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교회 아카이브

20140316m 그분만큼 외로운 이도 없었다(요 16:32-33)

20140316m

요 16:32-33

그분만큼 외로운 이도 없었다


[32]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구약 창세기 제 1장을 보면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며, 그때그때 자기 소감을 밝히는 말씀이 나옵니다. 첫째 날 빛을 창조하시고서는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둘째 날에는 궁창을 창조하시고 역시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셋째 날은 각종 식물을 창조하시고 역시 같은 말씀을 하셨고, 넷째 날은 하늘의 별과 달을 창조하셨고, 다섯째 날은 각종 동물을 창조하시고 후렴처럼 똑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 여섯째 날은 사람을 창조하시고는 역시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신 게 아닙니다. 2장 18절 말씀을 보면 뜻밖에도 좋지 않아 보였다고 했습니다. 성경은 그 이유를 사람이 혼자여서, 고독해 보여서 좋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돕는 베필을 지으리라고 하시며 하와를 창조하셔서 쌍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사람은 더불어 사는 존재라는 겁니다. 혼자 살면 너무 외롭다는 겁니다. 그래서 당장에 짝을 지어주신 겁니다. 그래서 사람은 짝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 가족, 이웃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아름답고 건강하게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존재론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것은 남녀가 함께 살기 전에는 혼자였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은 원래 고독한 존재였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사랑하게 하시고, 이웃이 되게 하셔서 더불어 살게 하셨다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함께 사는 행복 이전에 누구에게나 원초적인 고독이 있습니다. 우리는 다 절대 무에서 왔기에 원초적 허무감과 홀로 태어나고 살았기에 원초적인 고독도 있습니다. 특히 남자들은 하와가 없을 때의 그 고독 때문에 외로움을 많이 탑니다. 남자들은 몰래몰래 고독을 탑니다. 이 정서를 여자들은 잘 모릅니다. 아담과 하와를 보십시오. 부부로 하나가 되라고 했는데, 늘 각각 이었습니다. 사탄의 유혹도 하와가 홀로 당합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의 운명을 다르게 판단하십니다. 그래서 부부는 한 몸 같으나 각기 홀로라는 것입니다. 남녀가 사랑할 때는 그 고독이 다 극복된 것처럼 느껴지나, 제 정신이 돌아오면 자기가 홀로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낍니다. 창세기를 보면 범죄한 아담과 하와가 벗은 게 부끄러워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자기 몸을 가리고 하나님을 피해 숨었다고 합니다. 이 또한 인간의 숙명적인 고독을 말합니다. 결국 인간은 자기만의 비밀을 홀로 간직한 채 고독하게 삽니다. 누구도 내 인생을 대신 살 수 없고, 내 죽음을 대신 죽어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면 누구나 홀로 세상을 떠나야 합니다. 결정적인 순간에는 언제나 나 혼자입니다. 부부라 해도 결정적인 때는 나 혼자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생입니다. 여기에 실존적 허무와 고독이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서를 보면 주님도 참으로 외로우셨습니다. 역사를 통해 주님만큼 많은 찬사를 받은 이도 없지만 주님 만큼 고독한 이도 없었습니다. 곁에 제자들이 있고 구름처럼 사람들이 따라다녔다고 하지만 그들은 언제나 다른 세계에 있었습니다. 끝까지 제자들도 맹목적이었습니다. 주님이 안타까워 ‘너희가 어찌 이렇게도 믿음이 없고, 깨달음이 없고, 눈과 귀가 있어도 듣고 보지 못하느냐?’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주님은 홀로 십자가에 달려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절규합니다. 하나님마저도 자기를 버렸다는 겁니다. 고독의 극치입니다. 본문 32절을 보십시오.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십자가의 죽음이 성큼 현실로 다가왔습니다. 십자가가 코앞에 박두했습니다. 그때 주님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그러니까 지금이야말로 가장 위로가 필요할 때인데 다 주님을 버리고 제각기 달아나버리고 만 겁니다. 그 외로움, 비애감, 쓸쓸함이 얼마나 컸을까요? 바울도 그렇습니다. 바울은 좀처럼 자기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생애 마지막 편지인 디모데후서에서는 당시 자신의 외로운 심경을 감추지 않습니다. ‘데마, 디도도 다 나를 떠났다. 겨울이 가기 전에 디모데야 속히 좀 오라.’ 백발이 성성한데 겨울이 가까워 오는데 다 바울을 떠났습니다. 아무리 순교적 믿음으로 살던 바울이라 해도 그 뼛속까지 파고드는 고독을 감당하기 쉽지 않았을 겁니다. 믿음 좋다고 감기 안 걸립니까? 주님도 바울도 다 고독했습니다. 아주 최근에 발표된 미국교회 자료입니다. 미국 감리교회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한 건데, 그중 우울증 환자가 11.1%였습니다. 그 우울증이 어디서 왔다고 생각하느냐고 했더니, 8.7%가 외로움과 고독이라고 했습니다. 아무도 자기를 이해해 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 견딜 수 없는 고독감, 단절감에서 우울증이 왔다고 답했습니다. 믿는 사람은 참 외롭습니다. 연세 드신 분들은 더욱 말년이 쓸쓸합니다. 


