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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05n 두려움과 떨림(빌 2:12-18)

20141005n

빌 2:12-18

두려움과 떨림


[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14]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15]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16]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17]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18]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12절 하반절에 나오는 <두려움과 떨림>이라는 말씀이 오늘 주제입니다. 두려움과 떨림은 덴마크의 유명한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어의 책의 표제이기도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면전에서 살아가는 실존의 가장 특징적인 정서가 두려움과 떨림이라고 했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아브라함 얘기가 나오고, 그는 철저히 하나님 말씀에 순종합니다. 키에르케고어가 모델로 제시한 인물이 아브라함입니다. 그는 처음 본토를 떠날 때부터 한 번도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그런 그의 삶의 태도가 바로 두려움과 떨림이라는 겁니다. 바로 그것 때문에 또한 그는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었다는 겁니다.


키에르케고어보다 1세기의 바울이 먼저 이 말을 썼습니다. 두려움과 떨림이 성경이 말씀하는 바람직한 인간상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면전에서 우리가 두려움과 떨림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지당한 말씀인데, 두려움과 떨림으로 너희의 구원을 이루라고 합니다. 이것은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가 아직 구원을 받지 못했다는 이야기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직 구원이 종결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는 순간 완성이 됩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확실하나 아직 우리는 구원의 도상에 있습니다. 그래서 두 개의 시제입니다. 이미 받은 구원과 아직도 아닌 구원입니다. 편의상 말씀을 드리면 우리는 창세 전에 예지예정되었습니다. 십자가의 구속도 이미 받은 구원입니다. 그러나 성화나 영화는 아직 아닙니다. 계속적으로 이루어가야할 것입니다. 영화는 우리가 천국 갔을 때 받는 궁극적인 구원입니다. 구원을 받은 것은 확실한데 그 구원이 종결되거나 완성된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미 지금 얻은 구원과 아직도 아님의 구원이 있다는 겁니다(schon jetzt, aber noch nicht). 바울이 두려움과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것은 아직도 아닌 구원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더욱 정진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두려움과 떨림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무엇을 말씀합니까? 바울의 고백입니다. 빌립보서 3장 12-14절입니다.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이것은 바울의 실존적인 고백입니다. 아직 다 이룬 게 아니라는 겁니다. 위에서 부른 그 상을 위해 지금도 나는 달려가고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실존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반드시 두려움과 떨림이 필요한 겁니다. 하나님의 면전에서 우리의 남은 경주를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해 달려가는 삶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13절입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사람들은 두 말할 것도 없이 자기 기쁨과 뜻의 성취를 위해서 삽니다. 하지만 신앙인은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자기의 뜻과 소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소원을 이루기 위해 정진해야 합니다. 이것이 두려움과 떨림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살고 계십니까? 지난 9개월을 어떻게 사셨습니까? 내 뜻 내 소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소원을 추구하며 살아오셨습니까?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정체성이 날이 갈수록 모호해집니다. 세상 사람과 거의 구분이 안 된다는 얘깁니다. 왜 그리스도인의 고유한 정체성의 위기가 왔을까요? 그리스도인인데도 다 자기의 소원을 이루는 데 연연합니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과 다를 게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과 가치가 구현되려면 하나님의 뜻과 소원이 관철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과 떨림으로 관리하며 사는 것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놓고도 최후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에서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원대로 하시라고 했습니다. 죽음도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소원을 관철하셨습니다. 주님의 소원과 뜻대로 삽시다. 


그렇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소원과 뜻이 무엇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말씀을 봐야 합니다. 자다가 꿈꾸며 계시를 받는 게 아니라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나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소원이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내 소원과 뜻은 가능하면 배제하고 하나님의 소원과 뜻을 위해 결단하고 사는 게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이 사실을 새롭게 깨달읍시다. 


원망하지 말고 시비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두려움과 떨림으로 자기를 관리하며 사는 삶입니다. 14절입니다.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우리는 툭하면 하나님 원망하고 시비합니다. 원망 대신 감사하고 찬양하라는 겁니다. 시비 대신 기도하라고 합니다. 바울이 빌립보 감옥에 갇혔을 때 귀신 들린 사람 귀신 쫓아준 게 다인데, 등짝이 너덜너덜해지도록 맞았습니다. 그때 바울은 찬양했습니다. 그랬더니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지진이 일어나 옥문이 다 열리고, 그들을 죽도록 때리고 가둔 옥사장이 온 가족과 함께 회개를 했고, 그의 개인 집이 빌립보 교회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사는 게 두려움과 떨림으로 사는 것입니다. 


기쁨으로 희생하며 사는 삶입니다. 17-18절입니다. “[17]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18]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여기에 나오는 전제는 제물에 짐승의 생피를 붓거나 피를 상징하는 포도주를 부어 드리는 제사입니다. 전적인 헌신과 희생을 뜻합니다. 자기 피를 주를 위해 몽땅 다 쏟아 붓는 희생을 할지라도 억울해 하기보다는 기뻐하며 기뻐하겠다는 것입니다. 주님도 물과 피를 다 쏟아 바쳤습니다. 순교자들도 자기의 몸의 피를 쏟아 부었습니다. 그들은 고통 중에 감사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무려 감사를 네 번 연속으로 쓰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한 희생조차도 견디기 힘들어 합니다. 기쁨으로 전제를 붓듯이 희생하며 사는 게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헌신예배를 드리는 여전도회 회원 여러분, 바울의 이 간절함, 두려움과 떨림으로 사는 게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마음에 담으십시오. 십자가의 제단에 전제를 붓듯이 여러분도 그러한 헌신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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