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교회 아카이브

3.1절과 쇼팽



오늘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 길이 남을 3.1절이자 <피아노의 시인> 쇼팽의 205회 생일이기도 한 주일입니다. 그래서 3월에는 쇼팽을 기념하는 연주회가 여기저기에서 다채롭게 열릴 예정입니다. 과거 우리나라는 군국주의 일본에, 쇼팽의 조국인 폴란드는 러시아에 점령당했고 또 독립을 위한 우리의 3.1 만세운동이 일본 순사들의 잔혹한 진압에 무참하게 좌절된 것처럼 1830년 11월에 봉기한 폴란드 혁명도 러시아 군대의 막강한 무력 앞에서 쓰디쓴 실패를 맛봐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불발로 끝난 폴란드 혁명은 쇼팽의 생애에도 큰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당시 20세였던 쇼팽은 봉기 일주일 전, 오스트리아를 거쳐 이탈리아로 여행하기 위해 그가 태어나고 성장한 바르샤바를 떠났습니다. 여행 중에도 고국 폴란드의 독립혁명을 열렬히 지지했던 그는 1831년 혁명좌절 소식을 접하고 비분과 절망에 휩싸여 귀국을 단념하고 망명을 선택합니다. 러시아의 지배가 계속되는 한 돌아가지 않겠노라고 결심했던 쇼팽은 결국 죽을 때까지 조국 땅을 밟지 못했습니다. 파리에 정착한 쇼팽은 창작과 연주활동에 전념하지만 조국 폴란드는 한시도 잊지 못했습니다. 파리에서 9년간 쇼팽과 동거한 여류작가 조르주 상드(G. Sand)는 쇼팽을 <폴란드보다 더 폴란드적인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파리에서 프랑스인, 영국인, 독일인 등 수많은 외국인 예술가들과 교류했지만 오직 폴란드어만을 사용했고, 그가 남긴 수백 통의 편지들도 모두 폴란드어로 쓰였으며 자신의 곡에 붙인 텍스트 역시 단 한 편도 예외 없이 모두 폴란드어로만 작성했다고 합니다. 조국 폴란드는 언제나 쇼팽의 음악가로서의 영감과 독창성의 원천이었습니다. 특히 폴란드 혁명의 좌절은 젊은 소팽의 영혼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며 그의 음악 세계 기저에 흐르고 있는 비극적인 애상과 야상곡을 뜻하는 녹턴의 근원이 되었다는 평입니다.


쇼팽은 작곡가로 첫발을 내디뎠던 17세(1827)때부터 세상을 떠나기 2년 전까지 거의 평생에 걸쳐 21곡의 녹턴을 썼습니다. 그의 녹턴은 시적이고 발라드는 어떤 이야기를 품고 있는 서사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듣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 녹턴 제2번이야말로 쇼팽 특유의 센티멘털리즘이 가장 매혹적으로 표현된 작품이 아닐까 합니다. <녹턴>은 원래 중세시대 밤예배에 사용하던 교회음악으로 평온하고 서정적이어서 <야상곡>이란 말 그대로 밤에 혼자 촛불을 켜고 들으면 가장 어울릴 듯한 곡이지만 특히 쇼팽의 녹턴은 표현력이 풍부하고 난해하지 않으면서도 그 안에 친숙한 시적 느낌을 담고 있어서 누구나 특별한 해설 없이 그냥 들어도 온몸에 감흥이 느껴지는 매우 아름다운 곡들입니다.


쇼팽은 일찍부터 폐결핵을 앓았습니다. 파리생활 중 병세는 더욱 악화되어 조르주 상드와 함께 스페인의 마요르카 섬으로 요양까지 가지만 호전되지 않자 6개월 만에 다시 파리로 돌아오는데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은 1849년 10월 17일 결국 39세를 일기로 파리에서 세상을 떠납니다. 그의 시신은 파리의 페르 라세스 묘지에 묻히지만 심장은 그의 유언에 따라 고국으로 옮겨져 고향 바르샤바의 산타 크로체 교회에 안장됩니다.


우리의 여러 애국지사들처럼 쇼팽 또한 폴란드 국민들에게는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애국혼이자 민족 예술가입니다. 그의 심장이 묻힌 산타 크로체 교회의 비문에는 평소 그가 즐겨 암송했다는 마태복음 6장 21절 말씀이 각인되어 있습니다.

<네 보물이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