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교회 아카이브

20140622m 자유인(갈 5:1)

20140622m 

갈 5:1

자유인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금주 수요일이 6.25 64돌입니다. 우리 교단은 6.25날이 있는 주일을 북한선교주일로 지킵니다. 잘 아시는 대로 성경의 중요 메시지 가운데 하나가 자유입니다. 본문도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다고 하면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합니다. 5장 13절도 보면,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4장을 보면 바울이 자유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어린아이와 성인을 비교합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자유가 어떤 것인지를 좀 더 명확히 하기 위해 4장을 살펴봅니다. 4장 1절 이하입니다. “[1]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2] 그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나니.” 어린아이는 종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완전한 인격 주체도 아닙니다. 적어도 유대 사회의 오랜 전통으로서는 그렇습니다. 12살이 되어야 비로소 성인이 됩니다. 성경이 그리스도인을 자유인이라 했을 때 그것은 어린아이가 아니라 12세 이상된 성인이라는 뜻입니다. 성인이 누리는 자유입니다. 그것을 그리스도께서 주셨다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종과 아들도 비유합니다. 종과 아들의 정체성은 무엇입니까? 종은 종이며, 아들은 언제나 자유인입니다. 아들은 못 나도 자유인입니다. 종은 아무리 착하고 신실해도 역시 종일 뿐입니다. 그가 아들이 될 수는 없습니다. 못된 아들이라 해도 아들의 자격을 상실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그러한 아들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신분은 아들입니다. 


우리가 아들인데 자진해서 종의 멍에를 메고 종노릇한다는 게 바울의 안타까움입니다. 4장 9절입니다.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노릇 하려 하느냐.” 그렇다면 자유라는 게 무엇입니까? 자유니 해방이니 하는 말보다 더 추상적인 말은 없습니다. 대체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요 해방입니까? 


첫째,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요 해방입니다. 바울 당시 갈라디아교회가 안고 있던 큰 문제가 율법주의입니다. 복음도 믿어야 하지만 율법도 지켜야 한다는 것이 율법주의입니다. 이게 사실 최초 이단입니다. 유대교도였는데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이 많이 빠졌습니다. 세례도 받아야 하지만 할례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5장 2절 이하입니다. “[2]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3]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율법주의자들을 향해 통렬히 비판하고 책망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율법으로부터 해방된 사람입니다. 전에는 십계명, 할례, 안식일을 지켜야 구원 받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율법주의는 있습니다. 고행이나 수도생활을 장려하고 공덕 축적을 강조하는 가톨릭이나 안식교도들이 있습니다. 도덕이나 윤리를 강조하면서 인간의 노력과 윤리나 공덕을 강조하면 율법주의입니다. 인간의 노력이나 행위, 정성이나 치성으로는 절대 의롭게 될 수도 구원받을 수도 없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자 바울의 역설입니다. 저 사람은 예수 안 믿어도 천국 간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에 비해 상대적으로 착하다는 뜻일 뿐입니다. 사실 하나님이 보실 때는 다 도토리 키재기입니다. 아무리 높은 빌딩도 다 땅에 붙어 있습니다. 그 높이로 구원 얻을 건물은 없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16절입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얼마나 명쾌한 말씀입니까? 율법이 아니라 믿음의 길을 열어주셨다는 게 복음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복음으로 구원을 얻어 자유인이기에 율법은 더 이상 필요 없습니까? 우리는 분명 율법에서 해방된 자유인입니다. 그럼에도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은 율법무용론자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복음을 선포하러 오신 주님조차도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오지 않고 완성하려고 왔다’고 합니다. 우리는 결코 율법을 폐기처분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율법의 용도가 달라졌습니다. 전에는 구원을 얻기 위해 율법이 필요했지만, 지금은 성화를 위해 율법이 필요합니다. 전에는 구원 받기 위해 강제로 율법을 지켰지만, 지금은 하나님의 구원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율법을 지킵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구원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존중하면 내 삶이 거룩해집니다. 그러므로 율법무용론자는 잘못된 겁니다. 율법에서 자유하되 율법을 버리면 안 됩니다.


