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교회 아카이브

마라나타의 계절



어느 새 캘린더가 달랑 한 장 남았습니다. 세밑은 늘 이렇게 아쉽고 허전하지만 그래도 우리에게는 이때가 가장 아름다운 기다림의 계절이기도 합니다.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의 추상화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란 작품을 보면 초현실주의답게 많은 상징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형체의 큰 나무 위쪽에는 어렴풋이 다윗왕의 모습이 보이고 십자가 중앙에는 밝은 빛이 원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정체성을 뜻하는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별이라>(계 22:16)는 말씀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 아래에는 마리아와 제자들이 보이고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마 24:30) 하신 대로 구름이 보입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 그렇습니다. 기다림은 2천 년 기독교사의 결론이자 성경 66권의 결론입니다. 16세기 이후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어떤 새로운 것, 새 시대에 대한 기다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 이후에는 희망과 기다림이 곧 철학과 신학의 주제가 되다시피 했습니다. 삶은 기다림에서 결정되고 무엇을 어떻게 기다리느냐가 현재 내 삶의 질을 규정한다는 것입니다(위르겐 몰트만,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 기다림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게 아닙니다. 기다림이 없는 사람은 살았지만 실은 죽은 사람이나 진배없습니다. 우리는 내일을 기다리고 또 명년을 기다립니다. 그러나 내일을 맞고 새해가 온다 해도 우리의 기다림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내 눈앞의 구체적인 설정이 곧 나의 궁극적인 기다림의 대상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에게는 구체적인 약속, 그리고 그 약속의 담보까지도 주어진 그런 기다림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성경이 말씀하는 기다림, 반드시 내가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신 주님의 재림입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그분은 이미 우리가 만난 분입니다. 언제 만났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정말 그분이 내 마음에 기다려진다면 우리는 이미 그를 만났습니다. 언젠가 우리가 만났던 그분이 올해도 다시 오십니다. 궁극적인 기다림이 너무  요원하기에 시간을 토막 내 기다림의 징검다리로, 표상으로 삼고 있는 성탄절이 박두했습니다. 요한은 계시록을 기록하고 마지막 붓을 놓으며 아람어로 <마라나타!> 즉,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며 고백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소원, 이런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분의 오심은 결코 홀로 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승려이자 민족 시인인 한용운은 님을 사모하며 <오세요. 당신은 오실 때가 됐어요. 어서 오세요 / 당신은, 당신이 오실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 당신이 오실 때는 나의 기다리는 때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님의 오심과 나의 기다림은 별개가 아니라 동시적인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만나지 않은 것은 님이 아니요 / 이별이 없는 것도 님이 아닙니다 / 님은 만났을 때 웃음을 주고 / 떠났을 때 눈물을 줍니다 / 만날 때 웃음보다 / 떠날 때 눈물이 좋고 / 떠날 때 눈물보다 / 다시 만나는 웃음이 좋습니다 / 아, 님이여 / 우리의 다시 만나는 웃음은 어느 때 있습니까>


마음에 사무치다 못해 처절하기까지 한 그리움과 기다림, 우리 모두 올해도 나를 울게 한 그분이 꼭 나를 다시 웃게 하실 것을 믿읍시다. 슬픈 현실 속에서도 결코 그 날에 대한 기대와 바람을 접지 맙시다. 삶에 지쳐 아무렇게나 자신을 내던져버린 이웃들에게도 지금이 바로 기다림의 계절인 대강절임을 알리며 곧 성탄하실 주님을 맞게 합시다.   

     

마라나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