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교회 아카이브

20140427m 내 양을 먹이라(요 21:3-17)

20140427m

요 21:3-17

내 양을 먹이라!


[3]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4]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5]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6]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7]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8]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거리가 불과 한 오십 칸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물고기 든 그물을 끌고 와서 [9]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시니 [11]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물고기가 백쉰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12]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13]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14]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15]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6]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동양의 영웅들은 대단합니다. 삼국지에 관운장 아시지요? 한번은 관우가 적의 독화살을 맞고 뼈가 썩어들어가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습니다. 당대 최고 명의인 화타를 부릅니다. 화타는 뼈를 끌로 긁어내야 하기에 쇠사슬로 몸을 묶자고 합니다. 그러자 관우는 아들을 불러 바둑을 둡니다. 그 사이에 화타는 땀을 뻘뻘 흘리며 수술을 하는데, 관우는 그야말로 뼈를 깎는 수술을 다 마치기까지 눈썹 한번 껌벅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을지문덕 장군도 그렇습니다. 태몽부터가 다릅니다. 모친이 용꿈을 꾸었습니다. 그것도 금 비늘이 번쩍번쩍하는 꿈을 꾼 겁니다. 이 용이 하늘로 승천하는 꿈을 꾼 겁니다. 태어나기도 20달 만에 태어났습니다. 태아가 너무 크니까 어느 스님이 버드나무 가지를 옆에 두라고 하자 순산했다고 합니다. 그의 이름도 그 스님이 지어주었다고 합니다. 이게 동양의 영웅들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을 봐도 만삭되어 나지 못한 자라고 합니다. 부족한 사람, 덜 떨어진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본문 주인공인 베드로도 사실 2000년 기독교 역사에 바울 못지 않게 한 인물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누구보다 실패와 실수, 아픔이 많았습니다. 오늘 제가 소개한 본문 3절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이게 무슨 말입니까? 갈릴리 출신 제자들이 낙향해서 옛 직업인 어부로 되돌아갔다는 겁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때는 이미 제자들이 예루살렘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최소 두 번은 만난 후입니다. 요한복음 20장 19절 이하입니다. “[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이게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첫 번째 나나타신 장면입니다. 20장 26절 이하도 보십시오. “[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이게 도마를 위시한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두 번째로 만난 것입니다. 이렇게 두 번씩이나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체험했음에도 어째서 이들이 고기 잡으러 간다고 갈릴리로 돌아갔느냐는 겁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도 못 믿어서 그렇습니까? 부활하셨다 하더라도 주님에 대한 회의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제자들은 자신들에 대한 실망과 회의, 좌절 때문에 낙향한 겁니다. 베드로는 아직도 자신의 뼈아픈 실패의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는 부활하신 주님을 뵐 면목이 없었습니다. 주님의 부활로 자신의 상처를 잊기에는 그 상처가 너무 깊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그렇게 하지 않겠다. 주와 함께 옥에 까지 가겠다’고 합니다. 그렇게 장담하던 그가 일개 여종 앞에서 세 번 부인하고 저주합니다. 그러니 그 트라우마가 쉽게 치유가 되었겠습니까?그래서 그는 자신에 대한 회의와 깊은 우울증에 빠진 겁니다. ‘내가 무슨 사도야? 나 같은 건 이 갈릴리에 틀어박혀 물고기나 잡는 게 맞아.’ 그러면서 옛 직업으로 복귀한 겁니다. 그런데 막상 바다에 나가보니 이제는 고기잡는 일마저 여의치 않습니다. 밤새도록 그물질 했는데 허탕만 쳤다고 합니다. 새벽녘에 철수하려고 하는데 그 바닷가에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져라.’ 그 말씀대로 했더니 그물을 끌어올릴 수 없을 정돌 물고기를 많이 잡았습니다. 그러나 정확히 3년 전에도 베드로가 처음 주님의 소명을 받을 때에도 같은 장면입니다. 그때도 주님이 베드로에게 깊은 바다로 나가 그물을 내리라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그 말씀대로 했더니 그물에 고기가 많이 두 배에 가득 찼다고 합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이제는 물고기가 아니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3년 전 첫 소명의 자리에 부활하신 주님이 다시 나타나신 겁니다. 베드로의 상처를 치유하고, 베드로의 첫 소명을 새롭게 회복하기 위해서입니다. 