그렇다면 이걸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세상 사람들은 술 마시고, 도박도 하고, 프로포폴도 맞는다고 하지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님은 어떻게 그 외로움과 절망감을 이기셨을까요? 우선 다 나를 떠나도 아버지는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으로 고독을 극복하셨습니다. 본문 32절 하반절입니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다 내게 등을 돌리고 나를 배신하고 버려도 하나님만큼은 여전히 나와 함께 계신다는 확신이 주님으로 하여금 그 무서운 고독을 이기게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에게 에워싸여 살아도, 하나님이 없으면 내 삶은 여전히 공허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내 주위 사람들이 나를 다 버린다 해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나는 더 이상 외롭지 않습니다. 사람은 누구도 마냥 나와 함께 있을 수 없습니다. 남편도, 아내도 자식도 친구도 다 나를 떠압니다. 단지 시한부로 내 곁에 머물 뿐입니다. 영원히 내 곁에 있어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내가 고아와 같이 너를 버려두지 않겠다.’ 이 사실에 대한 엄숙한 확신이 우리로 하여금 고독을 이기게 합니다. 가나안을 목전에 두고 모세가 갑자기 죽습니다. 당황한 사람은 모세의 부관 여호수아였습니다. 이제 자기가 진두지휘를 해야 합니다. 그러니 얼마나 두렵고 외로웠겠습니까? 그때 하나님은 그에게 ‘내가 너를 떠나지 않으며, 버리지 않겠다. 함께 있을테니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하라.’고 반복하십니다. 고독이란 결국 내가 혼자라는 소외감이기에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신다는 확신만 있으면 반드시 극복하고 치유될 수 있습니다. 부디 그런 믿음, 확신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반드시 고독을 이기게 하는 큰 힘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다음으로 주님은 기도하심으로 고독을 이기셨습니다. 본문이 33절로 끝나고 17장으로 이어지는데, 17장은 주님의 긴 기도문입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하면서 기도가 시작되어, 26절까지 기도가 계속됩니다. 주님은 외로우실 때 기도하셨습니다. 기도는 고독할 때 진지해집니다. 사람은 홀로 있을 때 정직해지기 때문입니다. 남 앞에서 기도하니까 치장하고 시를 쓰게 됩니다. 혼자 하나님 앞이면 적나라해집니다. 그 기도가 진짜 기도입니다. 홀로 골방에서 기도하면 누구나 하나님 앞에 벌거벗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도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아걸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고독이 바로 기도의 골방이란 뜻입니다. 주님도 40일간 광야에서 홀로 기도하셨고, 마지막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홀로 기도하셨고, 때마다 광야로 산으로 가서 홀로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기도로 외로움을 이기셨다는 것입니다. 고독하시면 주님처럼 기도하십시오. 고독은 씹으라고 있는 게 아니라 기도하라고 있는 겁니다. 기도란 주님과의 대화요 소통입니다. 기도하면 외롭지 않습니다. 친구 만나 대화하며 수선을 떨면 외로움이 가십니다. 기도는 독백이 아니라 주님과의 대화이기에 고독하지 않습니다. 연애시절을 생각해 보십시오. 언제나 만나고 싶고, 만나면 헤어지기 싫고, 어떤 화제도 마냥 즐겁고 행복합니다. 그렇게 기도는 주님과 나누는 사랑의 밀어이기에 행복하고 즐겁습니다. 연세 드신 어른들은 더 많이 기도하셔야 합니다. 자식들과는 대화하지 못해도 주님과 대화를 많이 하시면 얼마든지 외로움을 이기고 말년에 고독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습니다. 바울도 말년에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입니다. 감옥에서 기도하는 겁니다. ‘나와 함께 한 자가 다 나를 버렸으나,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마시고, 다만 주께서 내 곁에 계서 나로 강건케 하소서.’ 기도해야 외로움, 적막감, 단절감, 소외감을 이기고 자신을 강건케 지킬 수 있습니다. 기도가 처방이요 해답입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은 십자가의 길을 가심으로써 고독을 이기셨습니다. 요한복음 18장은 1절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건너편으로 나가시니 그 곳에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니라.” 기드론 시내 건너편 동산은 겟세마네입니다. 겟세마네 다음의 동산은 골고다입니다. 여러분, 이게 또한 고독을 이기는 적극적 방법입니다. 기드론 시내 건너 겟세마네로, 겟세마네에서 골고다로 아버지가 명하신 길을 열심히 가는 겁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고독이 차라리 사치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명하신 길, 사명, 달란트를 확실히 깨닫고 거기에 충실히 응답하며 사는 사람은 절대 고독이 두렵지 않습니다. 바울 같은 사람도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질주하느라 고독에 겨워 울 겨를이 없었습니다. 주님도 인간적으로 볼 때는 다시 없는 고독의 화신처럼 보이나 실은 고독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주의 길을 힘껏 가십시오. 기드론 시내를 건너 겟세마네로, 거기에서 골고다의 좁은 길로 나아가십시오. 주님도 그 길을 열심히 가심으로 고독에 발목 잡히지 않고 결국 십자가의 일을 다 이루셨습니다. 


주님은 고독을 아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고독을 깊이 공감하시는 분입니다. 본문 33절입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주님은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아심으로 이기셨고, 기도함과 열심히 십자가의 길을 가심으로 이기셨습니다. 고독을 이기고 세상을 이기는 데 오늘의 말씀이 큰 위로와 격려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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