기보다는 착잡하게 합니다. 어떻게 살든 천국 간다면 좋은데,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 등급을 매기고 그에 따라 상급을 준다고 하니 그렇습니다. 개신교는 가톨릭의 공로사상, 즉 행위를 가르치는 것에 반대해서 개혁한 교회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구원은 행위의 대가가 아니라 값없이 받는 은혜인데, 가톨릭이 행위를 강조함으로써 복음을 져버리고 율법주의로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개신교는 상급, 공적에 대해 부정적입니다. 맞습니다. 우리가 천국 가는 것은 우리 행위의 대가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천국에 가서 누릴 영화는 반드시 내가 이 땅에서 행한 대로 보상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은혜로 천국 간다는 구원도 절대적이지만, 행한 대로 보상을 받는다는 천국의 상급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것을 흔히 성화가 영화를 결정한다고 합니다. 이 땅에서 성화의 수준이 천국에서 영화의 등급을 결정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세상을 떠나면 다 심판대 앞에 섭니다. 다만 천국이냐 지옥이냐의 심판이 아니라 상급의 심판입니다. 그 심판을 통해 우리가 천국에서 누릴 영화가 결정됩니다. 그러므로 천국이라고 다 같은 천국이 아닙니다. 천국의 영광에도 급수가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천국에까지 계급이 있겠는가? 차등이 있겠는가? 라고 말합니다. 이 땅에서야 차별이 있지만, 천국만큼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맞습니다. 천국은 부조리나 모순이 없습니다. 절대적으로 공평한 세계입니다. 천국에 사는 사람들이 이 땅에서 살았던 삶의 내용이 다릅니다. 그래서 다 다릅니다. 그래서 다른 겁니다. 모태신앙이나 숨 떨어지기 30초 전에 믿은 강도나 다 천국은 갑니다. 왜냐면 천국은 행위의 보상이 아니라 은혜로 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두 사람이 천국에 가서 누릴 영광은 절대 같지 않습니다. 천국의 영화는 은혜가 아니라 보상이요 대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같을 수도 없고, 같아서도 안 됩니다. 사도 바울처럼 30대에 회심해서 평생 헌신하다가 순교한 사람과 살인강도가 천국 가서 똑같은 대접을 받는다는 것을 어떻게 정의요 공평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상급에는 차등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억울한 사람도, 손해 보는 사람도 없습니다. 다 똑같다면 그것이야 말로 역차별이요 불공정입니다.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신다고 했는데, 어떻게 상급이 같을 수 있습니까? 고린도전서 15장 41절은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고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2장 1절 이하에서 자신의 신비체험을 얘기하며 자신이 셋째 하늘에 다녀왔다고 합니다. 주후 1,300년대 초반에 쓴 단테의 신곡도 지옥과 천국이 여러 층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했습니다. 단테 신곡에 따르면 지옥도 다 같은 지옥이 아니라, 1지옥부터 9지옥까지 있습니다. 제1지옥에는 헬라 철학자들이 있었습니다. 2지옥은 1지옥보다 좀 더 뜨거운 곳인데, 엉뚱하게도 클레오파트라가 있습니다. 7지옥에는 조폭들이, 9지옥에는 가인, 가룟 유다가 있습니다. 지옥이 아래로 내려갈수록 고통스럽지만, 천국은 올라갈수록 더 밝습니다. 천국은 10층이라고 합니다. 10층을 <엠피리오>라고 하는데, 거기엔 하나님이 계시고, 9층에는 천사들이, 8층에는 사도들이 있습니다. 이게 단테 신곡의 내용입니다. 이렇게 지옥도 천국도 층이 있습니다. 이 땅에서의 삶의 내용이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9장에 보면 므나 비유가 나옵니다. 주인이 10명의 종에게 각각 1므나씩 맡깁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장사해서 10므나를 남기고, 한 사람은 5므나를 남깁니다. 주인이 정산하는데, 10므나를 남긴 종에게 ‘10므나를 남겼으니 10고을을 다스릴 권세를 준다, 5므나 남긴 사람에게는 5고을을 준다’고 합니다. 각자가 남긴 만큼 보상해 줍니다. 정확한 보상입니다. 이것이 천국의 상급입니다. 우리가 훗날 심판대 앞에 서면 바로 이 부분을 짚겠다는 겁니다. 우리 삶의 내용에 정확하게 보상하겠다는 겁니다. 마태복음 10장 41절 이하입니다. “[41]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42]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그 어떤 수고와 희생도 간과하지 않고 다 챙겼다가 반드시 그 상을 잃지 않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공짜는 없습니다. 주님을 위해 우리가 수고한 만큼, 주님을 위해 우리가 아픔을 겪은 만큼, 냉수 한 그릇도 꼼꼼히 기록해 놨다고 보상해 주신다는 겁니다. 마일리지 쌓이듯 내 삶의 포인트가 지금도 천국 컴퓨터에 누적됩니다. 마태복음 19장 27절을 보면 베드로가 이렇게 묻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주님이 답하십니다.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29]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그러면 이 땅에서 주님을 위해 희생한 것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주님은 ‘저희가 이미 자기의 상을 받았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누리지 않아야 천국에서 보상을 받습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마태복음 19장 30절입니다.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간혹 너무 젊어 예수 믿게 된 것을 억울하게 생각하고 후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모태신앙을 불행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죽기 전에 병상에서 극적으로 세례 받고 죽은 사람을 부러워합니다. 경제적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막차 타고 천국 간 사람들이 행운일까요? 물론 지옥 가는 것보다는 천국 가는 게 100배, 1000배 낫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 아무것도 한 일 없이 천국 간 사람은 천국에서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부끄러운 구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님을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고, 희생하고, 고통을 당한 사람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보상 받을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성도들 가운데는 하루 빨리 천국 갔으면 좋겠다고 하십니다. 본문 8절도 보면,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이것은 성도의 궁극적 소망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구원 받은 당신의 자녀를 빨리 천국으로 데려가지 않으시는 데는 깊은 뜻이 있습니다. 천국 가서 받을 보상을 하루라도 더 준비하라는 겁니다. 주님이 이 땅에서 생명을 주시는 순간까지 세월을 아껴 주님의 기쁨을 위해 살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가장 책임적인 사람입니다. 세상 험합니다. 하루라도 빨리 죽어 천국가면 좋습니다. 그러나 그게 전부가 아닙니다. 아직도 이 땅에 발붙이고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잘 헤아려 세월을 아끼며 힘껏 주님의 기쁨을 위해 살라는 게 옳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하실 게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가 여기에 있든 이 땅을 떠나든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것(9절)이 가장 중요합니다. 주님이 나를 이 땅에 살게 하시는 최후의 순간까지 세상이나 나 자신을 기쁘게 하는 게 아니라 주님을 기쁘게 하며 사는 게 가장 복되다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이여 그렇게 살라는 게 바울의 간곡한 당부입니다. 기억하십시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만이 우리의 영원한 운명에 큰 도움이 됩니다. 그렇게 살아야 훗날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보다 많은 영광의 보상을 받습니다. 그날을 대망하며 늘 세월을 아끼며 주님을 기쁘게 하며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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