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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18m 믿음에서 믿음으로(롬 1:16-17)

20150118m
롬 1:16-17
믿음에서 믿음으로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믿음이라고 해서 다 같은 믿음은 아닙니다. 믿음에는 단계와 급수가 있습니다. 본문 17절 상반절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라고 합니다. 이것은 믿음의 진화, 단계, 수준, 차원을 뜻합니다. 따라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고 한 17절 하반절의 믿음은 저급한 믿음이 아니라 보다 좋은 믿음, 일정 수준의 품위 있고 격조 있는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이야말로 시대의 의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이 말씀하는 보다 좋은 믿음, 품위 있는 믿음, 발전된 믿음은 어떤 믿음일까요? 의인들이 갖는다는 그 믿음은 어떤 믿음일까요? 

우선 알고 믿는 믿음입니다. 우리가 불교를 종교다원주의적 입장에서 관대하게 포용하지 못하는 것은 스님의 외모 때문이 아닙니다. 불교는 기독교도 인정합니다. 종교란 다 착하고 자비롭게 살자는 것이니까 기독교도 잘만 믿으면 훗날 극락왕생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탄 시즌이 되면 절간 앞에도 예수님의 성탄을 축하합니다며 현수막도 설치합니다. 그런데 4월 초파일이 되어도 교회는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불교신앙 자체를 우리는 인정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편협하고 불교쪽이 더 관대합니다. 왜 이런 결과가 나올까요? 물론 불교쪽에서도 반박할 수 있겠습니다만, 우리는 진리를 아니까 불교쪽이 아니라고 하는 겁니다. 이것도 저것도 다 좋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믿음의 대상에 대해서는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재래 종교가 다 그렇습니다. 주문만 남고 빌고 치성만 드립니다. 불교에서는 3천 배를 해야 부처님이 실눈을 뜨고 보십니다. 5만 배를 하면 서울대 간다고 합니다. 무조건 빌어야 합니다. 부적을 지니고 다니면 안전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부적에 대해 설명해 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쨌든 지니고 다니면 된다는 겁니다. 이게 무속종교, 재래종교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미신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흔히 기독교를 계시종교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이 알아들을 수 있는 방식으로 부단히 말씀하고 있는 종교란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맹목적이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당신을 알리십니다. 내 뜻은 이것이다고 말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자기계시라고 합니다. 현대신학자 가운데 칼 바르트는 계시를 세 가지로 구분합니다. 첫째는 성육신한 하나님의 계시인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주님이 바로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사람의 말로 자신에 관해 증언한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주님이 바로 성육신한 하나님의 위대한 계시입니다. 둘째는 문자로 기록된 계시입니다. 66권 신구약 성경이 문자로 기록된 계시입니다. 성경을 보고 부지런히 배우면 하나님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경에 아낌 없이 계시하셨습니다. 셋째는 선포된 계시입니다. 설교입니다. 설교도 현장감 있는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인데, 그 계시를 구체적으로 분류하면 세 가지로 종합할 수 있다는 겁니다. 성육신과 성경, 그리고 설교입니다.

물론 설교 가운데는 엉터리 설교가 많습니다. 횡설수설하거나 코미디하다가 끝냅니다. 시작은 했는데 마무리나 수습도 못하고 끝내는 설교도 많습니다. 그런데도 중요한 것은 누가 뭐래도, 아무리 유치하고 조잡해도 설교는 여전히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수단입니다. 현실적으로 말하면 설교자의 자질이나 소양 때문에 훼방과 때로는 그 품위가 손상되지만, 그럼에도 강단에서 선포되는 설교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저도 가끔 설교방송을 봅니다. 어떤 분들의 설교는 제가 들어도 민망해서 부끄럽고 견딜 수 없습니다. 그런데 더 불가사의한 것은 그런 설교를 수천 명, 수만 명 되는 교인이 들으면서 은혜를 받고 있다는 겁니다. 나는 견딜 수 없는데도 사람들은 천사 같은 얼굴로 그 설교를 들으며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따라서 설교자가 잘못 전했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나중에 하나님 앞에서 책임질 부분이고, 나는 일단 누가 전하든 이 순간 내게 전하는 하나님의 계시라는 것을 믿고 받는 것입니다. 그게 좋은 믿음에 이르는 첩경입니다. 

