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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실존

신구약 성경을 통틀어 자기 이해에 가장 투철했던 사람은 역시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바울은 우선 두 가지 관점에서 자기를 봅니다. 하나는 과거 속의 자신이요, 또 다른 하나는 미래 속의 자신의 모습입니다. 과거로 말하면 그에게는 참 내세울 것이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화려한 자신의 그 과거지사를 다 내버린다고 했고, 심지어는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고까지 했습니다. 노자는 공을 이루었으면 그 자리에 머물지 않는다고 했는데, 사실 노자의 그 말은 자기가 세운 공에 머물지 않을 때만 거기에 더 오래 머물 수 있다는 역설의 지혜에 다름 아닙니다. 이에 반해 바울은 과거 혹은 뒤엣 것으로부터의 철저한 탈출을 말합니다. 그것은 노자처럼 과거로 되돌아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래를 향해 달리기 위해섭니다. 그의 표현대로 하면 <앞엣 것을 잡기 위해> 뒤엣 것을 버린다는 것입니다. 


일찍이 바울은 많이 가진 것을 자랑하므로써 삶의 보람을 느꼈을 뿐 아니라 또 그 모든 것들이 자기 삶의 든든한 보장이라고 믿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느 한 순간 그 모든 것, 즉 뼈대있는 가문, 바리새파에 속한 귀족, 석학 가말리엘의 문하생이라는 학벌 등이 실은 참된 자기와는 전혀 별개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그런 것들과의 단호한 결별을 선언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존재란 소유 이전의 문제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가진 것이 마치 자기 삶의 보장이나 되는 듯 착각하며 거기에 안주해 있는 동안 한 번도 자기 존재를 묻지 않음으로써 자신을 상실해 온 것입니다. 이를테면 가진 것에 도취해 참된 자기를 아득히 잊고 산 것입니다. 사람은 본디 자기의 존재에 대해 부단히 물음으로써 현존합니다. 자명하다고 생각해 온 것을 새삼 물을 때 오히려 더 비참해 질 수도 있는 게 사실입니다. 왜 살아야 하는가? 어디로 가는가? 참된 삶이란 무엇인가? 결국 죽음에로의 존재가 아닌가? 이렇게 계속 묻는 데서 불안이 오고, 고뇌가 따르고, 또 절망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물을 때만 고민없이 살아가는 짐승과는 구별된 인간으로서 존재하게 되며 자연의 법칙 아래 살고, 전체 속에 살면서도 그것에 예속되거나 매몰되지 않고 보다 책임적인 <나>로 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과거를 그렇게 내버린 대신 참된 자기를 찾았다는 겁니까? 아닙니다. 아직 얻은 현실, 발견된 현실이 아닙니다. 그는 분명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빌 3:12)고 했습니다. 이렇게 보면 바울이 이해한 현존이란 단지 뒤엣 것을 버리고 앞엣 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는 도상에 있을 뿐 아직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가난한 존재일 뿐입니다. 바울은 자기의 이런 현존을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달려간다>(빌 3:13-14)고 표현했습니다. 


현존은 그 자체에 아무런 보장이 없습니다. 따라서 가난하고 늘 불안합니다. 그러나 <가진 것으로 사느냐?> 또는 <나로서 사느냐?>의 갈림길에서 언제나 <나로 살겠다>고 결단함으로써 잃었던 자기를 되찾은 자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앞엣 것을 잡기 위해 도전한다는 것은 곧 씨를 뿌리지 않으면 거둘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입니다. 익숙한 것을 떠나겠다는 다짐이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겠다는 약속입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겠다는 결단이요 오늘 해야 할 일들을 다음으로 미루지 않겠다는 의지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이해한 실존이요 우리 모두가 붙잡아야 할 성서적 인간상의 참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