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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aragraph:p0001 -->
<p class="p1">20141109m</p>
<!-- paragraph:p0002 -->
<p class="p1">사 46:3-5</p>
<!-- paragraph:p0003 -->
<p class="p1">요람에서 무덤까지</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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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 paragraph:p0005 -->
<p class="p1">[3] 야곱의 집이여 이스라엘 집에 남은 모든 자여 내게 들을지어다 배에서 태어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업힌 너희여 [4]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내가 업을 것이요 내가 품고 구하여 내리라 [5]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기며 누구와 짝하며 누구와 비교하여 서로 같다 하겠느냐</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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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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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우리 교회가 이 건물 2층에 있을 때, 2003년 쯤으로 기억합니다. 점심시간에 가끔 우리 교회 새벽기도회에 참석하시던 분이었습니다. 두 달 전까지만 해도 건영아파트에 살다가 남편이 사업하다 실패해서 사채까지 썼고 결국 아파트를 팔아 갚았는데, 달랑 1000만원을 들고 분당 태재고개 넘어 집을 얻으러 다녔다고 합니다. 천만 원 보증금에 월 40짜리 방입니다. 거기에 들어가서 보니 그 집이 보통 복잡한 집이 아니더라는 겁니다. 이혼한 부부가 남자는 남자대로, 여자는 여자대로, 친정 모친은 그 모친대로 그 보증금이 자기 것이라며 싸우는 바람에 그 집에 들어간 지 두 달 동안 날마다 시달리며 괴로움을 겪었는데, 이제는 그 1000만원 보증금까지도 위태롭게 되었다는 겁니다. 엄연히 계약서를 썼음에도 그들 중 한쪽이 무단주거침입으로 고소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날 그분이 제게 물어왔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정을 버리셨나봅니다. 남편 회사 망하게 하시고, 하루아침에 집 날아가게 하시고, 이제 월세 1000만원 보증금까지 날리게 되었고, 딸이 고등학교 2학년이어서 분당권을 떠나지 않으려고 했는데 어째서 그것마저 막으시는 걸까요? 그때 제가 그분께 드린 말씀이 오늘 본문입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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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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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3절 하반절 이하입니다. “배에서 태어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업힌 너희여 [4]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내가 업을 것이요 내가 품고 구하여 내리라.” 그야말로 요람에서 무덤까지 내가 너를 책임지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최소한 오늘 이 말씀 하나만 붙잡고 살아도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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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 paragraph:p0011 -->
<p class="p1">요람에서 무덤까지 안고 가겠다고 하십니다. 찬송가 393장입니다. “오 신실하신 주 내 아버지여 늘 함께 계시니 두렴없네 그 사랑 변찮고 날 지키시며 어제나 오늘이 한결같네.” 요한복음 13장 1절입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요람에서 무덤까지 우리를 품고 가실 분은 주님뿐입니다. 저를 찾아온 그분의 말씀입니다. 전에는 자기를 많이 사랑해주셨는데 지금은 아니라는 겁니다. 자기를 버린 것 같다는 겁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내 감정, 내 사랑이 식은 것이고, 내 믿음이 저 밑바닥까지 떨어진 겁니다. 하나님의 다른 이름은 &lt;영원&gt;입니다. 그 이름 그대로 영원토록 당신의 사랑에 신실한 분입니다. 우리가 그렇지 못한 겁니다. 달이 비치는 호수에 돌맹이 하나 던지면, 당장에 파문이 일어 호수에 비친 달은 산산조각이 납니다. 그러나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면, 여전히 보름달이 둥실 떠있습니다. 주님이 나를 떠나거나 당신의 사랑을 철회한 게 아니고, 내 마음에 파문이 일어서 주님의 형상이 일그러진 겁니다. 주님은 지금도 여전히 나를 따뜻한 품에 안고 가십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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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 paragraph:p0013 -->
