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019m 성숙을 위한 기도(엡 3: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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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19m
엡 3:14-19
성숙을 위한 기도
[14]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15]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16]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19]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복음서를 보면 주님은 밤이 맞도록 기도하시고, 새벽에도 한적한 곳에 나가 기도하시고, 저녁에도 홀로 산에 가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래서 성경만 보면 주님은 대체 언제 주무셨나, 쉬셨나 할 정도입니다. 주님이 주무셨다는 기록은 제자들과 함께 배 타고 가시다가 잠시 고물에서 눈을 붙이셨다는 기록 외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저 같은 사람은 일단 졸려서 주님을 못 따라갈 지경입니다.
그런데 바울을 보십시오. 바울은 그 누구보다도 주님을 많이 닮은 사람입니다. 그는 언제 어디서나 기도하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주님은 자주 죄인들과 식사하셨다는 기록은 있는데, 성경에는 바울이 식사하고 잠잤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바울은 많은 시간, 열정, 애정, 관심을 기울여 기도하고 복음을 전하는 데 전력을 투구했습니다. 참으로 알수록 대단한 사람이 바울입니다.
본문도 에베소교회 성도들을 위한 바울의 기도입니다. 14-15절입니다. “[14]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15]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렇다면 바울은 이 기도를 어디서 드리고 있습니까? 에베소서 3장 1절입니다. “이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인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이 말하거니와.” 로마 감옥에 있습니다. 거기서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감옥에서 오직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의 내용을 보십시오. 오늘 우리의 기도 내용은 잘 먹고 잘 살자 라는 쪽으로 가버렸습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기도를 보면, 어느 것 하나 물질적인 게 없고 영적인 것입니다. 에베소교회 성도들의 영적 성숙을 위한 기도입니다.
그 기도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우선 바울은 성령으로 에베소교회 성도들의 속사람이 강건하기를 기도했습니다. 16절 하반절입니다.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그리스도인은 이미 그 안에 다 성령을 모신 자들입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고백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그리스도인 안에 계십니다. 그러나 성령이 내 안에 계신다는 사실이 전부는 아닙니다. 우리는 성령이 내 안에 계신다는 사실에 만족하면 안 되고 더 나아가 내 속사람이 강건해져야 합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 앞에는 속사람이 강건하지 않고는 감당할 수 없는 수많은 시련이 가로놓여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기 전과 후를 비교해 보십시오. 당연히 믿기 전이 훨씬 더 편했습니다. 신앙생활 안 하면 참 편합니다. 주일에 교회 간다고 수선 떨 필요가 없습니다. 주일성수한다고 등산도 낚시도 골프도 다 포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떤 분은 주일을 범하면 꼭 월요일 새벽 기도회에 나와서 벌충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래야 맘이 편해진다고 합니다. 예수 안 믿으면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그 외에도 수요예배, 구역예배다 해서 편히 앉아서 TV 한 번 제대로 볼 겨를이 없습니다. 게다가 각종 헌금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정말 신앙생활은 아무나 억지로 못합니다. 제 정신으로는 안 됩니다. 성령께 사로잡혀야 할 수 있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안 믿을 때는 멀쩡하던 것도 예수를 믿으면 괜히 어긋나고 탈나고 깨집니다. 그렇게 손해를 보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예수를 믿는데도 나는 왜 이리 뭔가 안 되냐고 하소연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당연한 겁니다. 전에는 자기 수하에 있기에 사탄이 가만히 두었지만, 예수 믿은 후로는 사탄이 사사건건 가만 두지 않습니다. 그래서 속사람이 강해져야 하는 게 필수입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속사람이 허약하면 작은 시련이 와도 넘어집니다. 속사람이 강하면 시련이 더 뿌리를 깊이 내리게 합니다. 생각보다 성도들의 신앙체질이 허약합니다. 말도 안 되는 일에 시험에 듭니다. 너무 허무하게 밑바닥까지 추락합니다. 우리가 말씀대로 사는 것은 믿음이 좋아서 입니까? 아니면 그렇게 살기 때문에 믿음이 좋아지는 겁니까? 원한다고 누구나 기도할 수 없고, 말씀대로 살 수 없습니다. 왜냐면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먼저고 삶은 결과요 열매입니다. 믿음은 성령이 우리의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셔야 비로소 주어지는 성령의 은혜입니다. 속사람이 강건해야 거기서 우리의 믿음이 발생합니다. 믿음은 그냥 하늘에서 떨어지는 게 아닙니다. 속사람이 강건하면 강건할수록 그 사람은 믿음이 좋은 사람이고 그런 사람일수록 삶이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지금 감옥 안에서 무릎 꿇고 에베소교회 성도들의 믿음의 성숙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 겁니다.
