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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13m 가상칠언(架上七言) 요 19:23-30

20140413m

요 19:23-30

가상칠언(架上七言)


[23] 군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24] 군인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그들이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인들은 이런 일을 하고 [25]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26]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27]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28]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29]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주님은 고난 주간 금요일 이른 아침 6시쯤에 사형선고를 받으시고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달리십니다. 6시간 동안 고통하시다가 오후 3시에 운명하십니다. 십자가에 달려 계셨던 6시간 동안 비명 같은 7마디 말씀을 남겼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가상칠언(가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늘과 땅 사이에서 주님이 바친 중보의 기도요, 우리에게 남긴 최후의 메시지였습니다. 종려주일을 맞아 7마디의 말씀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제1언은 누가복음 23장 34절에 나오는 말씀인데,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못함이니이다”입니다. 지금 자기 옷을 두고 제비를 뽑고 있는 군인들을 바라보시며 하나님께 드린 사죄의 기도입니다. 사실 주님은 남을 위해 기도하실 처지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자기의 생살에 못을 박아 십자가에 높이 단 사람들의 속죄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어떻게 주님은 아픔과 수치와 억울함의 정점에서 자기 옷을 놓고 제비뽑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사죄의 기도를 드릴 수 있었을까요? 


우선 사람들의 무지와 어리석음에 대한 깊은 연민 때문입니다. 인생을 불쌍히 여기셔서 그런 기도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누구신지, 자기들의 하는 짓이 무엇을 뜻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몰랐습니다. 알고서야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고 조롱하고 침 뱉고 뺨을 때리겠습니까? 주님은 그 점에 대한 연민을 가지신 겁니다. 모르고 하고 있다는 겁니다. 나를 아프게 하고 피 흘리게 하고 배신한 사람이 있습니까? 다 어리석고 무지해서 그렇습니다. 차라리 주님처럼 연민을 갖고 그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우리도 불가사의하게 그런 사람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한 가지 더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용서란 하나님의 명령이란 겁니다. 하나님의 명령이란 사실을 잊지 않고 기억한다면, 우리는 남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남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무엇보다 내 감정이 그를 용서하지 못해서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내 감정에 충실해야 하는 게 아니라 주님의 명령에 충실해야 합니다. 주님의 명령 앞에 충실히 결단해야 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70번씩 7번씩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왜 그런 명령을 하십니까? 사실은 다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보복이요 승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살기 때문에 남을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용서 못하고 살면 그 미움, 이웃에 대한 증오가 결국 암이 됩니다. 남을 용서하는 일은 하나님의 준엄한 명령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셔서 그 최악의 고통과 아픔 중에도 자기를 십자가에 높이 단 원수들을 위해 사죄를 빈 것입니다. 


제2언입니다. 누가복음 23장 43절입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것은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라고 말한 한 편 강도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한 편 강도는 마지막에 극적으로 낙원을 훔친 희대의 행운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 이 사람을 부러워합니다. 이 강도는 막차 타고 턱걸이로 구원은 얻었지만 이게 전부입니다. 성화도 없이 천국에 갔기 때문에 천국에서 누릴 영화도 없습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부끄러운 구원의 전형입니다.


이 사건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주님은 당신의 택하신 백성을 절대 안 버리신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택하신 자녀를 절대 잊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마지막 순간이라도 기어이 회개를 강제하셔서 데려가신다는 뜻입니다. 살인강도로 사형수라 할지라도 숨넘어가기 1초 전이라도 회개케 하셔서 기어이 그 영혼을 챙기신다는 것입니다. 이 강도는 천국에 갔지만 만일 주님과의 대화가 포착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당연히 그가 지옥갔다고 생각할 겁니다. 실제 이런 사례가 많을 것입니다. 절대 없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누구도 모릅니다. 그 당사자와 주님만 압니다. 그 사람이 정말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하나님의 자녀라면 주님은 반드시 마지막 순간에라도 회개시켜 천국에 데려가십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의 구원은 부끄러운 구원일 따름입니다. 일찍부터 예수를 믿어 성화를 축적해야 합니다. 주님 모습을 닮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천국에서 누릴 영광이 큽니다. 아무튼 이 한 편 강도의 극적 구원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실패해도 주님은 당신의 자녀를 챙기시는 데 절대 실패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제3언입니다. 본문 26절입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주님의 자신의 어머니를 제자 요한에게 부탁하는 말씀입니다. 이때부터 요한은 어디를 가든 마리아를 모시고 다녔습니다. 요한이 말년에 소아시아 에베소에서 목회할 때 거기까지 모시고 갑니다. 에베소에서 요한도 마리아도 죽습니다. 우리가 정말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나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이가 사랑스러우면 처갓집 말뚝을 보고도 절한다고 하듯이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내가 남편을 사랑한다면 남편이 사랑하는 사람도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참된 사랑입니다. 요한은 주님의 모친 마리아를 끝까지 사랑하며 모심으로써 주님에 대한 자기의 사랑이 진실하다는 사실을 확인시켰습니다. 