<p class="p1">여러분은 누가 술 마시러 가자고 하면 어떻게 하십니까? 그게 죄는 아니더라도 잘한 것도 아닙니다. 술집에서는 아름답거나 은혜로운 일이 안 생깁니다. 그럼에도 친구나 동료나 상사가 위협을 하면 안 되는데 하면서 할 수 없이 따라 나섭니다. 따라가서 안주만 먹습니다. 그러다가 나 때문에 판 깨치는 게 아닌가 싶어 한 잔 마십니다. 그러면서 기도합니다. 취하지 않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술이 술술 잘 넘어가 결국 사고를 칩니다. 집에 돌아와 밤새 고통을 당하다가, 이튿날 정신 차리고서는 주님을 탓합니다. 저를 좀 말려주시지 이게 무슨 추태냐고 말입니다. 여러분, 때로 내가 실수하고 무책임하여 실패한 것을 주님께 떠맡긴 것을 주님은 여전히 너 틀렸다고 하시지 않습니다. 이게 주님의 한계입니다. 여전히 우리를 절대적으로 사랑하시고 절대적으로 용서하십니다. 그래서 &lt;영원히&gt; 입니다. 절대 우리를 내쫓지 않으시고 영원히 품고 가십니다. 괜히 제 바람에 우리가 생난리를 피우는 겁니다. 주님께 원망을 퍼 대어도 주님은 우리를 한결같이 사랑하시사 우리를 품고 가십니다. 주님이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기에 얼마나 다행하고 고마운 일입니까.</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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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 paragraph:p0015 -->
<p class="p1">다음으로 내가 업고 가겠다고 합니다. 3절과 4절 마지막 부분에 보니 주님이 우리를 업고 간다고 하십니다. 주님이 우리를 태에서 나올 때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업고 가신다는 겁니다. 우리를 쉬게 하시고 보호하신다는 뜻입니다. 모래 위의 두 발자국이라는 시 아시지요? 어떤 사람이 꿈을 꿨는데, 자기와 주님이 나란히 해변을 걷고 있고 모래 위에는 두 사람의 발자국이 찍혀 있습니다. 그런데 군데군데 발자국이 한 사람만 찍혀 있을 때를 보니 그때가 바로 자기가 가장 어렵고 슬프고 힘들 때라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 따져 물었습니다. 왜 제가 힘들 때 저를 혼자 두셨습니까? 주님은 나는 너를 단 한 번도 네 곁을 떠난 적이 없다. 저기 모래 위에 찍힌 발자국은 네 것이 아니라 내 것이다. 저 때는 네가 너무 힘들어 해서 내가 너를 업고 갔다. 우리는 항상 혼자서 난리입니다. 하루에 12번도 더 주님을 떠났다, 삐쳤다 하면서 변덕을 부립니다. 하지만 주님은 여전히 나를 업고 가십니다. 내가 허무하게 팥죽 한 그릇에 내 영혼을 팔 때, 주님은 절대 나를 팔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다고 하십니다. 아예 문신을 하듯, 각인을 했다는 겁니다. 우리와 천사가 있다면 누가 주인공입니까? 천사겠지요. 아닙니다. 주인공은 우리입니다. 우리를 위해 천사가 있는 겁니다. 주님은 천사를 업어주시지 않으십니다. 천사들이 우리를 부러워한다고 한 말씀은 과장이 아닙니다. 천사는 멋진 날개가 있지만 우리만큼은 아닙니다. 심지어 바울은 ‘너희가 장차 천사를 심판한다’고까지 했습니다. 천사들을 무시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는 천사들보다 우리가 더 소중한 존재라는 겁니다. 주님이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에게 처음 나타나셨을 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째서 나를 핍박하느냐’고 하셨습니다. 바울이 언제 주님을 핍박했습니까. 바울과 주님은 동시대를 살았지만 일면식도 없던 관계입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바울에게 왜 나를 핍박하느냐고 합니다. 바울은 스데반을 핍박한 적은 있습니다. 주님은 항상 그렇게 생각하십니다. 누가 우리를 핍박하면 주님은 자기를 핍박한 것이라고 생각하십니다. 주님이 우리를 업고 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바울에게 왜 나를 핍박하느냐고 하신 것은 정확한 표현입니다. 우리가 고통스럽다는 것은 다 엄살이고 주님이 대신 당하고 계십니다. 주님이 내 대신 죽으시고, 주님이 내 대신 목말라 하시고, 주님이 내 대신 헐벗으시고, 주님이 내 대신 신용불량자가 되어 망신을 당하시고, 주님이 빚쟁이에게 당하고 계십니다. 언제까지 그렇게 하시냐면 백발이 되기까지, 아니 무덤에 들어가기까지, 아니 영원토록입니다. 나를 등에 업고 가시며 당신의 온몸으로 모든 것을 막아주시고 당하시는 주님께 감사하며, 주님 등에서 평안을 누리기를 바랍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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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 paragraph:p0017 -->
