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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20140803m</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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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롬 6:15-23</p>
<!-- paragraph:p0003 -->
<p class="p1">거룩함에 이르라!</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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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15]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17]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18]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19]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 [20]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로웠느니라 [21]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 [22]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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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우리 교단이 예장 통합측입니다. 우리 교단은 해마다 8월 첫 주일을 이단경계주일로 지킵니다. 올해는 이단경계주일을 맞는 우리의 자세가 예년과는 다른 것 같습니다. 세월호 참사와 구원파, 유병언의 도피와 그의 변사체 발견, 그의 미스터리한 죽음,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각종 루머와 괴담 때문에 우리의 심기가 착잡합니다. 한편으로는 두려운 감도 있습니다. 일개 이단종파 하나가 이렇게까지 나라 전체를 혼란과 불신, 거의 패닉상태로 몰아넣을 수 있는가, 이럴 수도 있구나 하는 데까지 생각하면 그렇습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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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구원파의 원조는 권신찬인데, 그는 경북 칠곡 사람입니다. 원래는 우리 교단 목사였습니다. 경안노회 소속 통합측 목사였습니다. 그런데 1960년에 네덜란드 선교사인 케이스 글래스와 미국 선교사인 딕욕이라는 사람이 대구에서 성경공부 모임을 열었는데, 이 사람이 거기에 참석하며 맛이 갔습니다. 거기에서 기성 교회와 맞서며 갈등을 빚었고, 결국 경안노회에서 제명되고, 총회로부터 이단으로 규정을 받았습니다. 구원파는 교파가 세 파입니다. 권신찬과 유병언파입니다. 기독교복음침례회입니다. 이복칠파가 있습니다. 이요한파입니다. 그의 고향은 목포입니다. 처음에는 권신찬파에 가담해 전도인으로 활동하다 유병언과 갈등을 빚어 독립해 생명의 말씀 선교회를 창립합니다. 혹은 대한예수교침례회 생명의 말씀측으로 이름을 붙입니다. 마지막으로 박옥수파입니다. 그는 경북 선산 사람입니다. 구원파는 대구에서 출발했기에 경북 사람이 많이 가담했습니다. 기쁜소식선교회, 대한예수교침례회 기쁜소식측입니다. 박옥수파도 활동이 많습니다. 1980년 이후에 죄사함 거듭남의 비밀이란 주제로 대규모 집회를 열고 있습니다. 모두가 네덜란드 선교사와 정체불명의 미국 선교사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주장하는 교리는 다 같습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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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구원파는 구원의 확신이 없거나 자기가 언제 구원 받았는지 모르면 아직 그 사람은 구원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구원의 감격과 기쁨이 없는 사람, 자기가 언제 구원받았는지를 모르는 사람은 아직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라는 겁니다. 구원이 얼마나 대단한 복인데 그걸 모를 수 있다는 말이냐는 겁니다. 구원을 받고도 어떻게 구원받은 자로서의 감격이 없을 수 있단 말이냐는 겁니다. 그래서 아직 구원받은 적이 없기에 구원의 시점을 알지 못하고, 구원의 은혜를 체험하지 못했기에 구원의 감격이 없다는 겁니다. 대단히 그럴 듯합니다. 여기에 다 걸립니다. 그래서 멀쩡한 신자들이 다 그리로 넘어갔습니다. 자기 구원받은 날짜와 시간을 모르지 않습니까. 태어난 날은 알면서도 영적으로 거듭난 날을 모른단 말입니까. 그래서 구원받고 싶은 사람은 오시오 하니까 다 거기로 간 겁니다. 구원파 신자는 거의 수평이동한 사람입니다. 열심히 믿던 사람이 다 그리로 갔습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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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우리가 태어난 순간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부모가 얘기해 주니 내가 그날 태어났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분들이 생일이 여럿입니다. 양력, 음력, 주민등록상의 생일 등 두서너 개 됩니다. 영적으로 거듭난 사건도 마찬가집니다. 대부분 자기가 언제 구원받았는지 모릅니다. 구원파는 구원을 몇년 몇월 몇시에 구원받았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제가 장신대에 있을 때에 어느 학생이 제게 그런 식으로 물었습니다. 악착같이 연구실까지 따라오면서 묻길래 제가 조교에게 저 녀석 끌어내라고 했습니다. 신학교에도 이단들이 많습니다. 