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교회 아카이브

그래도 ‘희망’을 말하자



온통 잿빛 전망뿐인 새해, 그래도 우리는 희망을 말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의 역사 속 을미년은 거의 1895년 고종 32년의 비극으로 각인돼 있습니다. 당시 조선 주재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는 서울 주둔 일본군 수비대, 일본 공사 관원, 낭인배 등을 사주해 조선의 궁정인 경복궁을 기습 명성황후를 잔인하게 시해하고 그 시신을 근처 숲속에서 석유를 붓고 불태워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이를 마치 대원군과 왕후의 갈등이 빚어낸 참극인양 날조했는데 이게 바로 우리 근대사의 가장 치욕적인 을미사변의 전말입니다. 그렇다면 그로부터 120년이 지난 오늘의 을미년은 안녕한가?


새해 벽두 강진읍 동성교회 담임목사님으로부터 편지 한 장을 받았습니다. 우리 교회가 15년 넘게 작으나마 매월 후원금을 보내는 교회인데 <현실의 여러 안타까움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기쁨으로 주의 일에 힘쓸 수 있었던 것은 푸른교회의 변함없는 사랑때문이었다>며 <생각할수록 고맙고 참으로 감사하다>는 내용의 인사였는데 척박한 땅에서 묵묵히 희망의 씨앗을 뿌리고 있는 젊은 목회자의 따뜻한 마음이 전해지는 글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올해도 우리의 화두는 <희망>입니다. <희망>이 우리 모두의 삶의 좌표이자 에너지입니다.


그런데 희망도 나이를 먹습니다. 그건 어쩔 수 없습니다. 세상을 좀 더 산 사람들이 젊은 세대들에게 큰 꿈을 가지라고 충고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나이에 비해 꿈과 희망이 겉늙어 버리는 건 곤란합니다. 기성세대는 젊은이들이 너무 꿈이 없고 생각이 없다며 못마땅해 하고 젊은이들은 또 기성세대를 구닥다리요 꼴통이라며 마음을 닫지만 희망은 어느 세대나 절대적이어서 우리는 올해도 여전히 희망에 울고 웃으며 또 죽고 살 것입니다. <희망>하면 저는 항상 아브라함을 떠올립니다. 도대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기 위해 그의 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명하셨다는 것 자체가 전혀 하나님 다워 보이지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이는 것은 단순히 그의 아비됨을 그치는 것만이 아니라 인륜대계가 무너지는 패륜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삭의 등에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이스라엘의 미래가 업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를 죽이는 것은 곧 이스라엘을 죽이는 것이고, 인류의 미래와 희망이 끝장나는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비록 강요받은 의지에 의해 제 자식을 죽이려고 칼을 뽑아 들었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반드시 내 자식을 다시 살려주시리라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외적으로 볼 때는  아무런 가능성도 희망도 안 보였지만 그래도 그는 그 믿음에 전적으로 매달렸습니다. 


우리 인생에는 때로 벅찬 바람이 붑니다.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황당한 일이 닥치기도 하고 어디에도 희망은 보이지 않는 가운데서 현실은 오직 체념 만을 압박하기도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흔히 동요하거나 분노하며 쉽게 절망의 화신이 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자기의 외아들을 제 손으로 잡아 바쳐야하는 그 환장할 순간에도 결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신뢰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침내는 자신도 이삭도 다시 얻은 겁니다. 시퍼렇게 살아 있는 자기 외아들의 목에 칼을 들이대면서도 끝끝내 하나님은 죽은 자도 다시 살리시고 당신의 약속을 반드시 이루신다는 확신과 희망에 목을 내댐으로써 마침내 승리한 것입니다. 


믿음은 체념을 모릅니다. 절망은 믿음의 무덤입니다. 

<청양>의 푸른색은 젊음과 미래와 희망의 상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