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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21m 기도 쉬는 죄(삼상 12:22-25)

20140921m

삼상 12:22-25

기도 쉬는 죄


[22] 여호와께서는 너희를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것을 기뻐하셨으므로 여호와께서는 그의 크신 이름을 위해서라도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요 [23]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길을 너희에게 가르칠 것인즉 [24] 너희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신 그 큰 일을 생각하여 오직 그를 경외하며 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진실히 섬기라 [25] 만일 너희가 여전히 악을 행하면 너희와 너희 왕이 다 멸망하리라


신구약 성경에는 다양한 죄명들이 나옵니다. 신약 로마서 1장에 죄목록을 보면 불의, 추악, 탐욕,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 비방, 능욕, 교만, 부모거역, 우매, 무정, 무자비 등입니다. 심지어 거기에 보면 호모섹스도 나옵니다. 게이나 레즈비언, 변태, 수간, 근친상간도 나옵니다. 주님은 지적하시기를,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이미 살인죄를 범한 자라고 하셨습니다. 마음에 음욕을 품으면 이미 마음으로 간음한 자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에는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받지 못한다는 성령훼방죄도 나옵니다. 히브리서 10장을 보면, 다시는 속죄가 없다는 짐짓 죄도 나옵니다. 


오늘 본문에는 의외의 죄목이 나오는데, 기도하기를 쉬는 죄입니다. 이것은 구약 사무엘 선지자의 고백입니다. 기도를 안 하는 것도 큰 죄라는 겁니다. 구약의 인물 가운데 엘리야도 전설 같은 기도의 선진입니다. 사무엘도 그렇습니다. 사무엘은 한나의 아들입니다. 한나는 원래 자식 못 낳는 여인이었는데 서원기도해서 낳은 아들이 사무엘입니다. 기도의 여인의 아들답게 사무엘도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모친의 서원대로 사무엘은 젖을 떼자마자 하나님께 바쳐졌습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성전에서 자랐습니다. 지난 70년대까지만 해도 차 앞에는 <오늘도 무사히>라는 작은 액자가 있었습니다. 그 그림이 바로 사무엘이 기도하는 모습입니다. 죠수아 레이놀드라는 영국화가가 그린 성화입니다. 흰 잠옷을 입고 두 손을 모으고 하늘을 우러러 보고 있는 사무엘의 모습입니다. 사무엘이 어릴 때 성전에서 잠을 자는데 누가 사무엘을 불렀습니다. 자기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 일어나 엘리 제사장에게 뛰어갑니다. 엘리는 나는 너 부른 적 없다고 합니다. 다시 자려고 누웠는데 또 불러서 엘리 제사장에게 달려갑니다. 엘리 제사장이 하나님이 부르신다는 걸 알고, 다시 부르거든 무릎을 꿇고 하나님 말씀하십시오 제가 듣겠다고 하라고 알려줍니다. 사무엘이 다시 제 방으로 왔더니 하나님이 불러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 말씀하십시오 하는 그림이 바로 그 액자의 그림이었습니다. 


