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id": "xe-45555",
  "title": "20140817m 1박 2일(눅 9:28-36)",
  "authors": [],
  "category": "sermon",
  "dates": {
    "registered_at": "2014-08-17T20:35:22",
    "original_updated_at": "2014-08-17T20:38:51",
    "published_on": null,
    "delivered_on": null
  },
  "tags": []
}
---
<!-- paragraph:p0001 -->
<p class="p1">20140817m</p>
<!-- paragraph:p0002 -->
<p class="p1">눅 9:28-36</p>
<!-- paragraph:p0003 -->
<p class="p1">1박 2일</p>
<!-- paragraph:p0004 -->
<p class="p2"><br></p>
<!-- paragraph:p0005 -->
<p class="p1">[28]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29]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30]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31]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 [32]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깊이 졸다가 온전히 깨어나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 [33]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34] 이 말 할 즈음에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는지라 구름 속으로 들어갈 때에 그들이 무서워하더니 [35]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고 [36] 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만 보이더라 제자들이 잠잠하여 그 본 것을 무엇이든지 그 때에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아니하니라</p>
<!-- paragraph:p0006 -->
<p class="p2"><br></p>
<!-- paragraph:p0007 -->
<p class="p1">본문은 변화산 이야기입니다. 주님이 12제자 중 최측근인 베드로, 요한, 야고보만 데리고 1박 2일간 산에 오르신 기록인데, 마태복음 17장에도 이 말씀이 나옵니다. 본문 28절 하반절은 그냥 산에 올라가셨다고 하는데, 마태복음에는 높은 산에 올라가셨다고 합니다. 당시 주님이 세 제자를 데리고 올라가셨던 산은 어떤 산이었을까요? 28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이것은 주님이 산에 오르신 시점을 가리키는데, “이 말씀”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말합니다.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이게 상세히 나옵니다. 주님이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부르느냐고 묻습니다. 엘리야, 세례 요한이라고도 합니다고 하자, 주님이 너희는 나를 누구라 생각하느냐고 되묻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고 고백을 합니다. 주님이 감격하여 극찬하십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고, 천국 열쇠를 네게 준다. 무엇이든 땅에서 매거나 풀면 하늘에서도 매고 풀린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에 대한 이해에서 가톨릭과 개신교는 차이를 보입니다. 가톨릭은 반석을 베드로로 봅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초대 교황으로 봅니다. 며칠 전에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266대 교황입니다. 개신교는 이 대목을 어떻게 해석합니까? 반석을 인간 베드로가 아니라 인간 베드로가 고백한 신앙고백으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인간 베드로 위에 세워진 게 아니라, 베드로의 그 신앙고백 위에 세워졌다고 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황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위대한 사도인 것은 사실이지만, 주님은 베드로 위에 당신의 교회를 세운 게 아니라, 그의 신앙고백 위에 세웠다고 봅니다. 어쨌든 본문 28절에서 “이 말씀”은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관련하여 칭찬하신 것을 가리킵니다. 그렇게 칭찬하고 8일이 지난 겁니다. 그러면 추론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은 지점이 가이사랴 빌립보입니다. 그러므로 거기에서 도보 8일 정도 거리에 위치한 산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20km 떨어진 헬몬산이 있습니다. 팔레스틴에서 가장 높은 산입니다. 산꼭대기에 만년설이 있습니다. 그 눈 녹은 물이 흘러 갈릴리 바다를 이룹니다. 높은 산에 오르셨다고 하니 틀림없이 이 헬몬산에 오르셨을 겁니다. </p>
<!-- paragraph:p0008 -->
<p class="p2"><br></p>
