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824m 미가의 신앙(삿 17: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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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24m
삿 17:5-13
미가의 신앙
[5] 그 사람 미가에게 신당이 있으므로 그가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고 한 아들을 세워 그의 제사장으로 삼았더라 [6]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7] 유다 가족에 속한 유다 베들레헴에 한 청년이 있었으니 그는 레위인으로서 거기서 거류하였더라 [8] 그 사람이 거주할 곳을 찾고자 하여 그 성읍 유다 베들레헴을 떠나 가다가 에브라임 산지로 가서 미가의 집에 이르매 [9] 미가가 그에게 묻되 너는 어디서부터 오느냐 하니 그가 이르되 나는 유다 베들레헴의 레위인으로서 거류할 곳을 찾으러 가노라 하는지라 [10] 미가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와 함께 거주하며 나를 위하여 아버지와 제사장이 되라 내가 해마다 은 열과 의복 한 벌과 먹을 것을 주리라 하므로 그 레위인이 들어갔더라 [11] 그 레위인이 그 사람과 함께 거주하기를 만족하게 생각했으니 이는 그 청년이 미가의 아들 중 하나 같이 됨이라 [12] 미가가 그 레위인을 거룩하게 구별하매 그 청년이 미가의 제사장이 되어 그 집에 있었더라 [13] 이에 미가가 이르되 레위인이 내 제사장이 되었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내게 복 주실 줄을 아노라 하니라
우리는 다 주님을 믿습니다. 그런데 믿음이라 해서 다 같지는 않습니다. 가톨릭과 개신교가 좀 다릅니다. 한국 기독교라고 하면 가톨릭과 개신교가 다 포함됩니다. 그러나 그 속을 들여다보면, 한 하나님, 한 주님, 한 성령을 믿는데도 다릅니다. 여기서 끝나지 않고 어떤 이는 자기 신앙의 체계를 남에게 강요하기도 합니다. 자기 신앙의 잣대로 남을 판단합니다. 오늘은 우리에게 도움이 안 되고, 우리가 피해야 할 신앙의 행태는 어떤 게 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여러분도 각자의 신앙을 오늘 말씀에 비추어 보십시오. 바람직한 신앙의 모습인가, 아니면 경계하고 피해야 할 신앙의 모습인지를 성찰해 보십시오.
먼저 실용주의, 편의주의입니다. 본문의 말씀은 사사시대 때의 말씀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3,300년 전 시대입니다. 미가라는 사람이 에브라임에 살았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 집 마당에 신당을 세웠습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교회 건축을 한 겁니다. 이게 옳은 일인지, 하나님 뜻에 합당한 일인지를 고민하거나 기도해 보지 않고 자기 집 마당에 신당을 세우고, 자기 아들 중 하나를 제사장으로 만들었습니다. 사사기 18장 31절을 보면 이때는 실로에 성전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가서 예배를 드려야 마땅함에도 미가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실로는 미가가 사는 에브라임에서 먼 곳도 아니었습니다. 얼마나 편리합니까? 이때는 미가뿐 아니라 사람들이 다 그런 식으로 살았다고 합니다. 본문 6절을 보면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제 편리한대로 신앙생활을 했다는 겁니다. 신앙생활은 어디까지나 하나님 말씀 중심이어야 합니다. 하나님 중심주의여야 합니다. 내 뜻이 아닙니다. 그런데 미가를 비롯해 그 시대의 사람들은 자기 소견대로 했다고 합니다. 신앙생활을 자기 입맛대로 하면 안 됩니다. 요즘은 더 합니다. 요즘도 편의주의, 실용주의가 가장 큰 문제입니다. 갈수록 더 심하고 철저해지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절대 양보나 희생, 불편을 감수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요즘은 십자가, 고난 같은 말이 교회 안에서도 공허해졌습니다. 이제는 오직 자기의 편의나 자기 필요에 따라 신앙생활을 하기에 그 어떤 불편, 희생도 용납하지 못합니다. 교회가 멀어도 불편해서 싫고, 교회가 작아도 구차해서 싫습니다. 요즘 교회 선택의 절대 기준은 오직 실용, 편의입니다. 누가 말씀을 성실히 준비하고, 교파가 어떠냐는 것은 따지지 않고, 어느 교회가 실용과 편의주의의 요건을 충족하는지가 교회 선택의 조건입니다. 이런 조건을 잘 갖춰놓으면 교인이 신속 정확히 수평이동을 합니다. 신앙생활의 원칙은 실용주의나 편의주의가 아닙니다. 이것은 지독한 이기주의입니다.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 중심주의, 말씀중심주의입니다. 아무리 내게 불편해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을 따라야 합니다. 실용, 편의주의는 잘못된 신앙행태입니다. 신앙은 계산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희생하며 하는 것이고, 양보하며 하는 것입니다. 불이익을 감수하며 하는 게 신앙생활입니다. 그럼에도 온통 실용주의, 편의주의, 극단적 이기주의가 판을 칩니다. 이러면서 우리 한국교회가 추락했습니다. 이제는 더 내려갈 곳이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만 합니까? 이게 대세이니 우리도 그 길을 따라가야 합니까? 주님은 오히려 경계하라고 하십니다. 절대 내 편한대로 신앙생활하지 않고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라고 합니다. 이렇게 하면 나는 편리한데, 주님은 어떻게 생각하실까를 고려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주의, 말씀중심주의로 신앙생활을 합시다. 손해나 희생이 따르더라도 그렇게 하는 게 맞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십니다. 마지막 정산하실 때 절대 손해 안 되게 보장하십니다.
