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201m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않으면(마 5: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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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01m
마 5:17-20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않으면
[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본문은 공생애에 들어가신 주님의 사실상 첫 설교라고 할 수 있는 산상설교의 초반부입니다. 산상설교는 마태복음 5-7장입니다. 본문은 유명한 8복에 이어서 하신 말씀입니다. 20절을 보십시오.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이 말씀을 어떻게 보십니까? 어렵고도 심각한 말씀입니다. 주님이 언급한 서기관, 바리새인은 당시 유대사회의 의인을 상징하는 그룹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보다 낫지 못하면 천국 못 간다는 겁니다. 그러면 누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여러분은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나을 자신이 있습니까? 주님이 말씀한 바리새인은 유대교의 한 분파였습니다. 기독교도 파가 많습니다. 크게는 로마 가톨릭, 정교회, 개신교, 개신교 안에서도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성공회 등 파가 많습니다. 주님 당시에는 유대교에 크게 세 파가 있었습니다. 바리새파와 사두개파, 젤롯당입니다. 당시 바리새파와 사두개파는 절대 권력을 쥐고 있었습니다. 바리새라는 말은 구별하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철저히 준수하며 서민 유대인과 자신들을 구분했습니다. 복음서에 죄인, 의인이 나오는데, 이들이 죄인이냐 의인이냐를 구분했습니다. 옛날 우리나라의 양반가 쌍놈처럼 말입니다. 바울도 바리새파였습니다.
바리새인은 철저했습니다. 누가복음 18장 10절 이하입니다.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그들은 실제 이렇게 살았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기도에도 열심이었습니다. 하루에 세 번씩 기도했습니다. 이렇게 바리새인은 율법을 지키고 규례와 전통에 충실했습니다.
제가 독일에 있을 때 유대인 친구와 택시를 탔는데, 갑자기 유대인 친구가 무조건 내리자는 겁니다. 10여분은 더 가야 기숙사인데 말입니다. 5분만 있으면 안식일이 시작된다는 겁니다. 안식일은 금요일 해질녘부터 토요일 해질녘까지입니다. 돈을 쓰면 안 된다는 겁니다. 제게 자기가 가진 돈까지 다 주는 겁니다. 저는 그때 유대인이 얼마나 철저한지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2000년 전의 바리새인이라면 얼마나 철저했겠습니까? 바리새인은 4000명이 넘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의 십일조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럼에도 본문에서 주님은 너희 의가 바리새인의 의보다 낫지 않으면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십니다. 우리의 의가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나을 자신이 있습니까? 그들보다 더 의롭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했는데 어떻게 합니까? 주님의 이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여기서 지적한 바리새인의 의는 율법적인 의, 형식적인 의, 문자적인 의, 기계적인 의입니다. 심하게 말하면 위선적인 의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바리새인을 고발하며 외식자, 위선자, 회칠한 무덤이라고 했습니다. 율법의 근본정신을 가르치고 추구해야 하는데, 그들은 그런 것들은 다 팽개치고 문자와 의식, 형식에만 매달려 살았다는 것입니다. 또한 남에게도 그런 것만 강요했고, 그 기준으로 남을 정죄했습니다. 예를 들어 봅니다. 본문에 이어지는 21절 이하를 보면 바리새인은 칼로 실제 사람을 안 죽이면 살인이 아니었습니다. 마음으로는 아무리 증오하고 미워해도 실제로 사람의 목만 따지 않으면 괜찮았습니다. 간음도 마찬가집니다. 마음으로 아무리 음욕을 품어도 실제 행위로만 하지 않으면 괜찮았습니다. 이게 율법적인 의요, 바리새인이 말하는 의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말씀하시는 복음적인 의는 그 정신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본질을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바라시는 복음적인 의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게 아니라 형제를 미워하면 이미 살인이라는 것입니다. 조건이나 환경이 여의치 않아서 죽일 수 없을 뿐 미움이 살인으로 이행된다는 것입니다. 간음도 마찬가집니다. 율법적인 의는 속으로 무슨 상상을 하든 실제 행위만 안 하면 간음죄가 성립 안 됩니다. 복음적인 의는 그 마음에 음욕을 품으면 간음죄나 진배없다는 겁니다. 행위란 결국 속마음의 연장이라는 것입니다. 도둑질이나 절도도 마찬가집니다. 그 마음에 탐심이 있느냐 없느냐는 동기를 문제 삼습니다. 주님은 항상 그렇게 보십니다. 원인과 과정을 중시하십니다. 주님은 네 오른쪽 눈이 너를 실족하게 하면 그 눈을 파버리라고 하십니다. 오른손이 실족하게 하면 그 손을 자르라고 하십니다. 차라리 장애인이 되어 천국에 가는 게 낫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을 어떻게 보십니까?
정말 눈을 뽑고 손을 자르고 발을 자르라는 말씀입니까? 아마 그렇게 하면 하루도 못가서 다 팔다리 잘린 사람이 될 것입니다. 내 팔을 자르게 하고 발을 자르게 하고 눈을 뽑게 만든 원인을 제거하라는 뜻입니다. 그야말로 눈을 파듯이, 범죄한 팔을 자르고, 발을 찍어내듯이 원인을 파내고 자르고 찍어내라는 것입니다. 이게 복음적인 처방입니다.
주님이 유대인과 서기관, 바리새인 앞에서 고의로 안식일을 범하신 것도 그들의 율법적인 의, 형식적인 의에 대한 도발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은 안식일 율법만 지키면 된다고 했지만, 주님은 안식일법의 취지를 생각하셨습니다. 안식일 법을 제정한 그 취지를 살리라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2장 27절에 보면 기절초풍할 말씀을 하셨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주님이 안식일날 회당에서 병자를 고치니까 고발당한 겁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고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3장 23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문자적으로는 율법을 잘 지키면서, 저 마당 귀퉁이에 심은 푸성귀에 대한 십일조까지도 철저히 구분하여 바치는데, 정작 율법의 근본정신인 정의, 긍휼, 믿음은 다 버렸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은 저주를 선언하시는 겁니다. 이어지는 마태복음 23장 25절 이하를 보면 얼마나 신랄한지 모릅니다. “[2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26] 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27]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28]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29]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이르되 [30]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 우리는 그들이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 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31]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명함이로다 [32] 너희가 너희 조상의 분량을 채우라 [33]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3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거나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서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따라다니며 박해하리라 [35]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이게 다 바리새인의 문자적이고 형식적인 의에 대한 주님의 무시무시한 고발입니다. 주님이 이들의 의보다 낫지 않으면 천국에 못 간다고 한 것은 그들의 외식적인 의를 두고 하신 겁니다.
그러면 율법적인 의가 아닌 복음적인 의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입니다. 복음으로 말미암은 의입니다. 이것이 칭의(稱義)입니다. 혹은 의인(義認)입니다. 의롭다고 인정해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의입니다. 우리는 율법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주님의 고발처럼 그것은 위선이나 외식으로 흐르기 십상입니다. 또한 법조항이 아니라 율법의 근본정신을 추구해야 한다고 하지만 그것도 쉬운 게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서 문자주의보다 더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으로는 안 됩니다. 오직 하나 율법이 아닌 복음적인 의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의롭게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십자가와 대속을 믿는 겁니다. 사실은 의로운 게 아니지만 주님을 봐서 의롭다고 인정해준다는 것입니다. 그런 방법 외에 우리가 의로워질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여러분, 다시 한 번 복음으로 말미암은 의, 칭의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를 허락하사 바리새인도 서기관도 안 되지만 천국에 가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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