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222m 쓴물과 단물(출 15: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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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22m
출 15:22-27
쓴물과 단물
[22]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23]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24] 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25]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26]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27]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에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우선 출애굽기 15장의 구성을 보면, 1-21절까지는 노래입니다. 모세의 노래입니다. 홍해를 건넌 직후에 부른 승리와 기쁨, 감사, 구원의 노래입니다. 양쪽에는 온통 무시무시한 바위산입니다. 뒤에는 성난 애굽 군대의 전차, 바로의 전차군단이 무서운 기세로 추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앞에는 검붉은 홍해가 가로놓여 있습니다. 사면초가요 절체절명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극적으로 홍해를 가르시고, 바다 가운데 길을 트셔서 200만도 넘었을 이스라엘 백성을 안전하게 건너게 하셨습니다. 그들 뒤를 쫓던 애굽 군대를 그들 눈앞에서 홍해에 수장하셨습니다. 그래서 부른 노래가 모세의 승리의 개가입니다.
그 다음절인 22절부터가 오늘 본문인데, 본문은 분위기가 사뭇 다릅니다. 22-23절입니다. “[22]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23]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기적적으로 홍해를 건너고, 그들을 붙잡아 가려고 뒤쫓던 애굽 군대를 몰살하던 광경을 보면서 감사와 감격하던 것도 잠깐이요, 불과 사흘 만에 물이 없어 고통을 겪기 시작했습니다. 천만다행으로 마라라는 곳에서 물을 발견했습니다. 다들 이제는 살았다며 안도하고 환호를 올렸는데, 그 물이 써서 마실 수 없었습니다. 염분이 많아서 짜다 못해 썼습니다. 그런 물은 마시면 복통이 일어나고 자칫하면 죽습니다. <마라>는 쓰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룻기를 보면, 시어머니 나오미가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마라라 부르라’고 합니다. 그 구절 각주를 보면, 나오미는 기쁨, 희락이라 되어 있고, 마라는 고통이라고 적어놨습니다. 불과 사흘 전까지만 해도 나오미의 노래를 불렀는데, 지금은 마라의 쓴물로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이게 당시 이스라엘의 광야 여정이었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들의 세상살이입니다. 물론 홍해도 마라도 다 하나님이 인도하신 것입니다.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하나님이 인도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불과 사흘 만에 마라의 쓴물을 만나 고통당하게 하셨을까요? 여러분 주변에는 이런 분들 안 계십니까? 한 때는 홍해를 건너며 개가를 불렀는데, 지금은 마라의 쓴물을 마시며 절망하고 좌절하는 분 안 계십니까? 우리의 삶에서 마라의 쓴물은 대체 뭘까요?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선 하나님의 시험이었습니다. 25절 하반절 이하입니다. “그들을 시험하실새 [26]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이게 무슨 뜻입니까? 너희가 홍해를 육지같이 건너고, 너희를 뒤쫓던 적이 몰살당하는 모습을 보며 통쾌해 할 때뿐 아니라, 쓴물을 마실 때도 내게 귀를 기울이는지 보시려고 마라로 이끄셨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마라의 쓴물로 시험하십니다. 평안할 때 우리는 우리 본색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픔이 오고 고배를 마시면 비로소 그 사람의 진상이 나옵니다. 우리는 승리할 때면 누구나 나는 기뻐요 정말 기뻐요 하며 방방 뜹니다. 그러나 사흘 길을 가도 물이 없고, 마라에서 겨우 찾은 물마저도 쓴물일 때, 당장 우리의 본색이 드러납니다. 온갖 원망과 원성을 다 쏟아냅니다. 이스라엘도 보면, 백성들이 모세를 원망했다고 합니다. 결국 하나님을 원망했다는 뜻입니다. 보통 일이 잘 안 되면 목사를 원망하는데, 결국 그것은 주님을 원망하는 겁니다. 마라의 진정한 의미는 그들을 시험하는데 있었는데 불행하게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그 의도에 부응하지 못했습니다. 광야 같은 세상 사시다가 마라를 만났을 때 조심하십시오. 그때 추악한 인간성을 드러내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예의주시하십니다. 어떻게 대처하고 반응하는지 하나님이 보고 계십니다. 내 인생에 쓴잔이 다가왔을 때, 오히려 믿음을 발휘하셔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인정과 함께 복을 받습니다.
