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302m 이것까지 참으라!(눅 22:4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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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02m
눅 22:47-53
이것까지 참으라!
[47] 말씀하실 때에 한 무리가 오는데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라 하는 자가 그들을 앞장서 와서 [48] 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하시니 [49] 그의 주위 사람들이 그 된 일을 보고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칼로 치리이까 하고 [50] 그 중의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오른쪽 귀를 떨어뜨린지라 [51] 예수께서 일러 이르시되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 [52] 예수께서 그 잡으러 온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경비대장들과 장로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왔느냐 [53]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의 권세로다 하시더라
어제가 삼일절 95주기였습니다. 해마다 삼일절이 되면 잊을 수 없는 교회가 있습니다. 제암리교회입니다. 그때는 수원 제암리교회였는데, 지금은 화성시입니다. 수원에서 서해쪽으로 20km떨어진 작은 마을인데, 옛 지명은 두렁바위입니다. 제암리교회는 일제에 의해 강제 폐쇄조치되었기에 주일에도 예배를 드릴 수 없었습니다. 3.1운동 한 달 후 주재소에서 예배드려도 된다는 통보가 왔습니다. 목사님이 반신반의하며 교회 문을 열고 청소도 하고 성도들에게 공지도 했습니다. 주일이 되어 약 30가정의 성도들이 아이들까지 다 모였습니다. 기록에 보면 울며 찬송을 불렀다고 합니다. 목사님이 설교를 하고 축도까지 마쳤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일본 순사와 헌병이 닥쳐서 예배당 문을 바깥에서 잠그고 석유를 뿌리고 불을 붙였습니다. 순식간에 제암리교회가 불에 휩싸입니다. 당황한 교인들이 창을 부수고 어린 아이들부터 내보냈는데, 바깥에 대기하던 헌병이 가차 없이 죽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몽땅 다 죽었습니다. 이게 1919년 4월 15일에 있었던 참사입니다. 3.1 운동 때 일제가 유독 기독교를 탄압하고 박해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일제는 적어도 3.1 운동의 주동세력이 교회요 기독교란 사실을 확신했습니다. 민족 대표 33인 가운데 16인이 목사와 장로였습니다. 교회가 3.1 운동의 진원지였습니다. 그래서 3.1 운동의 핵심세력에 대한 보복과 응징이 바로 교회 박해였습니다. 3.1 운동이 95년이 지나 100년이 가까워오는데도 일본은 여전히 온갖 망언과 만행을 다하고 있습니다. 사과나 보상은커녕 변명과 부정, 발뺌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본뿐 아닙니다. 북한도 있습니다. 일본은 그래도 남입니다. 북한은 우리의 형제입니다. 이번에 남북이산가족이 두 차례나 재회했습니다. 그런데 북한은 남북 이산가족이 금강산에 만나 울고 있던 그 시간에 동해에서 도발했습니다. 탄도미사일을 4발이나 발사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해법이 무엇입니까? 성경은 무엇이라고 가르칩니까?
