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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20141221m</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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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요 1:12-1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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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로고스와 싸르크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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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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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오늘이 주님의 성탄을 준비하고 기다리는 대강절 마지막 주일이고, 금주 목요일이 대망의 성탄절입니다. 성탄이 무엇입니까? 성탄은 어떤 사건입니까? 본문에 따르면 말씀이 육신이 되신 사건입니다. 14절 상반절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이것을 흔히 우리가 성육신이라고 합니다. 이룰 성(成)자입니다. 육신이 되신 겁니다. 도성인신(道成人身)이라고 합니다. 영어로는 인카네이션(incarnation)입니다. 라틴말에서 온 건데, canation은 살, 몸입니다. 여기에 in이 붙어 살이 된 겁니다. 독일말로도 같습니다. 인카나치온(Inkarnation)입니다. 이게 다 본문 14절 말씀에 근거한 겁니다. 헬라말로는 &lt;호 로고스 사르크스 에게네토&gt;입니다. 로고스는 말씀이고, 사르크스는 육체입니다. 로고스가 육체가 된 겁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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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우리야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그래도 성경에 있는 말씀이니까 그대로 믿습니다만, 요한복음을 처음 접했던 헬라 사람들은 아마 엄청난 충격이었을 겁니다. 요한복음은 원래 헬라 문화권 사람을 위해 기록된 복음서입니다. 그런데 로고스는 헬레니즘 전통에서는 고도의 관념적이고 초월적이며 형이상학적 개념입니다.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로서 우주의 제1 원인자, 절대적 존재가 로고스입니다. 요한복음도 헬레니즘 문화권의 이러한 관념을 차용하여 기독교식으로 재해석한 겁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로고스가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요한복음 저자가 헬라 사람들의 전통적 관념인 로고스를 기독교식으로 재해석한 겁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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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그런데 여기까지는 좋습니다. 우리가 수천 년 동안 써온 하늘님을 가톨릭이 차용하여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같은 의미입니다. 문제는 로고스가 사르크스로 육화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사건이 성탄이라는 겁니다. 이것을 헬라 사람들은 수용할 수 없습니다. 헬라 사람들은 영과 육을 구분하고, 빛과 어둠을 구분합니다. 이원론자들입니다. 헤브라이즘은 철저하게 일원론입니다. 로고스는 지고지순한 절대적 존재요 빛이라면, 사르크스는 어둠입니다. 로고스가 진리라면, 사르크스는 거짓이요 영혼을 가두는 감옥입니다. 그런데 로고스가 사르크스가 됐다고 하니 헬라 사람들에게는 말이 안 되는 겁니다. 그들에게는 영이 참이고, 영이 구원을 받고, 영이 천국을 가고, 영이 영원히 삽니다. 육은 거짓이고, 악마적이고, 그림자요, 어둠입니다. 따라서 지고지순한 로고스가 거짓되고 부패한 악마적인 육으로 탄생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겁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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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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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그럼에도 성경은 분명히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고 합니다. 로고스가 사르크스가 되어 성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겁니다. 그 물증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겁니다. 이것은 관념적 철학이 아니라 우리가 손을 내밀면 만질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 실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를 영접하는 자는 곧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 12절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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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그래서 헬라 사람들도 구원을 받아야겠으니까 일단 기독교에 입문합니다. 그러고 나서는 반기를 들었습니다. 로고스가 사르크스가 되었다는 요한복음의 가르침을 헬라철학식으로 재조명을 했습니다. 그래서 로고스가 사르크스가 된 게 아닐 우리 눈에 사르크스처럼 보였을 뿐이라고 합니다. 이게 소위 가현설(도케티즘)입니다. 어떻게 말씀이 육신이 되냐며 다만 우리 눈에 그렇게 보였을 뿐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주장을 편 사람들이 초대교회 최대 이단인 영지주의(그노시스)입니다. 이들의 영향력은 대단했습니다. 합리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이 영지주의자들에 대한 반박으로 기록되었다고 보는 학자들의 견해도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성탄했다는 사건은 어려운 진리이지만 사실입니다. 