9절을 보면 주님이 숯불을 피워놓고 거기에 고기와 떡을 굽고 계셨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주님은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렇게 물으십니다. 그것도 세 번을 물으십니다. 왜냐면 베드로가 주님이 잡히시던 날 밤에 세 번 부인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도 덜도 아닌 세 번을 물으신 겁니다. 아마 이때에 틀림없이 효과음도 있었을 겁니다. 본문 4절을 보면 날이 샐 무렵이라고 했으니, 아마 저 멀리에서 닭소리가 들렸을 겁니다. 타이밍이 절묘합니다. 주님이 세심하게 상황을 재현하신 겁니다. 이게 다 상처받은 한 영혼을 치유하기 위한 주님의 배려요, 고도의 영적인 처방입니다. 사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사랑이 아니라 얼마든지 다른 것을 물어볼 수도 있습니다. ‘어찌하여 나를 버렸느냐?’, ‘어찌하여 낙향했느냐?’ 그러나 주님은 그런 것들보다 끝까지 사랑 하나만을 확인하십니다. 사랑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사랑 하나만 확인되면 다른 모든 것은 용서됩니다. 실수, 부인, 달아난 것, 낙향, 옛 직업으로 돌아간 것도 다 용서됩니다. 사랑만 확인되면 아픔도 상처도 다 치유됩니다. 여러분, 간음하고 살인하고 도적질하는 것만이 죄가 아닙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을 잃은 것도 큰 죄입니다. 에베소 교회를 향해 주님은 ‘너는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했습니다. 초심을 잃은 교회나 성도는 반드시 주님의 책망을 듣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늘 우리에게 당신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 하십니다. 수시로 우리에게 물어보십니다. 


주님의 그 물음에 베드로가 어떻게 대답했습니까?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고 합니다. 자신감이 없는 애매한 표현입니다. ‘네.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라고 하지 않습니다. 제 마음을 주께서 아십니다고 합니다. 우리말 번역으로는 구분이 안 됩니다만, 헬라어 원어상으로는 주님이 물을 때 사용한 사랑과, 베드로가 대답할 때 사용한 사랑의 단어가 다릅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아가페로 묻습니다. 절대적이고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묻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주님께 필레오로 대답합니다. 필레오는 절대적인 사랑이 아니라 상대적이고 인간적이며 선택적인 사랑입니다. 우정 같은 사랑입니다. 필로소피는 철학인데 지혜에 대한 사랑입니다. 필하모니는 음악 사랑입니다. 다 필레오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서 아가페를 확인하고 싶어했는데, 베드로는 끝까지 필레오로 응답합니다. 당연히 전 같으면 베드로는 아가페로 답을 했을 겁니다. 그런데 참혹한 실패를 통해 자신의 한계를 통감한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필레오로 대답한 겁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주님의 세 번째 물음을 보십시오. 세 번째 물으신 사랑은 아가페가 아니라 필레오입니다. 주님도 마지막에는 아가페가 아니라 필레오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필레오 하느냐? 왜 주님이 그렇게 물으셨을까요? 주님이 양보하신 겁니다. 주님이 베드로의 눈높이를 맞추신 겁니다. 아가페 수준이 못 되는데 자꾸만 아가페로 물으시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자 베드로도 자신감이 붙어 주님이 모든 것을 아시니 제가 주님을 필레오 합니다고 대답합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주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아가페 사랑이 아닐지라도 필레오라고 할지라도 반드시 우리는 주님께 우리 사랑을 확인시켜야 합니다.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자주 주님으로부터 달아났던 간에, 얼마나 많이 주님을 부인했던 간에 보다 진지하고 엄숙하고 확실하게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새로워지고, 그간의 모든 상처와 아픔이 회복되고, 우리의 초심이 회복됩니다. 


지난 주일 새벽에 부활하신 주님이 지금 세월호가 침몰한 진도 앞바다에 나타나셔서 절망하고 안타까워하고 슬퍼하는 대한민국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고 계십니다. 우리는 슬퍼도 이 물음에 답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 최악의 상황이 수습되고 회복됩니다. 우리 푸른교회도 반드시 이 물음에 답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원초적 사명, 소명이 회복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에게 사랑을 확인하시는 주님이 어떤 미션을 주십니까? ‘내 양을 먹이라!’ 그렇습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은 주님이 우리에게 명하신 사명을 회복시킵니다. 우리가 주님에 대한 사랑을 회복해야 하는 이유는 교회의 원초적인 사명, 미션을 수행하기 위함입니다. 다시 한 번 우리를 찾아와 사랑을 확인하고 계시는 주님께 우리의 사랑을 고백하고, 또 ‘내 양을 먹이라’는 뜨거운 음성을 들읍시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진실된 사명자로 새 출발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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