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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20140309n 실패와 회복(마 26:6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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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20140309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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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마 26:69-75</p>
<!-- paragraph:p0003 -->
<p class="p1">실패와 회복</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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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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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69] 베드로가 바깥 뜰에 앉았더니 한 여종이 나아와 이르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70]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 [71] 앞문까지 나아가니 다른 여종이 그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되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매 [72]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73]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도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거늘 [74]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곧 닭이 울더라 [75]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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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수제자를 자처하던 베드로가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씩이나 주님을 부인하고 저주한 사건입니다. 베드로에겐 천추의 한이 된 사건입니다. 대체 베드로는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요?</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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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aragraph:p0009 -->
<p class="p1">우선 경솔했기 때문에 실패했다고 합니다. 주님이 잡히시던 날 저녁에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드시며 떡과 잔으로 성찬식을 제정하시고, 세족식까지 마친 후 제자들을 둘러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본문 앞 31절입니다.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대단히 진지하고도 심각한 경고요 예고입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대뜸 하는 말이 33절입니다.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이어지는 34절에서 더 구체적으로 경고하시는데도 베드로는 장담합니다. 35절입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누가복음 22장 33절에서 이 대목을 보면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고 합니다. 신앙생활은 누구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허세를 부리면 안 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 12절에서 ‘선 줄로 생각하거든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언제나 근신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베드로는 경솔했습니다. 그러다 결국 당한 겁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는 겁니다. 절대 큰소리 치거나 장담하며 할 일이 아닙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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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베드로는 졸다가 실패했습니다. 마태복음 26장 40-41절입니다. “[40]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38절을 보면 분명 주님이 그렇게 당부하십니다.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그럼에도 베드로는 자고 있습니다. 도대체 지금이 어떤 때입니까? 주님이 가장 위급한 상황입니다. 오죽하면 주님이 내 마음이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절박하고 기도가 절실한 때 나와 함께 깨어있어 기도하라고 하셨음에도 베드로는 잤습니다. 누가복음 22장을 보면, 주님은 이때 땀을 핏방울처럼 흘리며 기도했습니다. 그만큼 목숨을 걸고 기도한 겁니다. 그럼에도 베드로와 제자들은 팔자 좋게 잤습니다. 주님이 세 번씩이나 와서 깨웠지만 안 됐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라는 말씀은 깨어 기도하지 않으면 누구나 시험에 들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시험이 다 이것입니다. 베드로처럼 제자들처럼 이렇게 긴박한 순간에 졸거나 자면 누구든 시험에 빠집니다.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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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그렇다면 우리가 왜 끼어있지 못하고 잠에 떨어지게 될까요? 주님의 말씀을 보면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고 합니다. 믿는 사람 치고 깨어 기도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안 됩니다. 마음은 원인데 육신이 약해서 그렇습니다. 알람시계를 몇 개나 맞추고 자도 새벽이면 알뜰하게 다 끄고 잡니다. 정말 깨어있기를 원하고 기도하기를 바란다면 평소 자신의 생활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 밤늦도록 안 자는데 어떻게 새벽에 일어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육신을 가졌기에 그렇게 생활하고는 새벽에 일어날 수 없습니다. 최대한 자제하고 절제하며 살아야 육신의 약함을 이기고 깨어 기도할 수 있습니다. 유난히 새벽에 강한 사람은 없습니다. 여러분, 천하의 베드로도 별 수 없지 않습니까? 잠에 떨어졌고 무방비로 당했습니다. 약한 육신을 평소에 잘 관리하십시오. 그래서 깨어 조금이라도 더 기도하는 성도가 되십시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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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베드로는 주님을 좇되 멀찍이서 따라가서 실패했습니다. 마태복음 26장 58절 상반절입니다.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가서.” 주님 따르는 사람은 주님 뒤를 바짝 좇아 가야합니다. 멀찍이서 따라가다가는 주님을 놓칩니다. 길 잃은 양이 되고 맙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주님과의 거리를 좁히지 않을까요? 고의로 안전거리를 둘까요? 여차하면 달아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도 지금 그런 겁니다. 위험하다, 손해가 된다 싶으면 달아나려고 멀찍이서 좇아가고 있습니다. 주님을 좇는 일에는 안전거리가 필요 없습니다. 주님은 밀착거리로 따라가야 합니다. 부부든 연인이든 거리가 벌어지면 자꾸만 그 틈에 무언가 끼어듭니다. 결국 파국으로 이릅니다. 교회생활 오래했다는 사람들이 초신자들에게 교회 일에 너무 발을 깊이 들이지 말라고 합니다. 많은 걸 알면 다친다고 합니다. 그저 멀찍이서 따라가라고 합니다. 이렇게 충고합니다. 약은 처신이 절대 옳거나 바람직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신앙생활하는 사람은 항상 그 자리거나 지리멸렬해서 도태되고 맙니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사람을 주님은 싫어합니다. 베드로의 안전거리를 생각하며 좀 더 주님과의 거리를 당기십시오. 그래야 복된 삶이 되고 실패를 줄이는 신앙생활이 도비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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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베드로는 하인들과 함께 앉았다가 실패했습니다. 마태복음 26장 58절 하반절입니다. “그 결말을 보려고 안에 들어가 하인들과 함께 앉아 있더라.” 베드로가 주님께 온갖 모욕을 다 하는 현장에 하인들과 자리 잡고 앉았습니다. 시편 1편은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과 함께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오만한 악인들과 함께 앉아 불을 쬐고 있습니다. 성도는 구별된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성도는 세상에 살지만 세상과 타협하면 안 됩니다.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에 속하지만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게 성도의 삶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세상 사람과 함께 앉아 있습니다. 세상 문화에 동화되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현주소를 확인해야 합니다. 지금 내가 주님 곁에 있는가? 세상 사람 곁에 있는가? 세상 사람 곁에 앉아서 주님을 곁눈질로 확인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합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바로 그 자리에서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저주합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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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그러면 베드로는 그 실패를 어떻게 극복했습니까? 사실 이것은 베드로의 위대한 점입니다. 우리는 육신적 한계로 자칫하면 시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특히 베드로는 정서가 다혈질이라 실패와 실수가 잦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럴 때마다 놀라운 영적 순발력을 발휘했습니다. 그는 먼저 주님의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75절 상반절입니다.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주님의 말씀을 그 위기의 순간에 쿙케 기억해 낸 겁니다. 언제나 주님의 말씀을 생각하는 사람은 망하지 않습니다. 깊은 나락으로 떨어졌던 베드로는 닭소리와 함께 주님의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제정신을 차린 겁니다. 우리는 설교를 듣고도 못 깨닫는데 베드로는 미물 닭소리를 듣고도 주님의 말씀을 생각해 냈습니다. 유럽에는 교회 첨탑에 십자가는 없어도 닭 모양만 있는 게 많습니다. 다음으로 베드로는 이렇게 합니다. 75절 하반절입니다.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눈물로 회개했습니다.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저주한 베드로나, 주님을 은 30에 판 가룟 유다나 큰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둘 사이에 건널 수 없는 큰 차이는 이것입니다. 베드로는 회개한 반면에 가룟 유다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 끝까지 자살했습니다. 이게 두 사람의 차이입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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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베드로에게서 영적 순발력을 배웁시다. 그래서 비록 실패했을지라도 말씀을 생각하며 지체하지 않고 통회함으로 용서함을 얻고 본래 지위를 회복하는 복된 성도, 복된 푸른교회 남선교회 회원이 되시길 바랍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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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b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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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b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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