내가 언제 구원받았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지금 하나님의 자녀인 게 중요합니다. 내가 구원받은 시간을 모른다고 해서 내가 받은 구원이 취소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구원파의 논리는 구원을 못 받았기에 그 시간을 모른다고 하는 겁니다. 구원의 확신도 마찬가집니다. 확신이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좋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확신이란 게 어렵습니다. 왜냐면 구원이란 것은 인과율로 해석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내게 원인이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저 하기 쉬운 말로 우리가 믿어 구원받았다고 하지만, 구원이란 것은 내게 원인이 없습니다. 내가 힘쓰고 애써서 얻은 결과라면 확실한데, 내가 한 게 없습니다. 그래서 구원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주권행위라고 했습니다. 대체 왜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셨을까? 이것은 신비입니다. 영원한 비밀입니다. 내가 한 게 있다면 못된 짓밖에 한 게 없습니다. 믿어서 구원 얻은 게 아닙니다. 믿음은 구원의 결과물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믿고 있는 겁니다. 믿음은 열매입니다. 원인이 아닙니다. 구원의 전제가 아닙니다. 내가 지금 믿고 있다는 것은 믿어서 구원 얻었다는 게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일방적인 구원을 당해서 믿고 있구나 하는 겁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믿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이해하기가 난감합니다. 명쾌하게 해석되어야 좋은데, 내가 한 게 없기에 확신을 갖기 어렵습니다. 확신 없다고 하나님이 내게 베푸신 구원을 회수하시지 않습니다. 늘 회의 속에 살아도 하나님은 그것을 다 이해하십니다. 구원은 본질적으로 그런 겁니다. 그저 하나님이 나를 구원해 주셨구나 하고 믿는 겁니다. 그래서 구원에 대해 감사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기본적으로 구원에 회의가 깔려있습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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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구원파는 구원받은 사람은 더는 죄를 짓지 않는다고 합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다시 죄를 짓는다면 그 사람은 자기가 구원받았다고 착각하고 있지, 실제로는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이라는 겁니다. 이것은 구원파 교리의 핵심에 속합니다. 가장 많은 지면과 시간을 할애하는 대목입니다. 도대체 구원파는 어떤 것에 근거해 이런 교리를 말하고 있을까요? 우리가 자연인으로 살 때는 마귀의 하수인들입니다. 마귀의 종입니다. 그러다가 예수를 믿고 회개하고 구원을 받으면 그때부터는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그래서 이제는 내가 사는 게 아니라 내 안에서 성령이 사십니다. 내가 내 인생을 사는 게 아니라, 성령이 내 안에서 내 인생을 살아주신다는 겁니다. 이게 구원파의 주장입니다. 그러니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마귀의 종이 아니라 빛이 내 안에 가득차고 성령이 나를 지배하니 이제는 나의 악한 의지가 아니라, 내 안의 성령의 강제로 삽니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존재로 살아간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구원파는 회개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회개는 일회적인 사건입니다. 자연인으로 살다가 기독교 신앙에 입문할 때, 한 번만 하는 겁니다. 회개를 하면 그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회개를 안 해야 온전히 성령의 지배를 받고 사는 사람입니다. 이게 구원파의 중요한 교리인데,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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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바울은 주후 약 34년에 회개를 했습니다. 다마스커스에 숨어 있는 기독교 신자를 색출해 처벌하기 위해 거기로 가다가 환상 가운데 주님을 뵙고 극적으로 회심합니다. 기독교로 개종하고 사도가 되어 동분서주하며 전도여행을 합니다. 약 34년에 개종하고 로마서를 57년에 썼습니다. 제3차 전도여행을 하다가 고린도에 3년 정도 머물렀는데 그때 썼습니다. 문제는 개종하고 사도가 된지 20년도 더 된 시점인데 그때까지도 바울은 죄 때문에 괴로워했습니다. 로마서 7장 21절 하반절 이하입니다.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4절의 고백은 처절한 실존적 부르짖음입니다. 대체 이 모순에서 내가 어떻게 헤어난다는 말인가 라는 겁니다. 25절 하반절도 보십시오.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바울의 이런 고백은 오늘 우리의 고백입니다. 우리의 갈등이요 고뇌입니다. 마음은 하나님을 따라야지 하는데 몸은 죄를 짓고 있습니다. 바울이 바로 그랬다는 겁니다. 사도된 지 20년도 넘었는데 아직도 이렇게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구원받으면 더는 죄를 짓지 않는 게 아닙니다. 이것은 구원파의 주장이지, 바울의 가르침은 아닙니다. 예수 믿는다고 당장에 천사가 되거나 성자가 되는 게 아닙니다. 겉으로는 달라지는 게 없습니다. 물론 정체성은 달라집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마귀의 종이었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나 우리 삶은 달라진 게 없습니다. 