우리가 자유인이라는 것은 죄로부터 해방되었다는 뜻입니다. 로마서 8장 1절 이하입니다.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죄를 짓고 삽니다. 전에도 죄를 열심히 지었지만, 예수 믿은 후에도 죄를 잘 짖고 있습니다. 바울 같은 위대한 사도도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치 아니하고, 원치 아니하는 바만 행한다’고 비명을 질렀습니다. 이것은 개종 초기에 한 고백이 아니고, 사도가 된지 20년이 지나서 한 고백입니다. 예수 믿은 지 20년이 지나도 여전히 죄를 짓고 산다는 겁니다. 여러분은 이런 갈등과 분열이 없습니까? 혹시 내성이 생기고 만성이 되셨습니까?

왜 이런 갈등과 분열, 모순이 발생합니까? 왜 죄에서 자유를 얻은 사람이 계속해서 죄를 짓습니까? 사실 이 대목에서 득을 본 것이 구원파입니다. 구원파에서는 아직 완전한 구원이 없기에 죄를 범한다고 합니다. 완전한 구원을 위해 한때 기성교회에서 그리로 많이 갔습니다. 아닙니다. 여기에 속으면 안 됩니다. 구원 받았다고 죄 안 짓는 사람은 없습니다. 구원파의 권신찬, 유벙언도 죄 짓습니다. 박옥수도 죄 짓습니다. 바울도 사도가 된 지 20년이 지난 다음에도 죄를 짓고 있다며 괴로워합니다. 아직도 완전한 구원을 못 받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옛 사람의 습성 때문입니다. 관성의 법칙 때문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죄를 지으며 살던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죄를 지으며 살던 탄력 때문에 여전히 죄를 짓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죄에 대해 해방되었다는 것은 우리의 신분, 정체성이 달라졌다는 뜻이지, 우리에게 남은 죄에 대한 동경, 미련까지 해소된 것은 아닙니다. 아직 우리 몸에는 상상할 수 없는 죄에 대한 친화력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보십시오. 애굽에서 해방되어 광야로 나왔습니다. 분명히 자유인입니다. 그럼에도 날마다 애굽을 그리워했습니다. 신분과 소속이 달라졌는데도 여전히 몸에 죄에 대한 관성이 남아 있습니다. 옛 사람의 잔재 때문에 나타나는 금단현상입니다. 죄의 종으로 짓는 죄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정죄함이 없다고 합니다. 우리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어 생명의 법, 성령의 법에 저촉을 받습니다. 아무리 죄를 지어도 법이 없으면 처벌을 못합니다. 우리를 정죄할 법이 없습니다. 이게 바로 우리가 죄에서 해방되었다는 진정한 의미입니다. 우리가 죄를 안 짓는 게 아니라 죄를 지음에도 우리를 정죄할 법이 없어진 겁니다. 이것이 죄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우리가 자유인이라는 것은 초등학문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 9절 이하입니다. “[9]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10]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11]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바울 당시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은 율법과 죄에서도 자유하지 못했지만, 천박한 초등학문에서도 자유하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초등학문은 점성술입니다. 예수를 믿으면서 날을 따지고, 점칩니다. 새번역 성경에서는 아예 이것은 미신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서 토정비결을 봅니다. 신문에 나오는 오늘의 운세는 기본입니다. 이게 다 유치한 초등학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부터도 해방된 참된 자유인입니다. 손 없는 날을 따지지 마시고 차라리 손 있는 날 편하게 이사하십시오. 오늘의 운세 보는 시간에 기도하십시오. 철학관 가서 이름 짓지 마십시오. 이게 다 미친 짓이고 쓸 데 없는 짓입니다. 그리스도는 이러한 것들로부터 우리에게 자유를 선포하셨습니다. 아직도 믿는 사람이 새 차 사면 고사지냅니다. 집터 닦으면 고사지냅니다. 옛날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이 그랬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어리석다며 왜 다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 종노릇하느냐고 합니다. 


자유하십시오. 다시는 저급한 종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 종이 아닌 아들로 사시고, 어린아이가 아닌 성인으로 사시길 빕니다. 통일이 되어 북녘의 동포들도 참된 자유인으로 살아가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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