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116m 감사의 달인(골 3: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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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16m
골 3:15-17
감사의 달인
[15]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바울은 감사의 달인입니다. 자신도 감사하며 살았지만 감사의 전도사로서 당시 자신이 설립하고 개척한 교회들의 성도에게도 감사하며 살도록 당부하고 가르쳤습니다. 본문 15절 하반절, 16절 하반절, 17절 하반절 마다 감사하라고 합니다. 빌립보서 4장 6절에서도, 데살로니가전서 5장 18절에서도 감사하라고 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바울이 가르치고 당부한 감사생활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겁니다. 우리의 현실은 감사한 일보다는 우울하고 불쾌하고 짜증스런 일이 더 많습니다. 바울만 해도 그렇습니다. 늘 감사를 입에 달고 살지만, 그의 삶이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살기에 합당했느냐면 전혀 그렇지 못햇습니다. 객관적으로 볼 때 그의 삶의 조건들은 그가 감사의 달인, 감사의 전도사가 되기에 족하지 못했습니다. 바울의 현실이 어떠했습니까?
그의 고린도교회와의 관계를 보십시다. 고린도교회는 바울이 개척했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바울을 배신했습니다.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만, 가장 치명적인 것은 그들이 바울의 사도직을 부인한 겁니다. 그들이 바울을 향해 당신이 사도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더 기가 막힙니다. 고린도후서 10장 10절을 보면, 그의 몸이 약해서 볼품이 없고 그의 말이 시원찮다고 했습니다. 바울의 외모와 언변을 문제 삼아 당신은 사도가 아니라고 한 겁니다. 원래 바울은 자주 사도권 시비에 휘말렸습니다. 사도는 <아포스톨로스>라고 해서 주님 생전에 주님을 모시고 다녔던 제자들에게 부여한 칭호였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바울은 예수 믿는 사람을 박해하는 선봉장이었습니다. 바울은 주님이 승천한 이후에 회심하였습니다. 그래서 자주 바울은 사도권을 공격 받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이 사도직을 주셨다고 방어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는 바울의 비주얼과 언변을 문제 삼고 사도권을 부인한 겁니다. 사도의 풍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언변에 사도의 카리스마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서방교회 전통의 성화를 보면, 바울의 모습은 완벽한 대머리에, 어깨도 왼쪽이 기울었습니다. 큰 메부리코에 눈도 돌출해 있습니다. 키도 작습니다. 그래서 바울을 보고 사도가 아니라 <루저>라고 한 겁니다. 아무리 못 생겨도 그렇지 자기들을 전도한 사도를 외모를 보고 루저라고 합니까? 이게 용납되십니까? 바울의 말이 신통치 않았다는 것도 그의 말이 논리적이지 않았다는 게 아닙니다. 당시 헬레니즘 문화권에는 환상적인 웅변술이 신접한 사람의 증거라는 문화가 있었습니다. 바울에게는 그런 환상적이고 주술적이고 청중을 압도하는 탁월한 웅변술이 없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이야말로 사도로서의 소양이 없는 사람이라고 본 것입니다. 한국 교회에도 그런 경향이 없지 않습니다. 성령충만하고 신령한 목사님은 그 목소리부터 뭔가 다르다고 생각하고 기대합니다. 부흥강사들의 목소리를 들어보면, 제가 듣기에는 약장수 같은 목소리인데, 그런 목소리를 좋아하는 성도가 많습니다.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 그랬습니다. 약장수 같은 목소리를 원했던 겁니다. 바울은 그렇지 못한 겁니다. 고린도후서 11장 6절을 보면, 바울은 그걸 다 인정합니다. 나 못생겼고, 말에도 약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식은 아니라고 합니다. 글은 누구보다 자신 있다고 합니다. 얼마나 자존심 상하고 배신감에 가슴이 쓰렸겠습니까? 기껏 전도했더니 이렇게 사람을 인격적으로 모독하고 사도도 아니라고 한 겁니다. 그러니 바울이 얼마나 시험에 들었을까요? 그럼에도 바울은 원망이나 참을 수 없는 노여움이 아니라 주님께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야말로 진정한 감사의 달인입니다.
바울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습니다. 몸을 찌르는 가시, 불치병이 있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고민하며 세 번이나 작정하고 기도했는데, 주님이 고쳐주지 않으셨습니다. 바울은 환자들을 위해 기도할 때는 다 나았는데, 정작 자기 머리는 못 깎았습니다. 죽은 사람도 기도해서 살렸는데, 자기 몸의 가시는 뽑아내지 못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 7절을 보면, 바울은 자기의 병을 사탄의 사자라고 합니다. 그만큼 감당하기 힘들고 고통스러웠으며 저주스러웠다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4장 14절을 보면,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며 감사했습니다.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은 바울의 가시에 시험 들지 않아 감사하다는 겁니다. 바울은 심각한 지병을 위해 기도했으나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으십니다. 그런 가운데 바울은 소중한 깨달음을 얻습니다. 자신의 가시가 자신으로 하여금 자만하도록 하지 못하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가시가 더는 고통스러운 게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며 오히려 감사합니다.
바울의 그 병은 어떤 병이었을까요? 두통, 학질, 안질, 간질이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간질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그게 어떤 병이었든 그것은 불치병이었고, 자신에게도 남에게도 시험이 들 만큼 악질이었습니다. 간질이었다면, 설교 잘 하고 내려가다 발작하면 그게 무슨 은혜가 되겠습니까? 흉측한 제 병 하나 못 고치는 주제에 무슨 사도 노릇을 하냐며 손가락질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럼에도 바울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노라고 합니다. 약할 때 도리어 강해지노라고 하면서 감사했습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바울은 골로새서를 로마의 깊은 지하 감옥에서 사형수로 수형생활하며 쓰고 있습니다. 언제 불려나가 목 베임을 당할지 모릅니다. 그런 상황에서 쓰고 있는 편지인데 감사를 입에 달고 있습니다. 불가사의합니다. 바울은 오래지 않아 불려나가 참수당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신세타령이나 비참해 하지 않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가장 열악하고 비참한 로마 지하 감옥에 갇혀서 남에게 감사를 말하고 있습니다. 백발이 성성한 몸으로 습기 찬 지하 감방에 갇혀 언제 끌려 나가 참수를 당할지 모르는 처지인데 감사를 당부하고 있습니다. 감사의 달인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렇듯 바울이 말하는 감사는 우리가 아는 감사와 다릅니다. 감사할 일이 있어 감사하는 조건반사적 감사나 상대적인 감사가 아닙니다. 내가 전도해서 집사 장로된 사람이 나를 배신해도 감사하는 것, 나를 배신해서 죽도록 고통스럽게 해도 감사, 감옥에 갇혀 죽을 날만 기다리는 사형수인데도 감사입니다. 역설적이고 초월적인 감사입니다. 이런 감사가 성경이 말하는 감사입니다. 감사할 일이 있어 감사하는 것은 누구나 합니다. 그러나 초월적인 감사, 역설적인 감사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닙니다. 모든 것이 내게 저주나 화가 아니라 주님의 은혜요 복이라는 확신이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총임을 믿는 자만이 전천후로 감사할 수 있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이 진짜 신자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이 믿음이 뭔지, 하나님의 복이 뭔지를 아는 사람입니다.
역설적인 감사, 전천후의 감사가 참 은혜요 참 믿음입니다. 본능적이고 세상적인 조건반사적 감사가 아니라, 바울처럼, 구약의 하박국 선지자처럼 우리에 소나 양이 없어도, 소출이 없어도 감사하는 게 진짜 감사합니다. 추수감사절에 이렇게 감사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