주님이 바로 육신이 되신 말씀입니다. 따라서 성탄은 하나님이 자신을 맨 밑바닥까지, 영지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어둠에까지 자기를 낮추시고 비하한 사건입니다. 로고스가 사르크스의 자리까지 자기를 완전히 비운 사건은 전무후무한 기적이요 역설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 10절 이하입니다.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아무리 황당해도 그것이 사실이고 진리이니까 성탄하신 주님을 영접하라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무한한 권세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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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왜 이렇게 하나님이 사람이 되시어 누추한 땅에 성탄하셨을까요?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고, 누구도 영접하지 않아서 가장 초라하고 구차한 외양간을 통해 오시면서까지 굳이 성탄하실 필요성이 무엇입니까? 요즘 우리나라의 최대 화두이기도 한 &lt;소통&gt; 때문입니다. 지난주에 한국 갤럽이 박근혜 대통령 취임 2주기를 맞아 지지율 여론조사를 한 것을 보니, 우리 국민의 37% 긍정적으로, 52%는 부정적인 평가를 했습니다. 그런데 부정적 평가를 한 사람들에게 그 이유를 물었더니 소통 미흡이라는 대답이 제일 많았습니다. 어느 시대나 공동체이든 간에 소통이 막히면 대화도 공감도 이해도 되지 않습니다. 누구의 지지도 얻을 수 없습니다. 거기에는 어떤 교감도 교제도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로고스가 사르크스가 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하나님과 인간은 영원한 절대 타자로 남았을 겁니다. 영원히 만날 수 없었을 것이고, 양자간의 소통은 불가능했을 것이고, 서로간의 교감이나 교제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했을 겁니다. 같은 차원이나 세상에 살고 있어도 종이 다르면 대화가 되지 않습니다. 같은 동물인데도 우리가 다른 짐승과 대화할 수 없습니다. 사람과 유전자 구조가 가장 유사하다는 오랑우탄과도 우리는 대화하지 못합니다. 종이 다르면 코드가 다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개가 짖는다, 새가 노래한다고 하지, 그들 대화의 내용을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는 이보다 훨씬 더 극단적입니다. 종의 차원이 아니라 존재론적 차원이 다르기에 원초적으로 소통이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람과 대화하기를 원하신 겁니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소통이 필요합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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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히브리서 1장 1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1]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소통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옛적에, 구약 때는 간접적인 방식을 사용하여 대화하셨습니다.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소통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존재론적 차원의 소통은 내가 개가 되거나, 개가 사람이 되면 소통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도 마찬가집니다. 결국 하나님 자신이 인간이 되는 일을 감행하신 겁니다. 이것이 성육신입니다. 우리를 제대로 만나기 위해, 우리에게 당신의 뜻을 충실히 전달하기 위해, 우리를 다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자신을 비하했습니다. 외양간까지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존재론적 차원을 사람과 맞췄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과 우리와는 정서가 같습니다. 언어가 같아졌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생생한 하나님의 육성입니다. 주님의 33년간의 삶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어떤 경우든 주님의 말씀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 자신의 메시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말로 듣는 것입니다. 이게 성탄을 통해 이루어진 하나님의 무한한 복입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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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저는 올 성탄절을 맞아 온 국민은 물론이고 특히 대통령이 하나님의 대화방식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성탄절은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고 우리를 상대하기 위해 자신을 맨 밑바닥까지 낮추고 완전히 비운 초유의 사건입니다. 우리도 올해 새롭게 성탄하실 주님을 뵈려면 자신을 비워야 합니다. 그래서 오만한 사람은 절대 성탄하시는 주님을 뵙지 못합니다. 로고스가 사르크스가 된 것처럼 우리를 완전히 비워야 합니다. 그래서 가장 겸손하고 비천한 모습으로 오신 주님을 우리도 겸손함으로 만나 뵙고 모두 성탄의 복이 충만한 복된 성도가 됩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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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b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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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b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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