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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20140202m 저편으로 건너가자(막 4:3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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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20140202m</p>
<!-- paragraph:p0002 -->
<p class="p1">막 4:35-41</p>
<!-- paragraph:p0003 -->
<p class="p1">저편으로 건너가자</p>
<!-- paragraph:p0004 -->
<p class="p2"><br></p>
<!-- paragraph:p0005 -->
<p class="p1">[35]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36] 그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37]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38]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3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40]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41]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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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 paragraph:p0007 -->
<p class="p1">어떤 분들은 예수를 믿으면 삶에 풍랑이 없다고 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것은 틀린 말입니다. 역설적으로 오히려 풍랑이 더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전에는 내가 세상 편이었기에 세상이 나를 안 건드렸지만, 이제는 주님 편이기에 세상이 기회만 있으면 나를 괴롭히고 건드립니다. 이게 예수 믿기 전보다 예수를 믿은 후에 오히려 고난이 더 많은 이유입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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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 paragraph:p0009 -->
<p class="p1">본문을 보십시오. 35절입니다.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그래서 제자들이 주님을 모시고 갈릴리 바다 저편으로 건너가고 있는 중인데, 주님을 모시고, 주님과 함께 가는 뱃길인데도 큰 풍랑을 만났다는 겁니다. 우리의 상식과 맞지 않습니다. 주님과 함께라면 풍랑이 일다가도 멈춰야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태가 점점 더 악화됩니다. 이것을 사람들이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실망하고 좌절하고 시험에 듭니다. 만사형통을 기대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더라는 겁니다. 기독교도 별 수 없더라는 겁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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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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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마가복음 6장에 가면 또 한 차례 제자들이 풍랑을 만납니다. 6장 45절입니다.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 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여기서 &lt;즉시&gt;는 어느 때입니까? 마가복음 6장은 오병이어 기적이 나오는 곳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직후에 제자들로 하여금 바다 건너편을 항해하게 하셨는데, 가다가 그만 가공할 풍랑을 만난 겁니다. 아직 주님이 행하신 초자연적 기적의 감격과 흥분이 채 가시기도 전인데 다시 엄청난 시련의 풍랑이 제자들을 덮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라 해서 늘 기적만 있는 게 아닙니다. 늘 배불리 먹고 12바구니나 남는 넉넉함만 있는 게 아닙니다. 기적이다 싶은데 곧바로 혹독한 고난이 닥칩니다. 현실로 말하면 오히려 그런 역풍을 만나 고통당하는 날이 평안한 날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6장 역시도 주님이 명령하신 뱃길인데 엄청난 풍랑을 당합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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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 paragraph:p0013 -->
<p class="p1">더구나 오늘 본문은 그 배에 주님이 타고 계셨습니다. 얼마나 풍랑이 위협적이었던지 제자들은 우리가 다 죽게 되었다고 합니다. 실제 갈릴리 바다는 거칠다고 합니다. 노련한 어부들도 조심한다고 합니다. 갈릴리 북쪽에는 헬몬산이 있습니다. 그 산꼭대기에서 찬바람이 만들어져 갈릴리 바다로 불어내리면 갈릴리의 따뜻한 공기와 만나 거친 풍랑이 발생한다고 합니다. 실제 우리 삶과 비슷합니다. 예수 믿으면 풍랑이 없다는 말에 속지 마십시오. 예수를 믿어도 풍랑을 만납니다. 오병이어라는 초대형 기적 직후에도 살인적인 풍랑을 만납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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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 paragraph:p0015 -->
<p class="p1">그런데 더욱 이상한 것은 제자들은 풍랑을 만나 안절부절 못하며 사투를 벌이고 있는데, 그 시각 주님은 배 고물에서, 즉 선미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처음에는 제자들이 자기들끼리만 고군분투했는데, 이윽고 주님을 깨웁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주님께 대한 원망이 서려있습니다. 우리가 다 죽게 된 판에 잠이 오냐는 겁니다. 그제서야 일어난 주님이 일단 바람을 꾸짖으시고 파도를 잠재우십니다. 그랬더니 순식간에 바람이 그치고 파도가 잠잠해졌습니다. 주무시는 주님을 깨우니까 그 즉시 상황이 종료됩니다. 주님 말씀 한마디에 미친 듯 위협하던 풍랑이 당장에 평정됩니다. 주님은 자연도, 환경도 통제하는 분입니다. 우주를 창조하신 주님은 무엇이든 임의대로 행하실 수 있습니다. 파도도 바람도 그야말로 고요해졌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얼마나 신속하게 주님을 깨우느냐 입니다. 어떤 이는 풍랑을 만나면 즉시 주님을 깨워서 거기서 벗어납니다. 어떤 이는 주님을 깨우지 않고 막판에 깨워 상처뿐인 구원을 얻습니다. 본문의 제자들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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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aragraph:p0017 -->
