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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28m 그러나(엡 2:1-10)

20140928m

엡 2:1-10

그러나


[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4]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4절입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원문에는 4절 앞에 <그러나>라는 접속사가 있습니다. 접속사 <그러나>는 자신을 중심으로 앞뒤 말이 대비를 이루게 합니다. 1-3절의 내용은 무시무시합니다. 너희가 불순종의 아들이었고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다고 합니다. 4절부터는 내용이 반전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를 살리셨고, 하늘에 앉히셨다고 합니다. <그러나>라는 품사 하나로 내용을 뒤집습니다. 놀라운 구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제가 성경에서 얻은 가르침 가운데 이것만큼은 목숨과도 바꿔도 좋다는 게 바로 구원론입니다. 물론 이것을 우리는 다 압니다. 하지만 어떤 이는 건성으로 듣고, 어떤 이는 뼈에 사무치도록 새겨듣고 늘 감사하며 삽니다. 


17년 전의 얘깁니다. 제가 교회를 막 시작할 때입니다. 어느 분이 교통사고로 영동세브란스로 입원했습니다. 처음엔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아 포기했는데, 가족들이 뇌수술을 받게 해서 혼수상태에 있다가 1주일 만에 정신이 돌아왔습니다. 환자를 심방가면 목사가 더 많이 얘기를 하는데, 그날은 제가 1시간이 넘도록 그분의 간증과 설교를 들어야 했습니다. 내용은 자기가 혼수상태에 빠져있을 때 주님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하도 길게 간증해서 제가 말을 끊고 성경 한 구절을 읽었습니다. 이사야 44장 21-22절입니다. “[21] 야곱아 이스라엘아 이 일을 기억하라 너는 내 종이니라 내가 너를 지었으니 너는 내 종이니라 이스라엘아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아니하리라 [22]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 같이, 네 죄를 안개 같이 없이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 그분이 이 말씀을 듣고 정색하며 “목사님 성경에 이런 말씀도 있었습니까? 제게 읽어주신 말씀이 성경 어디에 있습니까?” 당시에 그분은 모태신앙에 안수집사였으면서도 그게 성경 말씀이었는지를 몰랐습니다. 


우리는 뭘 모르고 신앙생활을 합니다. 주님 당시에도 그랬습니다. 어떤 사람이 불쑥 선생님 당신이 어디로 가시든지 제가 좇겠다고 하니까, 주님은 인자는 머리 하나 둘 곳도 없다고 했습니다. 이미 그때도 구원의 참 뜻과 하나님의 선물에 대한 바른 이해 없이 저 사람만 따라 다니면 최소한 굶지는 않겠구나, 병이 나도 안수 한 번 받으면 되겠구나 하면서 맹목적으로 따라다니던 사람이 많았다는 겁니다. 여우도 새도 제 집이 있지만, 나는 사글세방 하나도 없다고 하신 겁니다. 그의 속셈을 주님이 꿰뚫어 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이 무엇이고, 주님이 우리에게 베풀고자 하는 은혜가 무엇인지를 바르게 아는 일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러면 <그러나>를 중심으로 이전의 상태를 보겠습니다. 

