측은지심(惻隱之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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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손추편>(公孫丑篇)에 나오는 맹자의 <사단설>(四端說)에 의하면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보고 연민을 갖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이야말로 인간의 네 가지 본성 중의 하나인 <인>(仁)의 단서가 된다고 합니다. 만약 불행을 당한 이웃을 보고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지 않는다면 그는 더 이상 사람이 아니라는 뜻의 <무측은지심 비인야>(無惻隱之心 非人也)라는 말까지 했습니다. 맹자에 의하면 어린 아이가 우물에 빠지는 것을 보면 누구나 뛰어들어 그 아이를 구하려 하기 마련인데 그것은 남의 칭찬이나 보상을 바라서가 아니라 인간의 가장 순수한 본성인 <인>(仁)의 발동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측은지심>이야말로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드는 원초적 도리요 고유한 본연성이라고 합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도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강도의 기습을 당해 쓰러져 있습니다. 그런데 제사장과 레위인은 각각 그 길을 지니다 강도 만나 쓰러진 사람을 보고도 구조는커녕 피해 급히 달아났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느 한 사마리아인은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눅 10:33) 자기 나귀에 태워 마을로 데려가 정성껏 치료하고 돌봐 주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그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자를 구한 동기입니다. 단지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겼다>는 서술뿐입니다. 즉 그는 어떤 관념이나 편견이나 선입견에도 붙잡히지 않고 오직 <측은지심>의 원초적 본연성에만 머물러 있었기에 <선한 사마리아인>이 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가 민족적인 혹은 종교적인 어떤 고정관념의 지배를 받았다면 과연 강도 만난 자를 구할 수 있었을까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 당한 것으로 보아 쓰러진 사람은 분명 유대인이었던 것 같고, 그렇다면 사마리아인과는 민족적, 종교적인 원수지간이지 않습니까? 따라서 선한 사마리아인이야말로 우물에 빠진 아이를 구하기 위해 달려든 <불인인지심>(不忍人之心)의 장본인이요 남의 고통을 차마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무한 연민과 동정심을 발휘한 진정한 <본성인>(本性人)이라 아니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은 그 비유를 마무리하시며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눅 10:37)고 하셨습니다.
이번 초유의 세월호 참사에서 우리가 가장 안타까워하며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은 선장을 위시해 배를 버리고 제일 먼저 탈출한 승무원들이 왜 끝내 승객들에게 퇴선 명령을 내리지 않았을까 하는 점입니다. 선장은 인터뷰에서 <사고 해역의 유속이 빠르고 수온이 낮아서>라고 했습니다. 그럼 유속이 빠르고 수온이 낮으니까 차라리 선실에 갇혀 수장되는 편이 더 낫다는 뜻입니까? 한 아이가 우물에 빠져도 뛰어들어 구하고자 하는 것이 인간 본연의 <측은지심>이라 했거늘 수백 명의 아이들이 바다에 빠져 죽어 가는데도 오직 자기들만 도망친 이 불가사의를 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더구나 그들이 배를 버린 마지막 순간에라도 <탈출하라!>는 방송 한마디만 했던들 …
아니, <선실에 있으라!>는 방송만이라도 하지 않았던들 저토록 많은 생명들이 저토록 허무하게 희생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 정말 가슴이 먹먹하고 분노에 살이 떨립니다.
오늘도 계속되고 있는 실종자 수색 작업에 큰 진전 있기를 진심으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