다음은 기복주의, 구복주의입니다. 기복신앙은 복을 기도하는 신앙입니다. 복을 구하는 신앙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에게 현세적인 복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을 누려야 마땅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고유한 특권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은 현세적이고도 물질적인 복이 기독교의 본질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궁극의 복이 현세적이거나 물질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을 구해야 하지만, 기복이나 구복주의로 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무속이나 재래종교에서는 이런 복이 전부입니다. 이것 때문에 부적을 쓰고, 정한수를 떠놓고 빌고, 굿을 하고, 차례를 지냅니다. 우리 몸에도 아직 이런 정서가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도 이렇게 해석해 버린 겁니다. 하지만 이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복을 구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은혜와 복을 다 주십니다.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면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을 다 주십니다. 이게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뜻은 구하지 않고 복만 구하는 게 기복주의고 구복주의입니다. 그렇게 염려 되느냐? 날아가는 새와 들의 백합화를 보라고 하셨습니다. 먹을 것 입을 것 구하지 않지만, 하나님이 다 입히고 먹이시는데,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하나님이 다 주신다고 하십니다. 날아가는 새와 들의 백합화에게는 하나님이 그저 창조주이시지만, 너희에게 하나님은 아버지 아니시냐? 아버지가 자식을 굶게 하시겠느냐? 그러니 너희는 먼저 아버지의 뜻을 구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구복주의, 기복주의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미가라는 사람은 오직 현세적인 복, 물질적인 복만 구했습니다. 본문 마지막 절을 보십시오. “이에 미가가 이르되 레위인이 내 제사장이 되었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내게 복 주실 줄을 아노라 하니라”(13절). 복 받기 위해 뜨내기 레위인을 제사장으로 삼았다는 겁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신앙이나 예배 그 자체보다는 복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신앙생활은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축복에 대한 기대는 대단합니다. 미가는 특히 돈에 대한 탐욕이 대단했습니다. 미가의 모친이 재벌이었습니다. 자기도 부모처럼 재벌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자기 마당에다 예배처소를 세우고 제사장까지 고용했던 겁니다. 그렇게 하면 제사장의 축복기도를 독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것을 노린 겁니다. 돈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줍니까? 돈이 우리의 진정한 복이 될 수 있습니까? 돈이 사람을 행복하게 한 적이 있습니까? 돈 때문에 형제가 원수가 되고, 부모 자식 간에 칼부림이 일고, 돈 때문에 부부지간에 죽임이 일어납니다. 가난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고 돈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가난할 때는 오순도순 잘 살던 시골 마을에도 개발로 인해 보상금 문제가 생기면 당장에 그 마을이 풍비박산이 납니다. 돈만 개입되면 사람들이 철천지 원수가 됩니다. 제 명에 못 죽습니다. 90년대 중반으로 기억합니다. 일본의 어떤 사람이 1억엔을 대나무 밭에 버렸습니다. 당시 선동렬 선수가 주니치에서 연봉이 1억엔이었습니다. 약 10억입니다. 나중에 돈의 주인이 밝혀졌습니다. 기자가 물었더니, 그 사람은 ‘돈 때문에 사람이 자살하고, 죽이는 모습을 보고 인간이 되기 위해 돈을 버렸다’고 했습니다. 돈은 진정한 축복이 아닙니다. 돈이 약속하는 것은 다 거짓입니다. 환상입니다. 사람들은 잘 살면 행복할 것이라 믿었습니다. 요즘은 비행기로 지구 끝까지라도 단숨에 날아갑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만큼 행복해졌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비행기나 자동차 때문에 안 죽어도 될 사람이 죽어나갑니다. 