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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20141005m 38년 된 병자(요 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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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20141005m</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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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요 5:1-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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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38년 된 병자</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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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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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1]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2]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3]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5]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8]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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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본문은 주님이 예루살렘 성 양문 곁에 있던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38년째 자리에 누운 환자 한 사람을 고친 이야기입니다. 예루살렘 성에는 성문이 8개가 있습니다. 양의 문 곁에 베데스다 연못이 있는데 그 연못가에서 38년 된 환자를 고쳐주신 이야기입니다. 중풍병자였던 것 같습니다. 당시 그 연못가에는 38년 된 병자 외에도 여러 병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따금씩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와 그 연못물을 움직이는데, 가장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어떤 병이든 낫는다는 겁니다. 이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릅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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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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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그런데 어느날 주님이 그 연못가에 나타나십니다. 많은 환자 가운데 가장 오래 된 38년 된 환자를 찾아가서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38년이나 누워있던 환자가 벌떡 일어나 갔다는 겁니다. 여기서 주님이 그를 찾아가신 과정을 보십시오. 마치 사전에 환자와 약속되어 있다는 듯이 거기 많은 환자들이 있었지만 그 사이를 뚫고 거침없이 그에게 다가가셨습니다. 하필이면 주님은 그를 찾아가셨을까요? 그가 가장 오래된 환자여서 그렇습니까? 거기에 누운 수많은 환자 가운데 그가 가장 딱하고 불쌍해 보여서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그 환자는 풍을 맞고 쓰러져 지난 38년 동안 누워 지내면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그를 찾아갔을 때도 그는 여전히 삶의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습니다. 이 또한 불가사이한 일입니다. 가장 조건이 열악했는데 포기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지금 남과 경쟁을 벌여야 합니다. 입수 경쟁을 벌여야 하는데, 경쟁력은 제로입니다. 자기 혼자 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낫고자 하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7절입니다.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자기를 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음을 안타까워하며 여전히 그는 낫고자 합니다. 그 열망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그를 찾아 가셨다기보다는 그 환자가 집요하게 주님을 호출한 겁니다. 생명의 불씨가 꺼져가는데도 절대 포기하지 않습니다. 기도하며 집요하게 주님을 부릅니다. 내가 못 들어가니 주님이 오십시오. 제가 나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콕 찍어 그를 찾아가신 겁니다. 여러분, 믿음의 기싸움은 항상 그렇습니다. 내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면 결국 주님이 내게 져주십니다. 믿음은 결국 주님과의 줄다리기입니다. 내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그간의 아픔을 보상해 주시고, 사태를 급반전해 주십니다. 그러나 내가 포기하거나 체념하면 어떻게 될까요? 그때까지 당한 아픔, 손해, 고통만큼 모든 게 불행으로 끝나버립니다. 환자를 보십시오. 누구도 도와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 환자는 물이 동한다 해도 스스로 움직일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주님을 그 현장으로 오게 했습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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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 paragraph:p0011 -->
<p class="p1">마태복음 15장에 나오는 수로보니게 여인을 기억하시지요. 주님을 따라가며 계속 악을 쓰듯 부르짖습니다. 귀신 들린 내 딸을 구원해 달라고 합니다. 주님은 들은체도 안 하십니다. 제자들이 나서서 그녀의 입을 막습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더 소리를 높입니다. 이윽고 주님이 그 여인을 부르십니다. 불러놓고는 하신다는 말씀이 ‘자녀의 떡을 개에게 주는 게 옿지 않다’고 하십니다. 너 같은 이방인 개에게 줄 떡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심한 말이 어디에 있습니까? 적선할 생각이 없으면 쪽박은 깨지 말아야 하는데 말입니다. 가나안 여인은 그래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옳습니다. 저는 개입니다. 그래도 개도 주인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고 삽니다.’ 그순간 주님이 항복을 선언하십니다. ‘딸아 네가 이겼다. 네 믿음이 크다. 평안히 가라. 네 딸이 나았다’ 그 시로 그 딸이 평안해졌습니다. 만일 가나안 여인이 주님의 모욕적인 언사에 맘이 상해 그냥 가버렸다면, 거기서 다 끝나고 말았을 겁니다. 상처받은 상태, 시험에 든 상태, 피 흘리는 상태로 끝난 겁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으니 결국 주님이 그녀에게 투항합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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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주님은 허투루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지 않습니다. 항상 시험해 보십니다. 우리가 은혜를 감당할 만한 그릇이 되었는지 확인하십니다. 주님이 시험하셔도 우리는 포기하거나 맘 상해하면 안 됩니다. 주님이 모진 말을 해도, 맘이 상해도 포기하면 안 됩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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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aragraph:p0015 -->
