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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20140330m</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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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마 26:14-25</p>
<!-- paragraph:p0003 -->
<p class="p1">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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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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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14] 그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15]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16] 그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17] 무교절의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유월절 음식 잡수실 것을 우리가 어디서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18] 이르시되 성안 아무에게 가서 이르되 선생님 말씀이 내 때가 가까이 왔으니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네 집에서 지키겠다 하시더라 하라 하시니 [19] 제자들이 예수께서 시키신 대로 하여 유월절을 준비하였더라 [20] 저물 때에 예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앉으셨더니 [21] 그들이 먹을 때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하시니 [22] 그들이 몹시 근심하여 각각 여짜오되 주여 나는 아니지요 [23]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24]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25] 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이르되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하시니라</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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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여러분은 2000년 기독교 역사 가운데 가장 심한 죄인, 도저히 용서받지 못할 죄인 한 사람을 꼽으라면 누구를 드시겠습니까? 아마 대부분은 가룟 유다를 꼽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빌라도나 로마 군병보다 가룟 유다를 더 치명적인 죄인으로 꼽을 것 같습니다. 독일에서는 유다라는 이름은 법으로 금하고 있습니다. 다른 제자들의 이름은 많은데 유다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오래 전부터 가져온 의문 가운데, 주님은 가룟 유다가 자기를 배신할 줄 아셨을텐데 왜 그를 제자 중 하나로 택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수수께끼입니다. 이런 틈새를 비집고 들어온 게 유다복음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위경입니다. 외경도 아닙니다. 가짜 문서라는 겁니다. 유다복음에 의하면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했습니다. 결국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셨고, 우리가 다 그 십자가를 통해 대속의 은총을 얻었으니 가룟 유다에게 배신의 책임을 물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이제는 그를 명예 회복해 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가룟 유다가 주님의 구속사역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사람입니까? 유다복음은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왜곡입니다. 가룟 유다의 존재나 배신행위가 주님의 구속사역에 꼭 필요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주님이 굳이 본문 24절에서 그렇게 말씀하실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주님은 가룟 유다 없이도 얼마든지 우리를 구원할 수 있었습니다. 어설픈 인간적 연민이나 문학적 상상력보다 주님의 평가가 냉정하고 확실합니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가룟 유다에 대한 주님의 평가입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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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가룟 유다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에 대해서는 자료가 많지 않습니다. 그가 어떤 경위로 주님의 제자가 되었고, 왜 그가 주님을 배신했는지도 확실치 않습니다. 학자들은 그가 열두 제자 가운데 최소 두 사람은 있다고 보는 열혈당원 중 한 명임은 확실하다고 합니다. 열혈당, 곧 젤롯당은 무력 봉기를 통해 외세를 몰아내고 나라의 주권을 회복하겠다는 호전적 극우파 민족주의자들입니다. 지금의 하마스 같은 사람들, 알카에다, 헤즈볼라 같은 사람들입니다. 이런 단체가 주님 시대로 말하면 젤롯당이나 시카리옷입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와 가나안인 시몬이 바로 열혈당 출신입니다. 누가복음 6장에 보면 가나안인 시몬은 확실히 열혈당원입니다. 그러므로 가룟 유다는 정치적 야심으로 주님께 접근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메시아가 오시면 정치적 독립을 통해 메시아 왕국을 이룰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그 기대를 주님께로 향한 겁니다. 그러다 보니 제자들끼리 예수님이 왕위에 오르시면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오를 것인가를 두고 싸웠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그들의 어머니가 예수님을 직접 찾아와 청탁하기까지 합니다. 즉 주님의 제자들까지도 주님을 정치적인 메시아로 생각했던 겁니다. 그런데 주님이 거사할 생각은 안 하고 자꾸만 딴 소리를 하는 겁니다. 2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리라 하시더라.” 12절도 보십시오.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 죽는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유다는 심한 배신감을 느낀 겁니다. 이 사람은 가짜 메시아인가보다 한 것입니다. 그 길로 대제사장을 찾아갑니다. 배신함으로 보복하는 겁니다. 본문 15절 이하입니다. “[15]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16] 그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주님에 대한 깊은 실망과 좌절을 배신으로 보복한 겁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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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3년간이나 주님을 따라다니며 주님의 인격과 삶을 보고 배운 제자가 어떻게 돈을 받고 스승을 팔 수 있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자꾸만 가룟 유다의 인간성을 의심하게 됩니다. 