<!-- paragraph:p0009 -->
<p class="p1">주님이 왜 이 산에 오르셨을까요? 무엇보다 제자들에게 기도훈련을 시키기 위해서입니다. 28절 하반절 이하를 보십시오.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29] 기도하실 때에.” 주님은 평소에도 자주 산을 찾아가서 기도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감람산은 습관적으로 오르셨습니다. 주님은 산 기도를 참 많이 하셨습니다. 한번은 제자들이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사경을 헤멜 때, 주님이 풍랑을 잔잔케 하셨는데, 그때도 산에서 기도하다가 바다 위를 걸어오셨습니다. 주님은 툭하면 산에 가서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도 자주 산에 가야합니다. 일상을 벗어나는 게 필요합니다. 주님이 높은 산에 오르셨다는 것은 하늘이 가까워서가 아닙니다. 때 묻은 일상을 벗어나서 좀 더 구별된 장소에서 주님께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골방도 높은 산이고, 인적 드문 광야도 높은 산입니다. 그런 기도의 처소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세상은 분주합니다. 바삐 살다가 교회 와서 눈 감아도 온갖 영상이 스쳐지나갑니다. 때 묻은 일상과는 구별된 처소로 나아가 집중해서 기도하라는 겁니다. 바로 이것을 훈련시키기 위해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산에 올라가신 겁니다. 모세도 높은 산에 올라가 기도했습니다. 엘리야도 갈멜산 꼭대기에 올라가 기도했습니다. 우리도 그럴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우리의 지친 영혼이 정화됩니다. 여러분이 인정하실지 모르겠지만, 지금 우리 심령이 너무 거칠어져 있습니다. 이것을 순화하는 길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주님이 우리를 어루만지십니다. 우리는 지금 영력이 다 소진했습니다. 아직 몇 달이나 남은 올해를 어떻게 살아가실 겁니까? 극도로 지쳐있습니다. 재충전이 필요합니다. 휴가는 육신의 피로를 해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은 아닙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높은 산에 올라가 기도해야 합니다. </p>
<!-- paragraph:p0010 -->
<p class="p2"><br></p>
<!-- paragraph:p0011 -->
<p class="p1">제자들의 신비체험을 위해 주님이 산에 오르셨습니다. 29절 이하입니다. “[29]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30]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제자들은 용모가 변화된 주님의 신비한 모습을 뵈었습니다. 그럴 뿐만 아니라 구약을 대표하는 두 사람까지 만납니다. 율법을 대표하는 모세와 선지자를 대표하는 엘리야를 만납니다. 전설 같은 인물 모세와 엘리야까지 봤으니 제자들이 제 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에게 놀라운 신비체험이요 영적 체험입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말합니다. 33절입니다.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베드로는 이 신비체험에서 깨어나기 싫었다는 겁니다. 산 아래로 내려가기 싫었던 겁니다. 얼마나 황홀했으면 이렇게 이야기했겠습니까? 신앙에는 신비체험의 세계가 있습니다. 가끔은 우리에게 이런 세계에 대한 체험이 필요합니다. 주님은 그 사실을 인정하셨기에 제자들을 데리고 산에 올라간 겁니다. 모세도 산에서 하나님을 직접 뵙니다. 그러고 나서 내려오는데 얼굴에서 광채가 나서 사람들이 그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했습니다. 신비체험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서 놓쳐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로 하여금 영적 신비체험을 하게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황홀경 속에 머물게 하시지는 않습니다. 초막 셋을 짓겠다는 베드로의 제안을 거부하고 다시 일상 속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우리는 신비체험을 하면 거기에 눌러 앉습니다. 우리는 서둘러 간판부터 겁니다. 그리고 장사까지 합니다. 이것은 다 주님의 뜻에 위배됩니다. 산에서 신비체험을 했으면 다시 일상으로 내려와야 합니다. 베드로가 내려오기 싫다고 하자 주님은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1박 2일의 원조는 주님이십니다. 심지어 주님은 오늘 너희가 체험한 것을 발설치 말라고 단속합니다. 우리는 그걸 부풀려 선전해대며 장사합니다. 기독교는 신비체험이 있으나 신비주의가 아닙니다. 산에 올라가 기도합니다만, 은둔주의는 아닙니다. 때로는 고행도 하고 금식도 합니다. </p>
<!-- paragraph:p0012 -->
<p class="p2"><br></p>
<!-- paragraph:p0013 -->
