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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aragraph:p0001 -->
<p class="p1"><span>부활절과 봄은 참 잘 어울립니다. 겨울이 자연계의 모든 생명을 지하에 가두는 무덤과도 같다면 봄은 마치 굳게 닫힌 무덤의 돌문을 열 듯 땅속에 갇힌 모든 생명체들을 새롭게 불러냅니다. 교회는 오래전부터 달걀로도 부활을 상징해왔습니다. 껍질을 깨고 나오는 새생명에서 부활의 모형을 본 것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기독교는 원래 참 보잘 것 없는 데서 출발했습니다. 주님도 그때의 사회적 비중으로 볼 때는 전혀 하찮은 존재였습니다. 복음서만 보면 그 출발부터가 제법 우주적인 듯하고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온 유대 사회의 관심의 촛점이 된 듯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참 뒤에 기록된 복음서에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적 입장이 윤색된 결과일 뿐 실제로는 결코 그렇지 못했습니다.</span><span> </span><b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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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3"><br></p>
<!-- paragraph:p0003 -->
<p class="p3">주님의 활동 무대도 그렇습니다. 유대 사회의 중심인 예루살렘이 아니라 정통 유대인들의 눈으로 볼 때는 쌍놈들이 웅거하던 저 변방 갈릴리였습니다. 또 주님 주변을 맴돌던 사람들 역시도 온갖 환자들로부터 창녀, 세리들에 이르기까지 오합지졸에 지지리 궁상이었습니다. 종당에는 주님이 로마 권력에 의해 체포되어 식민지 반란범에게 가하는 가장 잔인한 형인 십자가에 처해지지만 왜 그런 처형을 당해야 했는지 그 죄목조차도 모호하기 짝이 없습니다. 제자라는 사람들도 그렇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동안에는 이렇다 할 특성을 보이지 않습니다. 남다른 투지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뛰어난 지혜가 있었던 것 같지도 않습니다. 막판에 그들이 스승마저도 버리고 다 줄행랑을 쳤다는 것은 그들 본래의 꼴을 그대로 드러낸 것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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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3"><br></p>
<!-- paragraph:p0005 -->
<p class="p3">그런데 불가사의한 것은 그렇게 무능하고 한심하던 자들이 어떻게 후에는 그토록 무서운 투지로 유대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고 이단으로 몰려 박해를 당하고, 마침내는 유대의 경계를 넘어 가는 곳마다 복음의 불길을 당기며 결국은 로마의 심장에까지 돌진하여 이번에는 도리어 그들을 복음으로 굴복시킬 수가 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더욱 경악할 사실은 바울 같은 사람이 그들의 신앙에 투항했다는 것인데 이것은 사회학적 고찰이나 심리학적 분석만으로는 도저히 설명이 되지 않는 사건입니다. 그는 기독교로 전향하기 전부터 이미 당대의 탁월한 지성이자 백절불굴의 유대교 전사였습니다. 그런 그가 어떻게 자신에 비하면 너무나도 보잘 것 없는 작은 무리의 신앙에 승복하여 그때까지 쌓아온 자기의 모든 이력과 스펙을 &lt;오줌이나 똥&gt;(빌 3:8)처럼 내버리는 자기 변혁이 가능했을까 하는 것입니다.</p>
<!-- paragraph:p0006 -->
<p class="p3"><br></p>
<!-- paragraph:p0007 -->
<p class="p3">미리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게 다 주님의 부활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기원은 성탄절이 아니라 부활절입니다. 성탄절은 어느 종교든 다 있지만 부활절을 가진 종교는 기독교뿐입니다. 창세기 22장에는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을 잡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려 했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신약 히브리서는 당시 아브라함이 자신의 심장 같은 외아들의 목을 따겠다고 칼을 들이댄 것은 헥까닥 해서가 아니라 &lt;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믿었기 때문이다&gt;(히 11:9)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은 백세에 기적 같이 얻은 외아들을 제 손으로 잡아 바치면서도 끝끝내 절망하지 않고 하나님은 죽은 자도 다시 살리신다는 부활 신앙에 목을 내댔습니다. 그 결과 이삭의 부활, 아니 자기 자신의 부활을 체험한 부활 신앙의 영원한 사표, 부활신앙의 원초적 조상이 되었습니다. </p>
<!-- paragraph:p0008 -->
<p class="p3"><br></p>
<!-- paragraph:p0009 -->
<p class="p3">부활신앙은 한 마디로 무덤 속에서도 체념하거나 절망할 수 없다는 생의 모진 절규입니다. 지난 수요일 진도 앞바다에서 발생한 여객선 침몰 사고로 우리의 소중한 아들 딸들이 실종되어 아직도 다 구조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육중한 무덤의 돌문을 열 듯 굳게 닫힌 수문을 열고 모두가 속히 귀환하기를 진심으로 빕니다. 주님이 죽음의 숙명을 깨고 부활하신 것처럼 아브라함이 자기의 생명보다 더 소중한 외아들 이삭을 되찾은 것처럼 모두가 그렇게 되돌아오기를 기원합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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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 paragraph:p0011 -->
<p class="p3">&lt;부활하신 주님, 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봄날, 설레는 가슴으로 여행길에 올랐던 우리의 아들 딸들이 지금 저 차디찬 바다 밑 암흑 속에 갇혀 있습니다. 속히 구원의 닻줄을 내리사 물고기 뱃속에서 되살아 나온 요나처럼  생환하게 하소서!&gt;</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