본문은 주님이 체포되시는 장면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던 주님께 운명의 시간은 다가왔습니다. 유다를 앞세워 대제사장의 종들이 검과 몽치를 잡은 채 주님께 왔습니다. 유다가 배신의 키스를 하자, 마치 강도를 잡듯이 체포했습니다. 자다 놀라 깬 제자들은 속수무책이었습니다. 다행히 베드로는 순발력있게 차고 있던 칼을 빼서 휘둘렀습니다.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떨어뜨렸습니다. 베드로의 이 행동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누구도 베드로의 행동을 틀렸다고 할 수 없습니다. 죄 없는 스승을 지키고자한 것입니다. 무고한 자의 실존적 저항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베드로를 향해 ‘이것까지 참으라’(51절)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떨어진 말고의 귀를 만져 낫게 해주셨습니다. 이것까지 참으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정당방위까지 참으라는 겁니다. 스승을 위한 충정의 칼까지 참으라는 겁니다. 흔히 우리는 다 참아도 이것만큼은 못 참겠다며 칼을 휘두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것까지도 참으라고 하십니다. 이 장면을 요한복음 18장에서는 이렇게 묘사합니다. “[10] 이에 시몬 베드로가 칼을 가졌는데 그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11]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마태복음 26장은 이렇습니다. “[51]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의 하나가 손을 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52]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참으로 주님은 못 말리는 분입니다. 사실 이래서 주님 따르기가 어렵습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제자들마저도 더는 주님을 따를 수 없다며 다 달아난 겁니다. 정당방위는 자기를 지킬 수 있는 최후의 보루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그것도 허용하지 않습니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고 하십니다. 너무 이상적이고 감상적이며 비현실적입니까? 주님이 너무 순진하십니까? 산상보훈을 보십시오. 주옥같습니다. 처음에는 너무도 아름답고 그렇게도 달콤할 수 없습니다. 그러다가 점점 격렬해지면서 보복하지 말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합니다. 이쯤 되면 네 목숨을 내게 다오 하는 것과 같기에 다 산상보훈을 떠납니다. 그러나 주님은 끝까지 그 길을 홀로 가십니다. 오히려 주님은 그들의 사죄를 비셨습니다. 따라서 칼을 칼집에 꽂으라는 것은 궤변이나 사변이 아니라 주님의 생애요 존재 자체였습니다.
우리가 왜 칼을 도로 칼집에 꽂아야 합니까? 마태복음 26장 52절에 ‘칼을 쓰는 사람은 반드시 칼로 망하기’ 때문입니다. 나를 지키겠다고 칼을 쓰는데 왜 망합니까? 이게 바로 칼의 비극입니다. 칼의 악순환입니다. 칼은 칼집에 꽂혀 있을 때 칼입니다. 칼이 칼집에서 나오면 호박이라도 찔러야 합니다. 칼을 한 번 뽑으면 칼을 칼집에 꽂지 못합니다. 그 칼에 당한 사람의 보복이 두려워서입니다. 여러분, 주님은 이것까지 참으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칼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입니다. 베드로가 쳐서 떨어뜨린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다시 붙이시면서 베드로가 칼을 쓰기 전의 상태로 돌린 겁니다. 보복은 절대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는 겁니다. 주님의 말씀의 뜻을 깊이 새겨야 합니다. 칼은 칼을 부르고, 피는 피를, 이는 이를, 눈은 눈을 부릅니다.
그럼에도 우리나라나 중국, 일본은 전통적으로 복수를 미화합니다. 복수하는 사람을 영웅시합니다. 사극이 다 그렇습니다. 복수전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절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복수를 반대합니다. 특히 주님은 보복을 금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중무장을 해도 나를 지킬 수 없는 세상에서 정당방위마저도 포기한 채 무사히 살아갈 수 있느냐는 겁니다. 이래서 예수 믿는다는 게 어렵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 뒤를 따르는 겁니다. 세상에서 주님보다 더 억울하고, 주님의 십자가보다 더 황당한 사건이 있습니까? 주님은 그 십자가 아래서 옷을 놓고 제비뽑고 있는 사람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이것까지 참으라 칼을 칼집에 도로 꽂으라’고 한 것도 칼 앞에 당신의 목숨을 내대며 하신 말씀입니다. 편안할 때, 문제가 없을 때는 무슨 얘기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대가 나를 죽이려고 칼을 빼들고 있을 때는 못합니다. 베드로가 휘두른 칼에 종이 다치자 그 와중에도 기어이 귀를 회복하며 칼 휘두르기 이전의 상황으로 돌려놓는 것을 보십시오.
내가 응징하겠다고 나서면 너도 나도 다 죽습니다. 그러나 그 보복을 하나님께 맡기면 궁극적인 승리를 내게 안기십니다. 그렇게도 무력하게 억울하게 십자가를 지신 주님은 부활하십니다. 빌라도도 죽고, 로마도 망했지만,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정말 이기고 싶으면 이것까지도 참아야 합니다.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라는 보복논리를 단호히 배격해야 합니다. 원수를 사랑해야 합니다. 목숨을 내던져 지킨 그 역설의 진리를 내 삶 속에서 실천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승리의 영광을 누리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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