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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aragraph:p0001 -->
<p class="p1">20140504m 어린이주일</p>
<!-- paragraph:p0002 -->
<p class="p1">엡 6:4</p>
<!-- paragraph:p0003 -->
<p class="p1">아비들에게</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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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 paragraph:p0005 -->
<p class="p1">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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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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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오늘은 어린이주일, 다음 주일은 어버이주일, 그 다음은 청년주일입니다. 그래서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우리는 우연히 부모나 자식을 만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내 기호대로 부모를 정하거나 자식을 만난 것은 아닙니다. 가족 성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정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내 가족관계나 가정은 가장 아름답고 이상적입니다. 자연을 보십시오. 사람들이 파괴해서 그렇지 원래는 얼마나 아름답고 조화롭습니까? 가족관계, 가정도 원래 그런 겁니다. 가정은 사람이 인위적으로 만든 조직이 아닙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입니다. 하나님은 절대 한 가정의 성원을 제비뽑기 식으로 조합하지 않았습니다. 신중하고 진지하게 고르고 뽑아 가장 이상적으로, 내게 가장 어울리게 맺어 주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마귀는 계속 우리를 속입니다. 이 사람이 아니고 저 사람이면 더 행복할 거라고 말입니다. 거기에 넘어가지 마십시오. 지금의 내 가정을 떠나서는, 지금의 가족 관계를 떠나서는 어디에도 행복이 없습니다. </p>
<!-- paragraph:p0008 -->
<p class="p2"><br></p>
<!-- paragraph:p0009 -->
<p class="p1">어떤 며느리가 시어머니께 항의를 했습니다. ‘어떻게 어머니는 애를 키우다 보내셨습니까?’ 감사하십시오. 내 남편이 하나인 게 얼마나 감사합니까? 둘이었으면 어쩔 뻔 하셨습니까? 한 가정의 행복은 거저 주어지는 게 아니라 각 성원들이 자기 몫을 제대로 감당해야 합니다. 그럴 때 그 가정은 든든히 섭니다. 어린이주일이니 자식에 대한 부모의 책무를 생각해 보겠습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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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 paragraph:p0011 -->
<p class="p1">아이들이 왜 외삼촌을 좋아합니까? 외삼촌은 가끔씩 나타나 먹을 것 사주고 용돈을 줍니다. 절대 야단치지 않습니다. 왜냐면 외삼촌에게는 그럴 권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부모는 자녀를 양육해야 합니다. 양육은 부모의 가장 신성한 책무입니다. 본문도 오직 하나 ‘너희 자녀를 양육하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현실은 자녀양육이 잘 이뤄지고 있지 않습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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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aragraph:p0013 -->
<p class="p1">어느 날 담임 선생님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댁의 자녀가 학교 안 왔다는 겁니다. 벌써 사흘 째 무단 결석입니다고 하면, 대개 부모들은 졸도합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전화를 해서 왜 아이가 안 나왔느냐고 하면, 십중팔구는 우리 아이가 교회에 재미를 못 붙인다고 하고, 아무리 깨워도 아침에 못 일어난다고 합니다. 우리는 아직 하나님이 안 무서운 겁니다. 세상이 무섭지 하나님은 하나도 안 무섭습니다. 그래서 자식들을 하나님보다는 세상을 무서워하는 자식으로 만들었습니다. 이게 바로 우리가 자녀양육에 실패했다는 물증입니다. 자녀들이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면, 그 자식은 망합니다. 시편 127편은 자식이야말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기업이요 상급이라고 합니다. 세상에서 자식보다 더 소중한 게 어디 있습니까? 그럼에도 우리는 그 아이들을 어떻게 양육하고 있습니까? 너무도 무책임하지 않습니까? </p>
<!-- paragraph:p0014 -->
<p class="p2"><br></p>
<!-- paragraph:p0015 -->
<p class="p1">본문이 말씀하는 자녀양육의 원리는 무엇입니까? 우선 자녀양육의 궁극적 책임은 아버지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아비들아” 라고 시작합니다. 왜 성경이 자녀양육의 책임을 아비들에게 물을까요? 하나님이 아비를 한 가정의 머리로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5장 23절을 보면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고 합니다. 자녀양육의 결산도 하나님은 반드시 아비와 하십니다. 최초의 가정이었던 아담과 하와의 경우를 보십시오. 사실 하와가 먼저 선악과를 범합니다만, 성경은 책임을 아담에게 묻습니다. 신약성경은 ‘한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가 들어왔다’고 합니다. 아담이 그 가정의 머리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자녀양육의 원리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아비가 자녀양육에 책임이 있습니다. 자녀양육은 돈 버는 일보다 출세하는 일보다 백 번 더 중요합니다. 자녀양육에 나태하거나 무책임하면 훗날 심판 받습니다. 그 책임을 엄중하게 아비에게 묻습니다. 엄마는 아무리 소리를 질러봐야 위엄이 안 섭니다. 아이들이 겁을 내지 않습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아버지의 몫입니다. 그래야 가정에 기강이 서고 질서가 잡힙니다. 교육은 무섭습니다. 언제나 그 부모의 그 자식입니다. 그 부모의 언어가 그대로 그 자식의 언어가 됩니다. 여러분이 어떤 부모냐에 따라 여러분의 자녀가 어떤 부모가 될지를 결정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자식은 부모의 교육만큼 크고 그대로 그들의 인격을 결정합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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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aragraph:p0017 -->