기도의 선지자인 사무엘이 기도를 쉬는 것은 죄라고 합니다. 기도를 안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쉬는 것도 죄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백성 앞에서 선서하기를 결단코 너희를 위해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하나님도 너희를 당신의 자녀로 택하신 이상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좌절하지 말라고 합니다. 사무엘 선지자의 이 발언, 다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기도를 쉬는 행위는 죄라고 했는데, 왜 그게 살인이나 강도나 절도나 간음 같은 죄가 될까요? 기도는 하면 좋고, 안 해도 그만인 신앙생활의 액세서리가 아니라 필수이며 주님의 준엄한 명령이기에 그렇습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주님의 외마디 명령입니다. 이 명령에는 약속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구하면 반드시 줄 것이고, 찾으면 만나게 할 것이고, 두드리면 열리게 할 것이라는 약속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약속이 전제된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기도를 쉬는 것은 간음이나 절도죄와 다를 바 없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좀처럼 기도하지 않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는데도 왜 기도를 안 할까요? 왜 이것저것 다 해보다가 밑져봐야 본전이란 심정으로 기도를 선택할까요? 다 기도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구걸행위가 아닙니다. 떳떳하고 당당한 자격이라고 했습니다.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자식 된 자들의 신성한 권리입니다. 기도는 하나님 자녀가 누리는 고유한 특권입니다. 기도는 방법이 아니라 관계이고, 신분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방법으로 생각합니다. 내 소원을 이루기 위한 수단, 방법, 비법으로 생각합니다. 아버지에게 구걸하는 자식이 있습니까? 어떤 분은 죄송해서 하나님께 부탁 못하겠다며 기도하지 않습니다. 어떤 분은 나까지 하나님을 괴롭게 할 수 없다며 기도하지 않습니다. 다 틀렸습니다. 유치한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기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 관계입니다. 아버지의 자식이라는 자격입니다. 기도는 아버지의 자식으로서 하는 겁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기도해서 뭘 따내려고 합니다. 그래서 기술이나 요령 쪽으로 갑니다. 기도에는 왕도가 없습니다. 기도는 아마추어같이 할수록 그게 값지고 옳습니다. 어린아이가 엄마아빠에게 조르듯 하셔야 합니다. 기도에 어떤 틀이 생기면 형식화되고, 양식에 갇히면 진부해집니다. 쉬어빠진 목소리로 약장수처럼 바람소리를 내며 기도하지 않아도 됩니다. 기도를 부탁하면 못한다고 할 때가 있는데, 고상한 기도를 하려고 해서 그렇습니다. 


제가 독일에서 막 돌아와서 주말에 강원도 홍천군 서면 모곡이라는 곳에서 2년간 작은 교회를 도운 적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이미 칠순이 넘은 집사님이 계셨는데, 주일 저녁예배 때 특송을 가끔 합니다. 저는 아직도 그분을 못 잊습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감동적인 찬양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물론 박자도 음정도 맞지 않습니다. 완전히 창이나 육자배기 가락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특송만 하면 하여간 희한한 일이 벌어집니다. 그 예배에 참석한 사람이 다 웁니다. 하염없이 웁니다. 그분의 찬양은 정말 심금을 울립니다. 


기도도 마찬가집니다. 기도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고상하게 할 필요 없습니다. 기도할 때 시를 쓸 필요 없습니다. 철부지 자식이 부모에게 무슨 격식을 따집니까? 누가복음 11장에 나오는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밤에 찾아온 손님 때문에 친구 집에 떡을 구하러 갑니다. 친구는 이미 잠자리에 들었노라며 버팁니다. 문을 두드려도 안 되니까 온갖 협박을 다 해서 결국 잠자리에 든 친구가 항복을 합니다. 이 비유는 무엇을 말씀합니까? 관계가 중요하다는 겁니다. 내 집에 손님이 왔다고 아무 집에나 가서 밤늦게 난리를 치면 누구나 일어나서 떡을 줍니까? 아닙니다. 그러나 누가복음 11장에서는 그 사람이 친구이기에 가능했습니다. 따라서 기도란 집요하게 문을 두드리기 이전에 친구지간, 죽마고우라는 그 관계가 중요하다는 겁니다. 아무에게나 강청한다고 떡을 내주는 게 아닙니다. 친구지간일 때만, 부자지간일 때만 가능합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억울한 과부와 불의한 재판관 비유입니다. 억울한 일을 당한 과부가 재판관을 끊임없이 찾아갑니다. 얼핏보면 이 비유도 방법을 말씀하는 것 같습니다. 과부처럼 집요하게 재판관을 찾아가면 아무리 악한 재판관이라도 그 소원을 들어준다는 식으로 보입니다. 아닙니다. 관계입니다. 집요함으로 승리한 게 아니라 끝까지 관계에 호소한 겁니다. 나는 억울한 시민이고, 당신을 나를 판단해 줘야 할 재판관이라는 겁니다. 마태복음은 이방인처럼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합니다. 말 많이 안 해도 된다고 합니다. 부모는 자식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다 알고 있습니다. 자식보다 더 잘 압니다. 따라서 무엇을 구할까, 어떻게 구할까는 결코 중요한 게 아닙니다. 기도에는 요령이 없습니다. 마태복음 6장 32절도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기도를 안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러면 안 됩니다. 햇빛이나 공기, 물이 없으면 누구나 살 수 없기에 하나님이 은혜로 거저주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구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안 했는데도 일이 잘 되면 하나님이 해주신 것인지, 조상 덕인지, 부적 때문인지, 운인지 잘 모릅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에게도 안 하는 사람에게도 비를 내리십니다. 그러나 기도해서 비를 받은 사람은 그 비가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기도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비가 기상현상일 뿐입니다. 그래서 기도하지 않고 비를 받은 사람은 감사하지 않지만 기도해서 비를 받은 사람은 감사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찾고 두드려 기도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한 다음에 응답하십니다. 그래서 기도 안 하면 안 한 사람만 손해입니다. 기도하면 그만큼 복됩니다. 


