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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05w 신명기 강해 51(신 25:1-10)

20141105w 신명기 강해 51

신 25:1-10


[1] 사람들 사이에 시비가 생겨 재판을 청하면 재판장은 그들을 재판하여 의인은 의롭다 하고 악인은 정죄할 것이며 [2] 악인에게 태형이 합당하면 재판장은 그를 엎드리게 하고 그 앞에서 그의 죄에 따라 수를 맞추어 때리게 하라 [3] 사십까지는 때리려니와 그것을 넘기지는 못할지니 만일 그것을 넘겨 매를 지나치게 때리면 네가 네 형제를 경히 여기는 것이 될까 하노라 [4] 곡식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지니라 [5] 형제들이 함께 사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 가지 말 것이요 그의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6] 그 여인이 낳은 첫 아들이 그 죽은 형제의 이름을 잇게 하여 그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 [7] 그러나 그 사람이 만일 그 형제의 아내 맞이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면 그 형제의 아내는 그 성문으로 장로들에게로 나아가서 말하기를 내 남편의 형제가 그의 형제의 이름을 이스라엘 중에 잇기를 싫어하여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내게 행하지 아니하나이다 할 것이요 [8] 그 성읍 장로들은 그를 불러다가 말할 것이며 그가 이미 정한 뜻대로 말하기를 내가 그 여자를 맞이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노라 하면 [9] 그의 형제의 아내가 장로들 앞에서 그에게 나아가서 그의 발에서 신을 벗기고 그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이르기를 그의 형제의 집을 세우기를 즐겨 아니하는 자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하고 [10] 이스라엘 중에서 그의 이름을 신 벗김 받은 자의 집이라 부를 것이니라


하나님의 율법을 보면 재판에 관한 규례가 많습니다. 이것은 고대시대에도 이미 서로간의 이해충돌이 많았다는 뜻입니다. 사람 사는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성경이 자주 하나님을 공의로우신 재판관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시비가 잦았고 재판이 사회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1절을 다시 봅니다. “사람들 사이에 시비가 생겨 재판을 청하면 재판장은 그들을 재판하여 의인은 의롭다 하고 악인은 정죄할 것이며.” 이 자명한 말씀을 율법으로 정하신 것은 현실은 그렇지 않았음을 반증합니다. 지금도 여전합니다. 의인이 죄인이 되고 악인이 의인으로 둔갑하기도 합니다.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기도 합니다. 그 옛날에도 이런 일이 비일비재했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도 그런 일이 적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억울한 사람들이 양산된 겁니다. 생사람 잡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사회가 건강하고 정의로운 사회라는 것입니다. 


죄 지은 사람을 정죄합니다. 태형을 가하게 되었을 때, 40까지는 때리되 그 이상은 때리지 말라고 합니다. 이게 너무 가혹한 벌이기에 40에서 하나 감한 39번만 때리라고 했습니다. 지금도 이슬람권이나 싱가폴에는 아직도 태형이 남아 있습니다. 이슬람권에서는 여자들에게도 태형을 가합니다. 싱가폴은 여자들에게는 태형을 가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외국인들에게도 이 태형을 적용합니다. 무려 40여 개의 죄목이 있습니다. 이렇게 40대까지 태형을 가하고 그 이상은 때리지 말라고 한 것은 태형이 혹독하고 무섭기 때문입니다. 바울도 유대인에게 잡혀가서 태형을 받았습니다. 40에서 하나 감한 매를 5번이나 맞았다고 고백합니다. 로마인들도 태형을 가했는데, 로마인들은 채찍으로 태형을 가했습니다. 등을 채찍으로 때렸습니다. 그 채찍에는 쇳조각이나 뼛조각을 달았습니다. 그러니 채찍에 맞으면 살이 찢기고 뜯어져 나온 겁니다. 어쨌든 태형을 가할 때 40은 넘지 말라는 규정입니다. 


4절입니다. “곡식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지니라.” 타작할 때 소가 곡식을 먹는다고 입에다 망을 씌우지 말라는 겁니다. 최소한 타작을 하는 소는 그래도 곡식을 먹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배고픈 소가 입에 망이 씌워져 있어 곡식을 못 먹는다면 아무리 짐승이지만 얼마나 가혹합니까? 그런데 바울은 이 말씀을 사람들에게 적용합니다. 고린도전서 9장 9절 이하입니다. “[9] 모세의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10] 오로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그러면서 계속해서 1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에서 섬기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타작하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고 한 것처럼 성전에서 일하는 자의 기본적인 생활을 보장하라는 겁니다. 


5절 이하의 말씀은 이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장자문화가 강조되는 공동체입니다. 장자를 통해 하나님의 복의 약속이 계승된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장자가 자식을 보지 못하고 죽으면, 그 장자의 아내는 그 집에서 나가는 게 아니라 그 장자의 동생들이 형수를 아내로 맞아 장자의 대를 잇게 하라는 게 이스라엘의 오랜 관습법이자 율법입니다. 주님 족보에 나오는 다말 이야기도 배경은 장자문화입니다. 마태복음 22장을 보면 주님이 사두개인과 부활에 관해 변론합니다. 사두개인이 주님께 난해한 질문을 합니다. 부활을 가르친다면, 이런 경우는 어떻게 되느냐며, 제기하는 질문이 장남이 결혼하여 아내를 남기고 죽고, 형수와 결혼했던 마지막 아들까지 다 죽었는데, 그러면 이 장남의 부인은 누구의 부인이 되느냐는 겁니다. 주님은 하나님 나라에서는 시집장가 가지 않는다고 답하십니다. 사두개인이 제기한 문제도 이스라엘의 오랜 관습법입니다. 다말은 유다의 장남 엘과 결혼했으나 남편이 죽습니다. 그러자 엘의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맞습니다. 엘의 동생 오난이 아이를 낳아봤자 자기 자식이 아니라 형의 자식이 되기에 체외사정을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그를 죽이십니다. 결국 다말은 시아버지 유다를 속이고 동침해 쌍둥이를 낳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녀의 행위를 높여 보십니다. 이게 장자문화의 전통입니다. 이 장자문화의 의미는 하나님의 약속과 복이 자손만대에 전승되고 계승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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