<p class="p1">일단 주님은 풍랑을 잠재운 후 제자들을 책망합니다. 40절입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마태복음 8장에도 이 사건이 소개되는데, 거기에는 풍랑보다 제자들을 먼저 책망하십니다. 풍랑을 만나 사투를 벌인 제자들에게 왜 이토록 질책하십니까? 주님은 우리가 깨울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우리 앞에 어떤 위기가 닥치더라도 주님은 우리가 배고물로 달려다 깨우기를 기다립니다. 시편 3편에 보면, 다윗이 다급히 주님을 깨웁니다.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시편 3편은 압살롬의 반역을 피해 도망가며 피눈물로 바친 기도입니다. 다윗은 순발력 있게 하나님을 깨웁니다. 주님은 어느 때든 우리가 깨우기만 하면 즉각 일어나십니다. 사실은 주님은 주무시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피곤하기에 하루의 반은 자야하지만, 하나님은 주무시지 않습니다. 주무시는 척하면서 우리가 깨울 때까지 지켜보십니다. 마태복음 6장에는 주님이 홀로 산 위에서 기도하고 계셨는데도 거기서 제자들이 풍랑과 사투를 벌이는 것을 다 보고 계셨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다윗처럼 구원을 호소하기 전에는 우리 일에 개입하지 않으십니다. 간절히 우리가 당신을 깨워주기만을 기다리십니다. 제자들도 보십시오. 처음에는 제 힘으로 그 풍랑을 이기려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다 어부출신이어서 그 갈릴리 바다에 익숙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자기들 재주와 힘으로 풍랑과 맞서 싸웠습니다. 그러나 백약이 무효였습니다. 그제서야 제자들이 주님을 깨웠습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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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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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왜 제자들이 주님을 좀 더 일찍 깨우지 못했을까요? 제자들이 주님에 대한 신뢰가 약했기 때문입니다. 주님 지적대로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본문 41절입니다.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주님을 모시고 항해하면서 주님이 어떤 분이신 줄 제자들은 몰랐습니다. 주님에 대해 새삼 놀라고 두려워했다는 겁니다. 주님이 안타까워하시며 제자들의 믿음을 책망하는 겁니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배에 타고 계십니다. 우리 운명의 배에 함께 타고 계십니다. 주님은 여전히 배 고물에서 주무시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주님의 존재가 눈에 잘 안 띄는 이유는 우리가 풍랑만 바라보며 두려워 떨고 있기 때문입니다. 풍랑에 가려 주님이 우리 눈에 잘 안 들어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잊고 살아갑니다. 담대하게 주님을 깨워야 합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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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 paragraph:p0021 -->
<p class="p1">바다 저 편으로 건너가는 인생 항해란 나의 노력이나 기술로 가능한 게 아니라 주님에 대한 깊은 신뢰와 믿음이 있어야 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인생 항해는 배 젓는 기술이 아니라 믿음으로 하는 겁니다. 주님이 믿음이 없다고 책망하셨지 제자들에게 기술이 없느냐고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풍랑을 만나면 우리 운명의 배에 타고 계신 주님을 즉각 깨우는 겁니다. </p>
<!-- paragraph:p0022 -->
<p class="p2"><br></p>
<!-- paragraph:p0023 -->
<p class="p1">지금은 통독이 되어 독일 수도가 베를린이었습니다만, 그 전에는 독일 중부의 작은 도시 본(Bonn)이 행정수도였습니다. 제가 독일에 있을 당시 본의 인구가 20만이었습니다. 본 대학의 학생은 3만 5천이었습니다. 본의 중심가에는 베토벤 광장이 있었고, 거기 한복판에 베토벤 동상이 있었습니다. 그 광장 뒷골목으로 들어가면 베토벤 생가가 있습니다. 베토벤 하우스는 초라합니다. 그 안에는 베토벤이 쓰던 피아노, 작곡 노트, 일기, 소박한 생활 집기가 잘 진열되어 있습니다. 베토벤은 잘 아시는대로 참으로 불행하게 태어났습니다. 부친은 알콜중독자에 매독환자였습니다. 어머니는 폐결핵 환자였습니다. 아들만 넷이었는데 첫째는 일찍 죽고, 나머지 세 아들이 다 폐결핵 환자였습니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그 어머니가 다섯 번째 아기를 임신한 겁니다. 아버지가 중증 매독환자요 어머니가 폐결핵 3기였으니 아기가 제대로 될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유산시키려고 온갖 민간요법을 다 했으나, 실패하고 낳은 아기가 바로 베토벤입니다. 베토벤은 예상대로 어려서부터 날마다 병치레를 하고, 청각장애아였고, 30대 중반에는 청각을 잃었습니다. 제5번 교향곡 운명을 작곡하여 초연을 하던 날, 베토벤은 일기를 씁니다. ‘내 운명의 항해사는 오직 주님이십니다. 내 기구한 운명을 이끄실 이는 주님이십니다. 주님, 내 운명을 위협하는 저 잔인한 풍랑을 잠재워 주소서.’ 운명의 1장은 폭풍입니다. 물론 2장은 평온이 회복됩니다. 2014년 올해, 본문 말씀처럼, 베토벤의 고백처럼 우리의 운명에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따라서 풍랑이 일면 배 고물로 달려가 주무시는 주님을 깨우십시오. 올 한 해 인생 항해가 베토벤 교향곡 제5번의 2악장처럼 평온하고 복 되기를 빕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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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br></p>
<!-- paragraph:p0025 -->
<p class="p1"> </p>
<!-- paragraph:p0026 --><span class="archive-media-placeholder"><a href="https://www.youtube.com/embed/jQ_txUWvVtQ" title="미디어 원본"></a></spa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