여러분, 예수 믿으면 모든 일이 잘 될 거라는 것은 오해입니다. 내가 열심히 신앙생활하고 기도 많이 하면 내 인생에 쓴잔이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 믿으면 전에 없었던 문제가 더 많이 생깁니다. 내가 그 위기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믿음으로 잘 극복하는지 하나님이 고의로 크고 작은 시험을 당하게 하시고, 쓴잔을 마시게 하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경우는 판판이 그 시험에 실패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길을 가다가 눈길에 한 번 미끄러져 보십시오. 당장 하얗게 눈을 뜨고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하나님이 이젠 나를 버리셨다고 합니다. 기도하다가 조금만 응답이 늦어도 좌절했다 포기했다 실망했다 생난리입니다. 당장에 이거 안 들어주시면 교회가 아니라 다른 데로 가겠다고 합니다. 살아가다 마라의 쓴물을 만났을 때 제발 실족하거나 하나님 원망하지 마십시오. 쓴물 앞에서 내가 어떻게 하는지 예의주시하고 계신 하나님께 실망을 안기지 마십시오.
마라의 쓴물은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계시였습니다. 쓴물 때문에 지금 난리도 아닙니다. 모세를 원망하며 당장에라도 어떻게 할 기세입니다. 모세가 기가 막혀,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모세에게 처방을 내리시는데, 한 나무를 가리키며 그것을 쓴물에 던지라고 합니다. 그렇게 했더니 그 쓴물이 당장 단물로 변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하신 말씀이 26절 하반절입니다.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여호와 라파입니다. 하나님은 마라의 쓴물을 단물로 바꾼 사건을 통해 자신이 바로 치료하여 낫게 하는 하나님임을 계시하십니다. 하나님은 쓴물을 단물로, 맹물을 양질의 포도주로, 기갈을 해갈하는 고치는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병든 육체를 낫게 해주십사, 병든 심령을 회복시켜 달라고 기도하는 것도, 다 치료하시는 여호와이기 때문입니다. 가족 가운데 혹은 주변 환자를 위해 열심히 기도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병마가 낫습니다. 하나님은 치료하는 여호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병든 육체도, 황폐한 우리 영혼도, 비뚤어진 우리 인격도, 형편없이 망가진 삶의 처지나 여건도 회복시켜 주십니다. 살인적으로 썼던 마라의 물을 단물로 한순간에 변화시키셨습니다. 우리의 빗나간 운명도 하나님이 새롭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으로 그렇게 하셨습니까? 한 나무입니다. 그 나무를 쓴물에 던졌더니 단물이 된 겁니다. 25절입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모든 나무가 가니라 특별히 하나님이 가리키신 한 나무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24절입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한 나무는 주님이 달리신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처방은 한 나무인 주님의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이 가리킨 그 나무가 쓴물을 단물로 변화시켰습니다. 십자가가 고치고 살리고 새롭게 하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나무요 처방입니다.
그런데 복음서에 나오는 주님의 수난기사를 보면 한 가지 재밌는 사실이 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 주변에 온통 마리아뿐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9장 25절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마태복은 27장 55절 이하입니다. “[55]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 [56] 그 중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 물론 당시에 마리아 이름은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 때문만은 아닙니다. 마리아라는 이름의 뜻이 고상할 것 같으나 마리아가 바로 마라의 파생어입니다. 마리아의 뜻도 쓴 것입니다. 마리아들 한 가운데 주님의 십자가가 서 있습니다. 마라의 쓴물에 한 나무가 던져진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마라의 쓴물에 한 나무가 던져진 사건은 주님의 십자가 사건의 예시요 계시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마라의 쓴물을 단물로 변화시키기 위해, 지척에 오아시스가 있음에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엘림으로 인도하기 위한 조치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전에는 모두 쓰디 쓴 물이었는데, 모두가 다 단물이 되었습니다. 예수님 어머니도, 막달라 마리아도 다 만고에 빛나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어느 시대나 가장 흔한 이름이 마라고, 마리아입니다. 누가 인생을 달콤하다고 했습니까? 그것은 마약한 사람들이 약 기운으로 그런 말을 한 것입니다. 우리는 마라의 쓴물로 기갈하고 있습니다. 누가 우리의 이 근본적인 고통을 해결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지시하신 한 나무인 주님의 십자가뿐입니다.
부디 하나님이 지시하신 한 나무인 십자가 아래로 모입시다. 십자가의 계절인 사순절입니다. 십자가 아래 우리 모든 아픔과 고통, 상처를 내려놓읍시다. 십자가만이 쓴잔을 마신 우리 인생에게 허락하신 유일한 처방임을 잊지 맙시다. 그래서 쓴물이 단물이 되고, 마라가 엘림으로 새로워지는 복이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에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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