우선 그는 양심이 불량했습니다. 정직하지 않았습니다. 본문 20절 이하가 바로 최후의 만찬 장면입니다. 주님이 너희 중 한 사람이 나를 판다고 합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놀라 저마다 근심스런 표정으로 묻습니다. 저 입니까? 이때 가룟 유다는 떡 그릇에 손을 넣으며 딴전을 부립니다. 떡으로 자신의 입을 막으려한 것입니다. 주님이 가룟 유다의 속셈을 알아채고 지금 떡 그릇에 손 넣는 그가 나를 판다. 그러자 재빠르게 손을 빼면서 유다는 능청스레 묻습니다. 랍비여 저는 아니지요? 이미 가룟 유다가 대제사장을 찾아가 예수를 넘겨주겠다고 한 후 은 30을 받아 챙긴 후입니다. 주머니에서 은 30을 만지작대며 저는 아니지요? 하고 있는 겁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영혼만 아니라 인격도 양심도 새로워져야 하는데, 여전히 불량한 양심, 파산한 인격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은 결국 은 30에 주님을 팝니다. 시간문제입니다. 어떻게든 양심을 회복해야 합니다. 망가진 인격을 복원해야 합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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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그는 돈을 너무 밝혔습니다. 마태복음 26장 8절 이하를 보면, 향유를 주님 발에 쏟아 붓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나서서 분개하며 값비싼 향유를 왜 허비하냐고 꾸짖습니다. 요한복음 12장에서 그 장면을 보면, 가룟 유다가 차라리 향유를 팔아 300데나리온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지 아니하냐? 라고 합니다. 얼마나 계산이 빠릅니까? 척 보고서 300데나리온이라는 감정가를 내놓습니다. 또 얼마나 인도적입니까? 부어 없애버리지 않고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면 더 좋지 않겠느냐고 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유다를 꼬집기를, 가난한 사람을 생각한 게 아니라 돈에 욕심이 있어서 그렇다고 합니다. 가룟 유다는 평소에 돈궤를 맡던 사람입니다. 그 돈 가운데 조금씩 훔쳤다는 겁니다. 그래서 도적이라는 겁니다. 헌금 유용을 한 겁니다. 누가 하나 그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할 만큼 깜쪽 같이 했습니다. 제자들 가운데는 직업이 세리였던 사람도 있습니다. 마태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마태가 돈궤를 맡지 않고 가룟 유다가 관리했습니다. 평소에 신임을 얻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는 헌금을 유용했습니다. 그만큼 가룟 유다는 위선자였습니다. 주님이 네가 나를 팔리라 해도 제자들 가운데 그를 의심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만큼 그는 남몰래 살았던 사람입니다. 목사에게도 가장 문제가 되는 게 돈입니다. 스님이나 신부님은 무소유로 살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목사는 가족이 있기에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돈을 사랑하는 목사는 틀려먹은 겁니다. 돈을 사랑하면 반드시 망합니다. 숱한 목회자가 돈 때문에 망했습니다. 가룟 유다를 보십시오. 아무리 돈에 눈이 멀었다 해도 그렇지, 어떻게 3년간 한솥밥 먹으며 고락을 같이한 단돈 은 30에 팝니까? 은 30은 30데나리온이라는 말인데, 당시 노예 한 명의 값이 30데나리온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26장에 나오는 여인은 은 300이 넘는 향유를 예수님 발에 쏟아 부었습니다. 이 얼마나 대조적입니까? 그러니 가룟 유다가 나서서 왜 그 아까운 돈을 허비하느냐며 화내는 게 이해가 됩니다. 결국 가룟 유다는 자기가 사랑하던 돈 때문에 망했습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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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가룟 유다는 회개할 줄 몰랐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주님 모시는 제자라 할지라도 죄 안 짓고는 살 수 없는 인생입니다. 따라서 회개가 필요합니다. 누구나 그 어떤 죄라 해도 회개하면 사함을 받는다는 게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회개하지 못했습니다. 회개를 통해 죄를 청산하고 얼마든지 새 출발할 수 있었는데 결국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그의 가장 큰 불행입니다. 실수나 배신으로 말하면 베드로도 만만치 않습니다. 베드로는 3번이나 주님을 저주하고 배신합니다. 마태복음 26장 74절을 보십시오.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곧 닭이 울더라.” 이렇게 베드로는 주님을 3번이나 부인한 겁니다. 그럼에도 베드로와 가룟 유다의 차이는 베드로는 즉각 눈물로 회개하였지만, 가룟 유다는 끝까지 감추고 시침을 떼고 계속해서 거짓되게 살았습니다. 그에게도 얼마든지 회개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본문만 해도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할 때입니다.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실 때는 이미 주님이 다 아신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신속히 자복해야지요. ‘나와 함께 그릇에 손 넣는 자가 나를 판다’고 콕 찍어 말씀하실 때도 얼른 손을 빼며 버텼습니다. 반면에 베드로를 보십시오. 저 멀리서 닭소리가 들리자 ‘오늘밤 네가 3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한 말씀이 생각나 그 길로 회개합니다. 베드로는 닭소리만 듣고도 회개하는데, 가룟 유다는 콕 집어 줘도 회개하지 않습니다. 이게 둘의 차이입니다. 물론 본문 마지막에 보면 가룟 유다가 은 30을 대제사장에게 갖다 줍니다. 그러나 그는 끝내 목매 자살합니다. 회개란 양심의 가책이 아닙니다. 삶의 역전입니다. 가다가 이게 틀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면, 후회만 할 게 아니라 과감하게 유턴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심정적인 후회나 반성은 회개가 아닙니다. 뉘우쳤으면 즉각 일어나 아버지 집으로 가야 합니다. 여전히 앉아서 반성하며 울어본들 그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아버지 집으로 향해 가는 게 회개입니다. 가룟 유다는 뉘우치기는 했으나 그 이상의 변화된 삶은 없었습니다. 자살로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이쯤 되면 정말 주님의 말씀처럼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제게 좋을 뻔한 인생 아닙니까? 단테 신곡 지옥편에 보면 제일 아래에 가룟 유다가 혼자 앉아있습니다. 주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고 살았던 12사도 가운데 하나가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존재가 되어 지옥 아랫목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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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 paragraph:p0017 -->
<p class="p1">가룟 유다의 슬픈 얘기가 우리 신앙과 삶에 엄숙하고 진지한 교훈이 되기를 바랍니다.</p>
<!-- paragraph:p0018 -->
<p class="p1"><br></p>
<!-- paragraph:p0019 -->
<p class="p1"><b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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