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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15m 스데반과 바울의 순교(행 6:8-15, 7:54-60)

20140615m 순교자 기념주일

행 6:8-15, 7:54-60

스데반과 바울의 순교


[8]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9] 이른 바 자유민들 즉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할새 [10]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 [11] 사람들을 매수하여 말하게 하되 이 사람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 하고 [12]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가지고 공회에 이르러 [13]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이르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 [14]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 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 [15]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54]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55]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57]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58]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59]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원래 우리 교단이 제정한 순교자 기념주일은 지난 주일이었습니다만, 지난 주일이 성령강림주일이어서 오늘을 순교자 기념주일로 지킵니다. 


2000년 기독교사의 최초 순교자는 스데반입니다. 야고보 사도로 알고 있는 사람도 있는 것 같은데, 그는 사도 가운데 가장 먼저 순교한 사람입니다. 스데반은 7장에, 야고보 사도는 12장에 순교 장면이 나옵니다. 스데반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어떤 사람이었기에 하나님이 그를 최초의 순교자로 삼았을까요?


그는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온갖 좋은 것은 스데반에게 주셨습니다. 사도행전 6장 3절을 보면 그는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남의 칭찬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5절을 보면 그는 초대교회 7집사 가운데 수석집사였습니다. 8절을 보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행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15절을 보면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고 합니다. 그는 대단한 설교가였습니다. 7장 2절 이하 53절까지는 스데반의 설교입니다. 스데반이 산헤드린에 잡혀 가서 그들 앞에서 설교한 것입니다. 그 내용과 짜임새로 볼 때 최고 수준이라는 게 학자들의 평입니다. 신약에는 베드로와 바울의 설교도 나오지만, 집사인 스데반의 설교가 단연 돋보입니다. 초대교회는 집사부터가 달랐습니다. 요즘은 초대교회 집사만도 못합니다. 베드로가 한창 선풍을 일으키며 한 번 설교에 3천 명, 5천 명씩 회개하고 개종시킬 때, 스데반은 산헤드린 공회에 잡혀가 명 설교를 하고 한 명의 회심자도 얻지 못한 채 돌에 맞아 죽습니다. 주님은 첫 순교자를 12사도 가운데서 내시지 않고, 7집사 가운데서 냈습니다. 사도 중에는 오히려 가룟 유다와 같은 첫 배신자, 자살자가 나왔을 뿐입니다. 주님은 스데반을 첫 순교의 제물로 삼으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왜 사도가 아니라 스데반 집사였을까요?


이유는 당시로서는 스데반만큼 준비된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스데반 이상의 순교자로서의 자격을 갖춘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를 제치고 스데반이 첫 순교의 제물로 삼았습니다. 그의 마지막을 보십시오. 7장 55절입니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스데반은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봤더니, 주님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게 아니라 벌떡 일어나 서 계셨다는 겁니다. 주님이 스데반의 순교 현장을 차마 앉아서 볼 수 없었다는 겁니다. 마지막 59-60절을 보십시오. “[59]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드렸던 기도를 스데반이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스데반의 순교에 누가 깊이 연루되어 있습니까? 바울입니다. 7장 58절입니다.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사울이라는 청년이 스데반 살해의 주동이었다는 겁니다. 사울이 사람을 부추겨서 스데반에게 돌을 던지게 했다는 겁니다. 스데반의 피를 본 사울은 이때부터 더욱 호전적이고 전투적으로 기독교인 박해의 선봉에 나섭니다. 사도행전 8장 1절-3절을 보십시오. “[1]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2]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3]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이렇게 사울이 날뛰다가 다메섹에 그리스도인들이 피난 가서 숨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합니다. 그들을 색출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다가 결국 그 길 위에서 그는 극적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사도행전 9장 1절 이하입니다. “[1]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3]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5]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이렇게 해서 사울이라고 하는 유대교 전사가 졸지에 변해 자기가 지금까지 그토록 박해하고 멸절시키려 했던 기독교로 개종합니다. 이렇게 극적으로 유대교 전사였던 사울이 기독교로 개종해서 제일 먼저 한 게 이름부터 바꿉니다. 큰 자라는 뜻의 사울을 작은 자라는 뜻의 바울로 개명합니다. 지금까지는 큰 자로 살아왔고 기고만장했는데, 이제부터는 작은 자로 겸손히 살겠다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개종한 후에 자기는 만삭되어 나지 못한 자라고 합니다. 자기의 화려한 이력과 스펙을 배설물처럼 버린다고 합니다. 이력과 스펙으로 말하면 바울을 따를 자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오줌과 똥처럼 버리겠다고 합니다. 과거 유대교 시절에는 극단적으로 교만했던 사람인데 개종한 이후 극단적으로 겸손한 사람이 되었고, 그는 평생 겸손하게 살았습니다. 그 비결이 무엇이었을까요?