<p class="p1">4절 하반절을 보면 구하여 낸다고 하십니다. 반드시 우리를 구원하겠다는 약속입니다. 왜 우리의 구원이 자꾸만 흔들릴까요? 우리가 우리의 근거를 내 믿음에서 찾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믿음 믿음 하지만 말이 믿음이지 우리 믿음이란 것은 절대 믿을 게 못 됩니다. 우리의 믿음이란 게 얼마나 불안정하고 간사하고 변덕이 죽 끓듯 합니까? 종 잡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기분따라 날씨따라 춤춥니다. 정말 알량한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의 근거를 그런 내 믿음에 두는 한 언제나 불완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열심히 믿을 때는 확신하다가도 좀 정체되면 확 떨어집니다. 그래서 비참해집니다. 구원은 내 믿음의 정도, 내 영적 기상도에 따라 하나님이 줬다뺐었다 하는 게 아닙니다. 구원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믿음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주신 것이기에 감사한 겁니다. 내 믿음의 대가인데 감사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태에서 노년에 이르기까지, 요람에서 무덤까지 안고 업고 가시는 주님의 사랑에 근거된 게 우리의 구원입니다. 우리의 구원의 근거를 우리 믿음이 아니라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 사랑에 두십시오. 부부는 이혼하면 남이지만, 부모자식의 관계는 단절이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면 부모자식은 법적 관계가 아니라 혈연적인 관계, 운명적인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주님의 관계가 바로 그렇다는 겁니다. 우리와 주님과의 관계는 사실 그보다 더 질기고 진하고 영원한 영적 관계입니다. 오죽하면 여인이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오죽하면 칼도 사망도 천사도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다 제 바람에 약해졌다 강해졌다 생난리입니다. 우리는 흔히 내가 믿음으로 주님을 붙잡고 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내가 놓으면 끝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붙잡고 가다가 놔도 상관 없습니다. 주님이 나를 업고 가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님을 놔 버리면 천 길 벼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내 느낌일 뿐입니다. 주님이 나를 품에 안고 가시기에 내가 아무리 주님을 놔도 상관 없습니다. 구원은 그런 것입니다. 내가 놨다고 해서 끝장 나는 게 아닙니다. 주님은 나를 여전히 나를 붙잡고 계시고, 주님은 여전히 나를 업고 계시고, 주님은 나를 여전히 안고 가십니다. 어떤 경우에도 구원은 안전합니다. 가톨릭의 경우엔 구원받은 자라해도 치명적인 죄를 범하면 하나님이 주었던 구원을 취소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알미니안주의, 웨슬리안(감리교 등) 쪽이나 오순절 계통도 그런 방향으로 가르칩니다. 그러나 개혁교회는 절대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내가 쥐었다 펴는 것과는 상관없습니다. 엄마는 자기 아이를 업고 가다 떨어뜨릴 수 있습니다. 주님은 그런 실수를 안 하십니다. 이것은 죄를 과소평가하는 게 아니라 주님의 구원이 그만큼 더 위대하다는 뜻입니다. 죄도 사망도 권세자라 할지라도 주님이 이룩하신 구원은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게 로마서의 가르침입니다. 내가 못나졌기에 주님이 내 구원을 취소했다는 자학증에 빠지지 맙시다. 요한1서 2장 1절입니다. “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우리가 죄를 범하면 우리 앞에 나서서 ‘하나님 그래서 제가 십자가를 졌습니다. 제가 저 사람의 죄를 다 지고 갔습니다’며 우리를 변호하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로마서 8장 34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p>
<!-- paragraph:p0018 -->
<p class="p2"><br></p>
<!-- paragraph:p0019 -->
<p class="p1">여러분, 우리는 지금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습니다. 우리의 선택이나 결단이 최선이라는 보장도 없습니다. 그러기에는 우리 삶에는 변수와 복병이 많습니다. 그저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불안정할 뿐입니다. 오직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의 구원입니다. 천지가 뒤집혀도 이것 하나만큼은 분명합니다. 내가 너를 구하여 내리라. 내가 너를 무덤까지 업고 가겠다. 내가 너를 내 따뜻한 품에 끝까지 안고 가마. 누구도 못 건드립니다. 내 구원에 대한 주님의 신실한 약속이요 보장입니다. 그러면 된 것 아닙니까? 뭘 더 바라십니까? 제발 슬픈 표정 짓지 마십시오. 낙심천만해서 어깨를 늘어뜨리지 마십시오. 밝은 희망으로 큰 기대를 가지십시오. 올 가을 풍성한 감사의 열매를 수확하여 행복도 누리고 하나님께 영광돌리기를 기원합니다.</p>
<!-- paragraph:p0020 -->
<p class="p1"><br></p>
<!-- paragraph:p0021 -->
<p class="p1"><br></p>
<!-- paragraph:p0022 --><span class="archive-media-placeholder"><a href="https://www.youtube.com/embed/bmxSbC8-9v4" title="미디어 원본"></a></spa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