다음으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에베소교회 성도들의 마음 가운데 계시기를 기도했습니다. 17절 상반절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이미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을 두고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기를 기도합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성령으로 예수를 주라 고백한 사람도 그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시지 않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미 그리스도인인데, 여러분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십니까? 요한계시록 3장 20절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우리는 이 말씀을 흔히 전도용으로 알고 사용합니다. 이것은 원래 안 믿는 사람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 믿는 사람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어지는 요한계시록 3장 22절입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마음의 문을 열고 나를 영접하라는 말씀입니다. 라오디게아 성도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주님을 믿되 아직 그 마음에 주님을 모시지 않은 신자들이 현실적으로 적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어떤 신자들입니까? 요한계시록 3장 15절 이하입니다. “[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이것이 라오디게아 성도들의 극명한 모습입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존재가 내 안에 들어와 있는데 내가 어떻게 미지근할 수 있습니까? 이성을 사랑해도 내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그런데 가장 사랑하는 주님을 내 마음에 모셨는데 어떻게 내가 미지근할 수 있습니까? 따라서 내가 차지도 덥지도 않다는 것은 아직도 주님이 내 안에 계시지 않고 문 밖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미지근한 것은 딱 한 가지입니다. 그 안에 주님이 안 계셔서 그렇습니다. 여러분, 신자의 가장 큰 불행은 도무지 이 세상의 환난과 고통과 슬픔을 이길 힘이 없다는 것입니다. 신앙이 나의 현실에 아무런 영향력을 행하지 못하는 겁니다. 무늬만 신자인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우리가 주님을 모실 수 있습니까? 어떤 분은 문을 열어놨으니 들어오라고만 합니다. 어떤 선교단체에서는 작은 책자를 읽어주고 영접기도를 따라하라고 합니다. 그 기도를 따라한 사람이 아직 들어오신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그냥 들어오신 것으로 믿으라고 합니다. 주님을 모신다는 것은 고도의 인격적 관계입니다. 수학공식 대입하듯 하는 게 아닙니다. ‘주님 내 마음 문을 열었으니 들어오십시오. 들어오신 줄 믿습니다. 아멘.’ 이것은 아닙니다. 주님을 내 안에 모시는 일은 속사람이 강해진 이후입니다. 마음 문 열고 주님 모시고 문 닫고 아멘 하는 게 아닙니다. 기도도 마찬가집니다. 우리가 겪는 기도의 어려움은 응답에 대한 확신이 없다는 데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금식기도를 안 해서 그렇습니까? 철야기도를 안 해서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아직도 주님과 나와의 관계가 애매해서 그렇습니다. 저는 그동안 수없이 기도는 테크닉이 아니라 관계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5장 7절입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주님이 내 안에 계셔야 비로소 원하는 대로 구하는 것이 이루어집니다. 주님이 내 안에 계셔야 내 기도에 메아리가 있고 응답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지기를 기도합니다. 17절 하반절 이하입니다.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19]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교회가 그토록 강조하는 사랑이 마침내 여기에서 등장합니다. 여기가 어느 지점입니까? 성령으로 내 속사람이 강건해져서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셔야 비로소 내가 사랑 가운데 뿌리를 내릴 수 있습니다. 기도와 마찬가지로 사랑도 거저 되는 게 아닙니다. 주님이 내 안에 오셔야 가능합니다. 그 전에는 사랑도 관념이고 추상일 뿐입니다. 주님이 내 안에 계시면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제합니다.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충동질해서 강제하는 사랑이 바로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역동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는데 그게 어떻게 가능합니까? 어떻게 우리가 원수를 사랑하고, 일흔 번씩 일곱 번이나 사랑합니까? 우리는 이런 말씀을 들으면 성경에나 나오는 좋은 말씀쯤으로 치부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이 내 안에 계시면, 주님의 사랑이 나를 압도하고 강제하면, 우리도 그런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찬송가 85장의 가사를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 다 말하랴 주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주님의 사랑을 받아본 사람이 자기도 남을 그렇게 사랑할 수 있습니다. 원래 우리는 죽어 마땅한 사람입니다. 곱게 죽을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곱게 죽여만 줘도 큰 은혜인데, 당신이 죽고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우리는 그런 주님의 사랑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모신 사람은 원수 사랑이 현실적으로 가능합니다. 삶의 현장에서 그런 사랑을 구현할 수 있습니다. 내 안에 주님이 안 계신 자들에게는 그런 사랑이 환상이고 뜬구름 잡는 이야기지만, 주님을 모신 자들에게는 가능한 현실입니다.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은 여수 애양원에서 나환자들과 함께 먹고 자면서 생활했습니다. 심지어는 나환자의 피고름을 입으로 빨았습니다. 그런데도 손목사님은 자신이 나환자가 되지 못한 것을 가장 아쉬워했습니다. 손목사님이 애양원에서 쓴 글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오 주여, 내가 이들을 사랑하되 나의 부모나 형제나 처자보다 더 사랑하게 하십시오. 차라리 내 몸이 저들과 같이 되어 저들을 더 깊이 이해하게 하십시오. 주여, 만약 이들이 나를 싫어 버린다 해도 저는 여전히 이들을 사랑하게 해주십시오.” 이렇게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하는 경지에 이르러야 비로소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속사람의 강건, 주님의 내주, 사랑의 뿌리내림. 이게 바로 믿음의 단계요 성숙의 수순입니다. 이를 위해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에베소교회 성도들을 위해 기도한 겁니다. 이 가을에 여러분의 신앙이 더욱 성숙하기를 빕니다.
원문 자료와 첨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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