바울은 과거 유대교 전사 시절에 스데반을 돌려 쳐 죽인 아픔을 평생 지고 살았습니다. 우리는 흔히 그처럼 은혜롭고 성령 충만하고 기사와 표적에 능한 대단한 스데반을 왜 하나님이 돌에 맞아 죽게 하셨을까? 최소한 돌에 맞아 죽는 일만큼은 막아주셔야 옳지 않은가 하는 겁니다. 저는 스데반을 보며 성령 충만해도 별 수 없구나 싶었습니다. 아무리 성령 충만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은 욕을 하면 듣게 하고, 돌을 던지면 맞게 하셨습니다. 왜냐면 이게 결코 지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독한 역설이지만, 이것이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진리입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고난, 아픔도 어떤 의미에서든 결국 내게 약이 되고 덕이 되기에 하나님이 용납하고 계십니다. 내게 필요하기에 주님이 당하게 하고 계신 겁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도움이 안 되고 유익이 안 되는 것이라면 사전에 피하게 하시거나 막아주시지 절대 그냥 당하게 하지 않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썩도록 내버려 두시는 것은 그게 더 많은 열매를 맺고, 새롭게 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참혹하게 십자가에 버려두신 것은 그게 택하신 자들을 영원히 살리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돌에 맞아 비참하게 목숨을 잃은 스데반은 그게 개죽음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오히려 기독교사의 걸출한 인물인 바울이 태어납니다. 스데반의 순교 없이는 바울도 없습니다. 스데반의 순교가 사도행전을 가능케 했고, 초대교회를 유지했으면, 2000년 기독교사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정말 성령 충만과 많은 능력과 권능이 필요한 사람은 스데반이었습니다. 그런 것들은 순교자에게 필요합니다. 성령 충만, 지혜, 기사와 표적, 권능은 자기가 출세하고 스타가 되라고 주님이 주신 게 아닙니다. 다 십자가를 지라고 주신 은사요 은혜입니다. 주님과 복음을 위해 고난을 당하며 자기 십자가를 충실히 지라고 주신 것들입니다. 한마디로 순교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스데반은 복된 사람입니다. 젊은 나이에 자기 뜻을 한껏 펼쳐 보이지 못하고 죽은 게 아니라, 가장 은혜롭고 지혜와 성령이 충만할 때 명 설교를 남기고, 영안이 열려 주님이 하나님 보좌 우편에 벌떡 일어서신 것을 보며 순교합니다. 스데반보다 아름다운 죽음을 가진 사람은 없습니다. 


스데반을 순교에 이르게 한 장본인인 바울도 순교했습니다. 바울은 힘들고 고된 길을 가다가 막판에 순교했습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었지만, 바울은 여러 해 지하 감방에 갇혀 있다가 네로에게 참수당합니다. 자기가 갇혀 있던 지하 감옥에서 나와 불과 2-30미터 떨어진 대리석 돌기둥에 머리를 얹고 목 베임을 당합니다. 바울이 자기 목을 참수당할 때 그 돌이 아직 있다고 합니다. 목을 쳤더니 목이 떨어져 피가 떨어지며 세 번 튀었는데, 그 튄 자리마다 샘이 터졌다고 합니다. 그 형장에는 바울 순교교회가 세워져 있습니다. 바울의 시신은 오스트리안 거리에 있는 루치안 부인이 수습해 자기 가문의 무덤에 장례를 치릅니다. 


순교자들을 생각합시다. 우리는 순교자들의 믿음의 계승자들입니다. 우리는 순교자들의 후예입니다. 스데반과 바울의 후예들입니다. 그들의 믿음을 계승해서 우리 자녀들과 후손에게 그 믿음을 물려줘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사명입니다. 순교자들의 치열한 믿음과 뜨거운 삶이 우리에게 도전과 깨달음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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