풍요지수(물질지수)와 자살지수는 늘 정비례합니다. 돈이 행복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돈이 곧 불행이라는 말입니다. 콘크리트 덕분에 우리는 닭장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분당 판교만 해도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닭장 밀집지대입니다. 물질문명이라는 게 대체 무엇입니까? 이게 진정한 축복이 될 수 있습니까? 많이 가질수록 훨씬 더 각박해지고 자살하는데 이게 무슨 축복입니까? 한국교회의 문제나 타락도 이게 다 돈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연봉 6억인 목사가 어떻게 타락을 안 할 수 있습니까? 제 친구 목사가 며칠 전에 제게 한 말입니다. ‘너는 작은 교회를 목회하니 정말 부럽다. 너는 죄를 안 지으니까.’ 지난번에는 타락을 안 해도 된다고 하더니 이번에는 강도를 높여 죄를 안 짓는 게 부럽다고 했습니다. 2만 명, 3만 명 목회하니 죄를 안 지을 수 없더라는 겁니다. 우리 교회는 왜 멀쩡합니까? 저와 여러분의 도덕성이 남달라서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순전히 돈이 없고 가난해서 그렇습니다. 먹고 죽을 돈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돈이 많아 보십시오. 타락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도 연봉이 6억 정도되면 라스베가스 날아가서 도박하고 그럴 겁니다. 펀드 투자도 할 겁니다. 가난하면 행복합니까? 가난하면 거지취급 받습니다. 요즘 세상은 돈 없으면 못 삽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는 주님께 맡기십시오. 우리는 영적이고 내세적이며 신앙적인 복을 구하며 사는 게 성서적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뜻에 부합합니다. 정말 우리가 관심을 갖고 지향해야 할 신앙의 방향이 어떤 곳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합시다.
그리고 형식주의입니다. 미가는 겉으로 보면 멀쩡합니다. 얼마나 그럴듯하고 열심히 있고 구색도 잘 갖췄는지 모릅니다. 자기 집 안마당에 화려한 예배처를 마련하고 목회자를 불러 자비로 교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날마다 예배하고 날마다 그에게 축복기도를 받습니다. 그럼에도 문제는 그게 다 형식이고 외식에 지나지 않았다는 겁니다. 정말 있어야 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는 없었다는 겁니다. 그의 모든 의식은 물질적인 복을 받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교회에 드나들고, 헌금을 한다고 누구나 신자는 아닙니다. 그런 절차와 요식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바로 우리의 중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외모가 아니라 중심을 보십니다. 형식을 무시할 필요는 없지만 내용이 훨씬 중요합니다. 비록 형식이나 의식은 볼품 없어도 내용이 충실하면 그 신앙이 아름다운 겁니다. 주님은 우리의 겉사람이 아니라 속사람을 감찰하십니다. 겉모양과 결과보다는 과정과 그 내용을 중시합니다. 주님 눈에는 잎사귀가 안 통합니다. 주님 당시 예루살렘 사람들도 잘 믿는 체, 기도 많이 하는 체, 의로운 체 했습니다. 그럼에도 실제는 그게 아니었다는 겁니다. 금식하면서 슬픈 표정을 짓고, 시장통에서 큰소리로 기도하며 자신의 경건생활을 시위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걸 회칠한 무덤이라고 하셨고, 독사의 자식들아 하면서 고발하셨습니다. 잎사귀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에 불과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가두의 잎사귀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면서 그들의 형식주의, 가식주의를 고발한 것입니다. 여러분, 등만 준비하면 안 됩니다. 기름을 준비해야 합니다. 무늬만 신자면 안 됩니다. 등만 손에 들고 있던 다섯 신부는 신랑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미가는 결국 망했습니다. 18장에 가면 모든 걸 다 잃습니다. 제사장도 신당도 예배처의 모든 기물도 다 날아가 버립니다. 신앙이 바르지 못하면 하루아침에 모든 걸 다 상실할 수도 있습니다. 후반기에는 주일날 예배의식에 참여하는 것으로 만족하거나 안심하지 마시고 반드시 내실을 관리하십시오. 신앙의 내공을 쌓으십시오. 올해만큼은 여러분 모두 형식주의가 아니라 내실을 추구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새로워지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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