제4언입니다. 마태복음 26장 46절입니다. “엘리엘리 라마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주님을 버리셨습니다. 주님의 고백대로 주님은 철저히 사람에게도 하나님에게도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기도하셨습니다.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런데 그 피땀과 피눈물의 기도는 단지 십자가에 달리셔서 고통을 받게 될 육체적인 고난을 위해서 만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이 하나님의 버리심, 저주, 심판이 두려웠던 겁니다. 이게 무서웠던 겁니다. 그래서 ‘내가 고민하여 지금 죽게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유사 이래 둘도 없는 죄인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전 인류의 죄를 하나님이 주님의 등에 지우고 주님으로 하여금 흉악한 죄인으로 죽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십자가는 주님이 대신 짊어지신 전 인류의 죄에 대한 무서운 저주요 심판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영혼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기 전까지 사흘 동안 어디 계셨습니까? 육체와 함께 무덤에 갇혀 계셨습니까? 구천을 떠도셨습니까? 제가 몇 차례 말씀드렸다시피 그 사흘 동안 주님의 영혼은 지옥에 내려가셨습니다. 우리가 당할 지옥의 형벌을 지옥에 친히 내려가셔서 당하셨습니다. 이게 오랜 교회의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교회는 정서상 이런 가르침을 거북해 하고 용납하지 못합니다. 아마 이 설교를 하고 나면 틀림없이 여러 건의 항의가 들어올 겁니다. 한국에서는 물론이고 미국에서도 항의가 들어옵니다. 그러나 우리 한국교회는 이점을 시정해야 합니다. 사도신경에도 원래는 들어 있는 내용을 우리말 번역 사도신경에는 그 부분을 쏙 뺐습니다.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부분을 뺀 겁니다. 이게 기독교 구원론의 백미입니다. 지금은 작고했지만, 스위스 바젤의 오스카 쿨만 교수는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셔서 그 영혼이 지옥에 안 가셨다면 앞으로 우리가 가야한다고 했습니다. 주님의 영혼이 지옥에 안 가셨다면 우리 영혼의 숙제는 누가 하냐고 되물었습니다. 주님은 분명 우리 대신 죽으시고 우리 대신 지옥의 형벌을 당하셨습니다. 베드로도 베드로전서 3장 18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며.” 지옥의 형벌 때문에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하고 탄원한 겁니다. 부디 주님이 내 대신 당하신 지옥의 형벌을 잊지 마십시오. 주님이 지옥가셨기에 이제 우리는 지옥 갈 일이 없어졌습니다. 이게 고맙고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제5언입니다. “내가 목마르다.”(28절) 이때 주님은 벌써 6시간 가까이 십자가에 달려계시며 물과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더구나 팔레스틴의 낮 기온이 덥습니다. 주님의 이 타는 목마름은 당연히 우리가 당해야 할 기갈을 당하신 겁니다. 지옥은 최악의 목마름이 영원히 계속되는 곳입니다. 부자가 지옥 불에서 고통당하며 아브라함에게 손가락 끝에 물 한 방울을 찍어 내게 달라고 했습니다. 지옥 불에서 물 한 방울이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만, 그토록 고통스럽다는 겁니다. 주님이 대신 당하셨기에 이제 우리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습니다.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생수를 보장 받았습니다. 우리는 지옥 갈 일이 없기에 영원히 목마르지 않습니다. 내 대신 주님이 다 당하셨습니다. 


제6언입니다. “다 이루었다.”(30절) 무엇을 다 이루셨습니까? 먼저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셨습니다. 공의는 죄는 벌하고 의인은 상 주신다는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모든 인간이 죄를 범했습니다. 모든 인간을 벌하고 심판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모든 사람의 저주를 홀로 당하셨습니다. 주님이 우리 대신 십자가에 홀로 달리셔서 지옥의 형벌을 당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모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의 속성을 관철하셨습니다. 다음은 사랑의 속성을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남의 허물을 용서하고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고 무조건 사랑하는 아가페를 이루셨다는 겁니다. 요한일서는 하나님을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시고 우리를 영원히 살려주심으로써 그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성취하셨습니다. 따라서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온전한 성취입니다. 십자가는 종대와 횡대의 크로스입니다. 공의와 사랑의 교차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서 공의와 사랑을 관철하셨다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어디에서 발상한 것입니까?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의 발상이 십자가입니다. 절묘합니다. 공의와 사랑은 원래 조화되기 어렵습니다. 공의를 관철하면 사랑이 상처를 입습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집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당신의 지혜로 절묘하게 공의와 사랑을 조화시킨 겁니다. 십자가는 공의와 사랑과 지혜의 산물입니다. 그래서 천사들조차도 깜짝 놀랐다는 겁니다. 


제7언입니다. 누가복음 23장 46절입니다.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십자가의 무서움은 절대 빨리 죽게 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보통 10시간, 심지어는 이틀씩 가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가족들이 와서 군사들에게 뇌물을 주고 빨리 죽게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누구나 마지막에 주님처럼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죽음 앞에서 자기의 영혼을 부탁할 아버지가 없는 사람은 정말 우주의 고아요 영원한 고아입니다. 아버지가 있어야 합니다. 돌아갈 본향이 있어야 합니다. 죽음은 닥쳐왔는데 자기 영혼을 부탁할 아버지가 없다면, 본향이 없다면, 그런 사람보다 불행한 사람은 없습니다. 평소에 아버지 뜻대로 산 사람이라야 죽음 앞에서 부끄러움 없이 ‘아버지 내 영혼을 부탁합니다’고 기도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평생 개차반처럼 살다가 죽음 앞에서 이런 기도를 드린다면 얼마나 면목 없는 짓입니까. 주님이 십자가 앞에서도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라’고 했습니다. 십자가의 쓴잔을 아버지 뜻이라면 마시겠다고 했기에 마지막 순간에 내 영혼을 부탁한다고 기도할 수 있는 겁니다. 스데반도 이렇게 기도하고 죽었습니다. 수 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이렇게 기도하고 죽었습니다. 얼마나 복됩니까? 주님처럼 이렇게 기도하며 죽어야 합니다. 생전 아버지 뜻대로 사셔서 마지막 죽음 앞에서 주님처럼 이런 기도를 바치고 세상을 아름답게 마무리하는 복된 성도 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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