이사야 1장을 보면 이런 탄식이 나옵니다. “ [2]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3]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4]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이 백성은 너무도 나를 모른다고 하나님이 탄식하시며 그들의 범죄, 부패, 행악이 다 하나님을 몰라서 그렇다는 겁니다. 호세아도 ‘내 백성이 하나님 아는 지식이 없어 망하는도다’고 하면서 피를 토하듯 ‘하나님을 알자’고 했습니다. 주님에 대한 참된 지식이 없이는 누구도 제대로 된 믿음을 가질 수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부단히 보고 들을 때 내 안에서 믿음이 각성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만족해서 안 되고 믿음에서 믿음으로, 더 좋고 건강하고 품위 있는 믿음으로 도약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계시를 통해 하나님을 깊이 알아야 합니다. 

다음은 순종하는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에 대한 앎이면서 자기가 안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입니다. 순종이 믿음이고 불순종이 불신앙입니다. 성경은 순종이 생명이고, 불신앙은 곧 죽음이라고 가르칩니다. 성경은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범하면 정녕 죽는다고 했습니다. 이 엄중한 경고에도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습니다. 선악과를 먹었는데 아담과 하와가 죽었습니까? 성경이 말씀하는 진정한 죽음은 육체적 죽음이 아닙니다. 성경은 그것을 잠잔다고 합니다. 오히려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상태를 죽음이라고 합니다. 아담과 하와도 범죄한 직후에 하나님이 두려워 달아나고 숨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겁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찾아다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다는 뜻입니다. 나더러 주여주여 하는 이가 천국가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갑니다. 사울왕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자 사무엘이 하나님의 뜻을 말하며 책망합니다. {“[22]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23]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삼상 15:22-23). 

제 친구가 목회하는 교회에 재정을 맡아보는 안수집사님이 최근에 난처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고 합니다. 회장이 주일마다 부장급 이상을 불러 회의한 후 점심식사 한 후 귀가를 하게 한 겁니다. 재정 집사가 고민에 빠졌습니다. 고민하다 목사님을 찾아가 상담하니 사정을 얘기하고 선처를 부탁하라고 했습니다. 월요일 오후에 면담이 이뤄졌습니다. 회장은 눈을 감고 재정집사의 말을 다 듣고 나서 ‘교회가 밥 먹여주나. 자네 마음대로 하게.’ 결국 사표내라는 뜻으로 알아듣고 한 주간 고민하다가 사표를 썼습니다. 사표를 들고 회장을 찾아가 ‘그동안 감사했노라’며 사표를 내밀자, 회장님의 태도도 냉담했습니다. 회장실을 나오는데 눈앞이 캄캄하면서 후회가 밀려오고, 가족들의 모습이 스쳐가니 막막하고 대책이 없었습니다. 부서로 돌아와 개인 물건을 정리하고 짐을 싸고 있는데, 비서실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회장님이 부른다는 겁니다. 회장실에 들어갔더니, 이거 받게 하면서 회장님이 봉투를 하나 건네더라는 겁니다. 전별금이겠지 하면서 머뭇거리고 있는데, 받으라고 하면서 내일부터 상무의 직임을 감당하라는 사령장이었습니다. 자네의 그 신념이라면 우리 회사의 든든한 기둥이 될 수 있다고 한 겁니다. 사표 낸 지 20분 만에 중견 건설회사의 임원이 되었습니다. 교회에서 잔치를 벌였습니다. 간증도 하게 했습니다. 

사도행전 5장 29절을 보면 베드로가 사도들과 함께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주님은 죽음의 쓰디 쓴 잔 앞에서도 아버지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순종의 극치입니다. 믿음이 좋다는 것은 그만큼 주님을 닮았다는 뜻이고, 주님을 닮았다는 것은 그만큼 순종하는 인격이라는 뜻입니다.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5-8)고 했습니다. 아브라함도 순종하니 이삭을 살렸습니다. 신명기 28장 1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1]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2]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3]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4]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5]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6]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순종하는 믿음이 복된 믿음입니다. 

올해는 하나님의 계시에 보다 철저하게 순종하셔서 순종하는 자에게 내리는 복을 받고 사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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