우리는 본질상 다 진노의 자녀요, 불순종의 아들들로 태어났다고 합니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라다니며 살았다고 합니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는 마귀입니다. 많은 분이 인간은 중립지대에 태어나 예수 믿어 적당히 살면 천국 가고, 죄 지으면 지옥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처음부터 진노의 자식이요 불순종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김씨면 아들도 딸도 선택의 여지없이 김씨로 태어납니다. 저는 본이 함안이고, 조가입니다. 저의 시조는 고려초 대장군 조정입니다. 이분은 원래 당나라 사람입니다. 그런데 고려초에 동생을 데리고 고려로 망명해 귀화한 사람입니다. 그 후에 장군으로 왕건을 도와 고창성에서 견훤을 대파합니다. 고려통일의 큰 공을 세워 개국공신이 됩니다. 벼슬명으로 말하면 무관 종3품에 속하는 충장군이었습니다. 그분의 68대손이기에 저는 선택의 여지없이 조가입니다. 조상이 왕이면 그 자손이 아무리 못나도 왕족입니다. 잘 나서 왕족이 되는 게 아닙니다. 자기가 선택하는 게 아닙니다. 아담이 타락해서 죄인이 되자 그 후손이 모조리 다 진노의 자식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처음부터 죄씨로 태어났습니다. 이게 소위 원조입니다. 내 손으로 죄를 짓지 않아도 죄인입니다. 죄인으로 태어났기에 불가항력적으로 죄를 짓습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운명적으로 원죄를 품고 태어납니다. 불나비는 몸이 타는 데도 불만 보면 뛰어듭니다. 근육이 밝은 쪽으로 수축되어서 그렇습니다. 우리가 다 그랬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그러나> 이전이었고, 그 이후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를 살리셨고, 그와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고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구원의 시제입니다. 다 과거입니다. 즉 내가 알기도 전에, 내가 믿기도 전에 나를 하늘에 내 자리를 마련하셨다는 것입니다. 구원과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 혼란스러운 대목이 바로 여기입니다. 아무리 진노의 자식으로 태어나 세상 풍속을 좇고 불순종의 아들로 살아왔을지라도 예수만 믿으면 구원하겠다는 게 아니라, 아무 조건 없이 일방적으로 우리를 살리셔서 하늘에 앉히셨다고 합니다. 우리는 다 하늘에 아파트 한 채씩 있습니다. 바로 그 얘깁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질문합니다. ‘내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일단 구원부터 해놓고 보셨다는 얘긴가?’ 이것은 어리석은 질문입니다. 믿으면 구원, 안 믿으면 버리겠다는 게 아니라 무조건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구원한 정도가 아니라, 이미 하늘에 앉히셨다고 합니다. 우리의 지위, 신분, 소속, 위상을 가리킵니다. 확실한 하늘의 아파트를 가진 천국시민이 되게 했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이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5절 하반절입니다.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8절에서는 이것을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믿음과는 상관없이 구원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정작 구원과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바로 나인데, 나와는 상관없이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나를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나의 구원을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내 이름으로 천국에 있는 아파트를 등기까지 마쳤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하나님이 나의 동의도 없이 홀로 내 구원을 이루셨을까요? 1절을 보십시오. 우리는 죄와 허물로 다 죽은 자들이었습니다. 죽은 자들이 어떻게 기도하고 회개합니까? 그래서 무조건 살려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칼빈신학의 중요한 주제입니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주권적으로, 불가항력적으로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날마다 구원이 먼저입니다. 구원받았기에 우리가 믿게 된 것입니다. 죽은 우리를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살려주셨기에 우리가 감사하게 되는 겁니다. 믿음은 구원의 열매입니다. 믿음을 통해 우리의 구원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믿고 있다는 사실은 내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이라는 뜻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허투루 들으면 안 됩니다. 이것은 문학적 수사가 아닙니다. 


6절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물론 공간적이거나 지리적 의미는 아닙니다. 우리의 신분, 지위는 땅이 아니라 하늘에 등록되어 있습니다. 비록 땅에 있지만 우리는 천국 백성입니다. 우리의 지위와 정체는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하나님 보좌 우편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의 족보에서 그리스도의 족보에 양자로 입적한 겁니다. 이제는 근본이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과 궁합이 맞지 않습니다. 소속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비록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도 말입니다. 더 냉정하게 말하면 이 세상은 다 우리의 적지입니다. 어디에도 내 편이 없습니다. 다 나를 해치려하고, 나를 등치려 하고, 음해하려고 합니다. 정서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 세상 소속이고, 이게 전부이기에 악착같고 필사적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런 재주가 없습니다. 우리가 자주 한탄하는 게, 나는 왜 이렇게 바보 같을까? 그때 아파트 몇 채라도 제대로 사두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여러분, 이 땅에는 우리의 분깃이 없습니다. 우리는 여행비자로 이땅에 잠시 살고 있는 나그네입니다. 우리는 여기로 이민 오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국적은 천국이고,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외국에 10년을 넘게 살아도 언젠가는 모국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에 최소한으로 삽니다. 살림살이가 간단합니다. 그래도 그러한 구차한 생활을 비관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거기는 공부하는 동안만 시한부로 사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집니다. 우리의 본향은 이 땅이 아닙니다. 여기가 아니라 천국이 우리가 영원히 뿌리를 내리고 살 모국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좀 구차해도 괜찮습니다. 천국이 우리의 희망이요 소망입니다. 


본문이 제시한 마지막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왜 이렇게 아무런 전제나 조건 없이 과거시제로 다 구원해주셨을까 하는 겁니다. 여러 가지 답이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이다. 다 맞는 말입니다만, 오늘 본문의 정답은 이것입니다. 7절입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이것이 우리가 깨달아야 할 중요한 임무요 사명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당신의 자비를 널리 나타내고자 하십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저 사람이 뭔가 있기는 있나 보다 라고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 사람의 가정을 봐라. 이래도 하나님이 은혜로운 분이 아니라는 말이냐 라고 해야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 나라의 대사로, 홍보대사로, 전도사로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왜 갈수록 힘을 잃고, 또 욕을 먹습니까? 우리는 이제 아무도 자신의 삶으로 하나님의 풍성함을 나타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태가 어디까지 왔냐면, 이제는 우리가 신자임을 밝히지 않는 게 주님의 영광을 덜 욕되게 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의 선물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깨달읍시다. 왜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구원의 선물을 주셨는지를 깨달읍시다. 그래서 우리의 온 몸과 전 생애로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며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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