<p class="p1">요한복음 2장에 나오는 가나 혼인잔치도 그렇습니다. 주방쪽에서 일하던 마리아가 주님께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합니다. 그 난국을 해결하기엔 오직 주님밖에 없다고 마리아는 확신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반응이 뜻밖입니다. ‘여자여, 이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모욕적이고 냉담한 말입니까? 주님이 이렇게 거부하자 마리아가 무안해서 쥐구멍을 찾습니까? 아닙니다. 처음 가졌던 주님에 대한 신뢰를 끝까지 관철합니다. 하인들에게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든지 그대로 하라’고 합니다. 마리아는 주님에 대한 기대를 접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결국 주님은 여기서도 마리아에게 항복하십니다. 돌항아리 여섯에 가득채운 맹물을 양질의 포도주로 바꾸십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마시던 포도주와는 비교할 수 없는 훌륭한 포도주가 되었습니다. 이 기적도 그렇습니다. 주님은 전혀 기적을 베풀 마음이 없었는데, 모친 마리아가 후퇴하지 않자 결국 본의 아니게 기적을 베푸신 것처럼 되어 있습니다. 이게 주님이 공생애 첫 기적입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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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주님이 아무리 모욕적으로 거절하고 냉담하게 거절해도 우리가 물러서지 않으면 결국 주님이 우리에게 양보하십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져주십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에게 져주십니까? 자식 이길 부모가 없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원리입니다. 야곱을 보십시오. 얍복나루터에서 밤새도록 하나님을 붙잡고 씨름합니다. 동이 터오는데도 절대 놓지 않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야곱의 환도뼈를 칩니다. 성경은 이때 환도뼈를 쳐서 그의 고관절이 나갔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야곱을 보십시오. 포기하지 않습니다. 절대 당신을 놓치 않겠다. 저를 축복해 주셔야 보내드리겠다고 합니다. 그때 하나님이 내가 졌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의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야곱의 새 이름으로 주십니다. 그 이름이 하도 좋아 유대인은 지금도 국호로 씁니다. 설마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시겠습니까?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지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아버지가 이기지 않고 자식인 우리가 이깁니다. 하나님은 항상 그렇게 하십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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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바친 이야기입니다. 이 사건 만큼 황당하고 말이 안 되는 얘기는 다시 없을 겁니다. 하나님이 아비 아브라함에게 네 자식을 잡아 번제로 바치라고 하십니다. 엽기적인 일입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아브라함의 태도입니다. 아무런 항의도 없이, 일말의 저항도 없이, 자기 심장보다 1000배 소중한 독자 이삭을 정말 잡겠다며 목에 칼을 들이댑니다. 이것은 저의 개인적인 이야기입니다만, 저는 성경을 보며 가장 난해했던 본문이 바로 이 사건입니다. 저는 둘 중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아브라함이 불가항력적인 힘 앞에서 모든 것을 체념하고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자기 아들을 잡으려 했거나, 아니면 너무 큰 충격에 실성해서 정신 나간 상태에서 자기 아들을 잡으려 했거나 둘 중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신약 히브리서 11장을 보다가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때 실성한 것도 체념한 것도 아니고 도리어 희망과 확신을 가지고 자기 아들을 잡으려 했습니다. 무슨 희망입니까? 무슨 확신입니까? 히브리서 11장은 이렇게 해석합니다.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도 능히 자기 아들을 살려주신다는 희망입니다. 체념하고 절망하며 자기 아들을 잡는 줄 알았는데, 아브라함은 절대 포기하거나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믿음과 희망에 자기의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내가 죽여도 하나님이 다시 살려주신다는 기대에 차서 이삭의 목을 따려고 한 겁니다. 우리는 죽으면 모든 게 끝난다고 생각합니다. 아브라함의 위대함은 아니다! 죽어도 다시 살리신다고 생각한 겁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다급해졌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네 아들 이삭의 목에 칼을 대지 말라.’ 죽어도 산다는 데는 하나님도 대책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지셨다고 했습니다. 너야말로 믿음의 조상이 되어 마땅하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우뚝 세우십니다. 온갖 복을 다 약속하십니다. 하늘의 별만큼, 바다의 모래만큼 네 자손을 주겠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다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하나님이 복주신 그대로 성취된 겁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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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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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아브라함을 생각하시고 포기하지 마십시오. 38년 된 환자를 생각하시며 체념하지 마십시오. 마리아를 생각하시며 끝까지 주님에 대한 기대와 여러분의 소원을 관철하십시오. 야곱처럼 고관절이 나가도 절대 물러서지 마십시오. 수로보니게 여인을 보며 ‘옳습니다. 개도 주인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습니다’고 하십시오. 그러면 주님이 지십니다. 벌떡 일어나 침구를 들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의 모든 사정과 형편, 위기, 시험이 한순간에 극적으로 반전되고 평정되고 치유되고 회복되는 은혜가 있기를 기원합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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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br></p>
<!-- paragraph:p0023 -->
<p class="p1"><b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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