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중 된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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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역설의 집대성입니다.
성경을 경전으로 하는 기독교도 지독한 역설의 종교입니다. 로마제국을 죽음의 공포로 유지하게 한 십자가 형틀이 기독교에서는 오히려 구원의 영원한 상징이 되고 있다는 사실만 해도 역설 중의 역설 아닙니까? 그래서 성경의 논법은 현실을 지탱하는 사고방식과 끊임없이 충돌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의 현실을 인정하고 합리화해 주기보다는 언제나 신랄하게 고발하고 비판하는 까닭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의 이런 역설 앞에서 이제껏 자신이 확실하다고 믿고 디디고 섰던 땅이 일순간 꺼지는 듯한 충격적인 경험을 해야 하고, 회개란 것도 성경이 선언하고 있는 이 역설을 통해 자신을 지배해 온 지난 시간들의 허구를 깨닫는 일에 다름 아님을 깊이 체험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20장에 나오는 어느 포도원 주인의 비상식적인 얘기는 베드로가 주님께 던진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주어진 비유입니다.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마 19:27). 이에 대해 주님은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마 19:30)며 어느 포도원 주인 얘기를 시작하셨는데, 주님이 여기서 <먼저 된 자와 나중 된 자>를 언급하신 것은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이 주님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내버린 결단을 새삼 무엇인가를 누리기 위한 <기득권>으로 내세우려는 저의를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너희가 남보다 먼저 모든 것을 버렸다고 으스대느냐? 그렇다면 너희야말로 오히려 나중 되리라!>는 힐난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게 바로 그 다음에 이어지는 포도원 주인 얘기를 이해하는 올바른 열쇠가 된다는 것입니다.
어느 포도원 주인이 일꾼들을 구하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인력시장에 나갑니다. 그러기를 여러 차례, 심지어는 하루 일과가 끝나기 한 시간 전인 오후 5시에도 나가 일꾼을 고용합니다. 그런데 주인의 비상식적인 처사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일이 다 끝나고 일꾼들에게 일당을 지불할 때도 맨 나중에 온 자들부터 불러 채 한 시간도 일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종일 일한 자들의 삯을 지불합니다. 이를 지켜본 먼저 온 자들이 내심 큰 기대를 가지고 자신들의 차례를 기다리지만 곧 무참하게 됩니다. 그것은 곧 상식이나 현실의 논리가 전혀 힘을 쓰지 못하는 영역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먼저 온 자>나 <나중 온 자> 모두가 경험하게 된 역설의 순간이자 인간이 세운 차별적인 기득권의 질서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무너지고 누구에게나 똑같이 보장되어야 할 소중한 <삶의 권리>가 선포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오후 늦은 시간까지 품꾼을 구하러 다닌 포도원 주인의 속 깊은 뜻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기득권이 버티고 있는 세상 질서로부터 소외된 자들을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었습니다. 또 노동시간과는 관계없이 그들에게도 가족들과 함께 하루를 먹고 살아야 한다는 절박한 현실이 있다는 사실도 인정해 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 속에 숨겨진 주님의 역설은 이미 가질 것을 다 가진 강한 자가 아니라 이런 저런 이유로 가장 기초적인 인권마저도 보장받지 못하고 있는 최악의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것임이 드러나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사랑이란 <먼저>라는 이기적인 기득권의 벽을 넘어 <모두가 더불어 향유해야 할 삶의 권리>에 관심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그것은 늘상 그릇된 현실을 역전시키는 파라독스의 모습을 지녔습니다. 지금 자신을 <나중 된 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일지라도 결코 낙심하지 말 일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그런 사람들을 고용하시기 위해 부지런히 시장통에 나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먼저>를 앞세우고, <먼저 된 자>만을 대우하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필히 <나중 된 자>를 찾으시는 주님의 이 역설적인 사랑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그게 바로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어 가는 힘일 뿐 아니라 우리의 다음 세대들이 품꾼으로 쓰는 자가 없어 낙오하거나 거리를 서성대지 않아도 되는 비결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