<p class="p1">여러분들 생각에 신부와 목사를 비교해 볼 때 신부가 더 영성이 깊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꼭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개신교 목사의 영성이 주님이 바라시는 기독교의 영성입니다. 신부들은 고행이나 금욕주의입니다. 아예 산상에 초막을 짓고 삽니다. 그러나 주님은 초막을 짓지 말라고 하십니다. 은둔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1박 2일이 딱 좋다고 하십니다. 주님은 산 상에서만 사는 사람을 원치 않으십니다. 산 상에서 신비체험을 했으면 다시 일상으로 복귀하라고 하십니다. 가끔 금욕하고 고행하며 신비체험을 했으면 다시 산을 내려가야 합니다. 베드로가 산에 초막을 짓겠다고 하자 주님은 거부하십니다. 산 아래에는 귀신 들린 아이를 붙잡고 제자들이 씨름하고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9장 40절을 보십시오. “당신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주기를 구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못하더이다.” 이게 지금 산 아래 상황입니다. 주님이 그 귀신들린 아이를 고쳐주십니다. 42절 이하입니다. “[42] 올 때에 귀신이 그를 거꾸러뜨리고 심한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예수께서 더러운 귀신을 꾸짖으시고 아이를 낫게 하사 그 아버지에게 도로 주시니 [43]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위엄에 놀라니라.” 주님은 이렇게 우리가 귀신 들린 사람으로 가득 찬 이 세상 한복판에서 그들을 돕고 그들을 구하는 일에 헌신하고 희생하며 살기를 바라십니다. 결코 자기만의 신비세계에 갇혀 자기만의 기쁨만 누리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래서 개신교 목사의 영성이 더 깊을 수 있습니다. 이번 신앙 수련회 때 이러한 신비체험을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p>
<!-- paragraph:p0014 -->
<p class="p2"><br></p>
<!-- paragraph:p0015 -->
<p class="p1">마지막으로 주님은 제자들의 말씀 훈련을 위해 산을 오르셨습니다. 35절입니다. “35]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고.” 하늘에서 이런 소리가 들립니다. 마태복음 17장 5절도 보면,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고 합니다. 산 아래 있을 때는 이런 음성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높은 산에 올라가니 이런 음성이 들리는 겁니다. 세상에는 잡소리가 많습니다. 성령은 부단히 말씀하시지만, 세상 소리에 묻혀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산에 올라가야 합니다. 하나님 음성 듣기를 간절히 바라고 사모하며 마음 문을 활짝 열면 생생한 주님의 육성이 우리 귀에도 들립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삽니다. 우리 영혼은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이사야 55장 3절입니다.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영원한 언약을 맺으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이니라. 신명기 28장 2절 이하입니다. “[2]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3]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4]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5]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6]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우리의 복이 하나님 말씀 듣는 데 달려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행하면,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토지 소산도 복을 받고, 들어와도 나가도 복을 받고, 심지어 짐승도 복을 받습니다. 신명기 28잘 7절 이하입니다. “[7] 여호와께서 너를 대적하기 위해 일어난 적군들을 네 앞에서 패하게 하시리라 그들이 한 길로 너를 치러 들어왔으나 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하리라 [8] 여호와께서 명령하사 네 창고와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이며 [9] 여호와께서 네게 맹세하신 대로 너를 세워 자기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니 이는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할 것임이니라.” 문제는 말씀입니다. 말씀을 듣고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번 신앙수련회는 이를테면 말씀의 축제입니다. 거기에서 주님의 뜨거운 육성을 들으시고, 삶의 현장에 돌아와 그 말씀을 실천하여서 주님이 약속하신 복을 받으십시다. </p>
<!-- paragraph:p0016 -->
<p class="p1"><br></p>
<!-- paragraph:p0017 -->
<p class="p1"><br></p>
<!-- paragraph:p0018 --><span class="archive-media-placeholder"><a href="https://www.youtube.com/embed/4EvtNSccwKE" title="미디어 원본"></a></spa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