물론 그 죄의 성격은 달라진 게 맞습니다. 전에는 마귀가 시켜서 그랬다면 지금은 탄력, 가속도, 관성의 법칙, 옛 사람의 습성 때문입니다. 우리 몸에는 여전히 죄성이 남아 있습니다. 죄로 가고자 하는 탄력이 남아 있습니다. 더는 애굽의 노예가 아닌데도 날마다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죄성은 그렇게 독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죄를 짓습니다. 겉으로는 달라진 게 없습니다. 그러나 정체성은 달라졌습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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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바울이 7장 마지막 절까지 이렇게 힘들어하다 8장부터 놀라운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정죄함이 없다는 겁니다. 죄를 짓지만 죄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겁니다. 왜 죄에 대한 책임을 안 물으십니까? 왜 정죄함이 없습니까? 일사부재리의 원칙 때문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내 모든 죄를 대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죄는 분명한 죄인데 그 죗값을 주님이 지불하셨기에 나의 죄를 단죄하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바울은 로마서 8장 1절에 와서 깨닫는 겁니다. 바울의 주장과 구원파의 주장은 다릅니다. 구원파는 죄를 안 짓는다고 하고, 바울은 여전히 죄를 짓는다는 겁니다. 그러나 주님이 다 죗값을 지불하셨기에 하나님이 나를 정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바울이 깨달은 겁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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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 paragraph:p0021 -->
<p class="p1">이렇게 되면 이제는 안심하고 죄를 지어도 되겠구나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6장 1절 이하입니다. “[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2] 그럴 수 없느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이 무효화되기 때문이 아니라 구원받은 하나님 백성의 지상과제는 거룩입니다. 성화입니다. 이게 모든 성도의 최대 미션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부르시는 그 순간까지 성화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거룩한 모습을 닮아 가야 합니다. 그래야만 이후에 천국에 가서 이질감 없이 잘 살 수 있습니다. 그렇지 못하면 천국 가서 부끄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천국은 거룩한 곳입니다. 아버지 아들 성령이 다 거룩하고, 거기 있는 사람은 다 흰 옷을 입었습니다. 천국은 거룩한 곳입니다. 출애굽한 뒤에 광야에서 연단한 것은 새로워지라는 연단입니다. 구원받은 자녀를 당장에 천국으로 부리지 않으시는 것은 거룩하게 되라고 말미를 주신 겁니다. 우리가 할 일은 오직 하나 성화입니다. 그래서 죄를 지으면 반성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도 죄를 짓습니다. 죄를 짓기에 반드시 회개가 필요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셨듯이 전신을 씻은 사람은 다시 온몸을 씻을 필요는 없으나 그때 끄때 손발은 씻어야 합니다. 늘 거룩한 모습으로 우리를 관리해야 합니다. 물론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십니다. 구원파는 성령이 내 안에 계시며 내 삶을 성령이 살아주시기에 우리는 죄를 안 짓는다고 하지만, 아닙니다. 구원은 일방적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십니다. 그러나 성화는 우리가 해야 합니다. 성령은 나를 격려하십니다. 내 삶을 대신 살아주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늘 성령의 계시를 짓눌러버리고 무시해 버려서 문제입니다. 양심에 가책이 오지만 짓눌러 버립니다. 성령은 보혜사입니다. 곁에서 돕는 자입니다. 나를 대신 살아주지 않습니다. 깨달음을 접수해서 내가 내 삶에서 구현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내 고집대로 합니다. 이것을 성령을 근심하게 하고 훼방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주님의 모습을 닮아가지 않습니다. 이렇게 천국 가면 부끄러운 구원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성화와 천국 가서 누릴 영화는 정비례합니다. 성화의 보상이 영화입니다. </p>
<!-- paragraph:p0022 -->
<p class="p2"><br></p>
<!-- paragraph:p0023 -->
<p class="p1">믿는 사람도 죄를 짓습니다. 피 흘리며 싸워 죄를 멀리 해야 합니다. 내가 싸워야 합니다. 성령이 내게 깨닫게 하시는 것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합니다. 구원파의 미혹에 빠지지 마시길 바랍니다. </p>
<!-- paragraph:p0024 -->
<p class="p1"><br></p>
<!-- paragraph:p0025 -->
<p class="p1"><br></p>
<!-- paragraph:p0026 --><span class="archive-media-placeholder"><a href="https://www.youtube.com/embed/Zy30LI1PDQw" title="미디어 원본"></a></spa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