<p class="p1">유명한 목사와 장로 집안의 자식일수록 좋지 않은 모습을 보일 때가 있습니다. 돌연변이가 아닙니다. 부모가 겉과 속이 다르고 앞뒤가 안 맞으니, 남은 속일 수 있지만 집에서 자녀를 속일 수는 없습니다. 아이들이 아직 어리니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속고 있는 겁니다. 부모의 삶이 표리부동하면 아이들이 당장에 혼란을 겪습니다. 나중에는 아이들이 교회를 비웃고 떠납니다. 우리는 결코 자녀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필사적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을 공경하는 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는 자식이 부모를 공경할 것 같습니까?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식이 부모를 거역하지 않겠습니까? 정말 내 자녀가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바라시면 먼저 믿음의 부모가 되십시오. 먼저 하나님 말씀 앞에 성실하십시오. 이것이 최선의 자녀양육입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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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다음은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며.” 이것이 바로 부모가 자녀를 양육할 때 지켜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원칙입니다. 이것은 자녀의 잘못이나 허물을 꾸짖지 말라는 게 아니고, 마음에 상처를 입히지 말라는 겁니다. 정서에 흠집을 내지 말라는 겁니다. 부모의 꾸중에 반발하지 않고 뉘우치도록 만들라는 겁니다. 가끔 부모가 ‘어휴, 저걸 누가 낳았나?’ 하면서 자녀를 모욕하지 말라는 겁니다. 자녀는 하나님이 내게 양육을 맡기신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주체적 인격입니다. 내 소유가 아닙니다. 내 자식이니까 내 맘대로가 아니라는 겁니다. 내 맘대로 할 수 있다는 게 범죄입니다. 매도 마찬가집니다. 말로는 사랑의 매라고 하지만 부모의 감정처리의 한 방편입니다. 부모의 기대에 못 미친 자식에 대한 보복행위입니다. 언어폭력도 문제입니다. 성인들의 언어폭력이 자식들에게 가장 무자비하고 파괴적이라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남에게는 함부로 욕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무방비인 자식에게 폭언을 합니다. 부모의 기분이 좋으면 모든 게 다 용서되고, 부모의 기분이 나쁘면 아무것도 아닌 일로 자식을 혼냅니다. 그런 집의 자식은 부모의 눈치부터 살핍니다. 부모의 표정이 일그러져 있으면 안절부절 못합니다. 이게 다 비교육적이고 비신앙적인 부모의 횡포입니다.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뜻은 이런 것들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요즘 아이들은 부모보다 훨씬 계산적이고 논리적입니다. 맹목적인 복종을 요구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자녀양육은 이해와 사랑, 관용에 기도가 동반되어야 합니다. 결코 쉽지 않습니다만,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합니다. 주님은 적어도 그런 자녀양육을 기대하시며 요구하셨습니다. 양육하되 아픔이나 상처를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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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 paragraph:p0021 -->
<p class="p1">마지막으로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합니다. 그냥 교양과 훈계가 아니라 주의 교양과 훈계입니다. 세상에도 교양과 훈계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주의 교양과 훈계입니다. 대학이라는 게 처음에는 주의 교양과 훈계를 가르치기 위해 세운 학교입니다. 그런 학교의 대표적인 게 하버드입니다. 그 학교가 주의 교양과 훈계를 포기하니까 예일이 나오고, 예일이 포기하니까 프린스턴이, 프린스턴이 주의 교양과 훈계를 포기하니 웨스트민스터가 나왔습니다. 유럽의 유수한 대학도 다 중세에 세워졌습니다. 본 대학, 뮌헨, 튀빙엔, 하이델베르크, 프라이부르크, 베를린이 다 그렇습니다. 다 처음에는 신학을 위해 세운 학교입니다. 본래 교양과목이 신학을 위한 예비단계였습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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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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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aragraph:p0024 -->
<p class="p1">우리나라는 공교육이 무너졌다고 합니다. 참혹합니다. 그래서 이 나라에는 못 살겠다고 하면서 여러 나라로 교육 이민을 떠납니다. 그러나 자녀양육은 공교육이 잘 이뤄지는 나라로 이민을 떠난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미국이라고 안전하지 않습니다. 학내 총기사고가 끊이질 않습니다. 본래 주의 교양과 훈계는 가정에서 아비가 하는 겁니다. 요즘은 아이들이 내성이 생겨 어지간해서는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부모들이 상상하는 이상으로 아이들의 정서는 갈 데까지 갔습니다. 아이들의 영혼이 극도로 황폐해져있습니다. 저 아이들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까를 생각하면 무섭습니다. 부모들은 이 상황을 직시해야 합니다. 아이들을 되찾아오기 위해서는 주의 교양과 훈계밖에 없습니다.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면 늙어서도 그것이 떠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준엄한 명령입니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이 한 절 말씀을 새기십시오. 자녀양육에 성공하는 복된 부모, 가정되시길 기원합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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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br></p>
<!-- paragraph:p0026 -->
<p class="p1"><b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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