기도하시면 뭐든 다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이 다 응답해 주십니다는 말이 맞습니까? 기도하는데도 불구하고 다 응답 받지 못하는 게 현실입니다. 내가 구하는 게 내게 이롭지 못하면 응답되지 않습니다. 나를 해칠 흉기는 내가 아무리 구해도 절대 안 주십니다. 어린아이가 칼을 달라고 졸라도 부모는 절대 칼을 안 주십니다. 야고보서 4장 2절 이하입니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3]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이런 경우는 응답하지 않는 게 오히려 복입니다. 우리는 분별이 없습니다. 이게 꼭 내게 필요한 것인지, 유익한 것인지 잘 모릅니다. 하나님이 판단하십니다. 아무리 기도해서 하나님이 안 들어주시면 심각하게 기도제목 자체를 살펴봐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가 잘못 구하면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응답 안 하셔도 감사하셔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응답되지 않는 기도는 없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하나님은 응답하십니다. 


우리는 누이 좋고 매부 좋다는 식으로 하나님 영광을 갖다 붙여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저의를 꿰뚫어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라고 판단하시면, 어떤 미사여구를 붙여도 안 들어 주십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사람은 많아도 응답받는 사람은 적습니다. 우리는 돈, 명예를 구합니다. 우리는 자나 깨나 이것만 구합니다. 다 정욕에 쓰려고 구합니다. 건강하고 돈 있는 사람이 그 건강과 돈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데 쓰는 것 보셨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건강주고 돈 주고 시간 주시면, 당장에 달아날 분이 많을 것입니다. 그래서 구한다고 하나님은 다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정말 기도의 응답을 받고 싶으시다면, 그대로 응답해 주셔도 절대 변심하지 않겠다, 기도 쉬는 죄 범하지 않겠다는 것을 확실히 하셔야 합니다. 사실 우리 편에서도 할 말이 없습니다. 주님을 한두 번 속였어야지요. 우리가 급하면 온갖 서원을 남발하고 그 순간을 지나면 까마득히 잊어버렸습니다. 결코 변절하지 않고 끝까지 주님 뜻대로 살겠노라 맹세하고 다짐하셔야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십니다. 올해는 기도하시되 그 자격과 신분, 권리와 특권으로 부모자식지간이라는 하나님과의 관계로 밀고 나가십시오. 비굴하게도 죄송스럽게도 생각하지 마시고, 자신 없어 하지 마시고, 좀 더 당당히 떳떳하게 구하십시오. 밤에 친구 집을 찾아가 떡을 강청했던 것처럼 기도하십시오. 올해는 기도 쉬는 죄를 범하지 마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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