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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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의 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다형(茶兄) 김현승(1913-1975)은 유난히 가을과 커피를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가을을 소재로 한 시들이 많고, 또 평생 커피를 즐긴 지독한 애호가였습니다. 그의 호가 <다형>인 것도 그에게는 차<茶>가 곧 커피라는 뜻에 다름 아닙니다. 올해가 그 다형 김현승의 탄생 100주기가 되는 해입니다.
가을에는 / 기도하게 하소서 /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 가을에는 / 사랑하게 하소서 /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 가을에는 / 호올로 있게 하소서 / 나의 영혼 / 굽이치는 바다와 /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 같이
김현승은 1913년 평양에서 출생했습니다. 그의 부친 김창국은 원래 전북 출신이었으나 평양으로 유학을 가 숭실중학교를 거쳐 현 장로회신학대학의 전신인 평양신학교에서 목사 수업을 받던 중 6남매의 둘째인 김현승을 낳았습니다. 그가 4세가 되던 해 부친은 신학을 마치고 목사안수를 받은 후 제주도의 성내교회를 거쳐 7세 때는 광주광역시의 양림교회로 임지를 옮기면서 미션스쿨인 숭일학교 초등과를 다니게 됩니다. 그 후 김현승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형 김현창과 함께 평양으로가 숭실중학교를 졸업하고 1932년에는 다시 숭실전문학교 문과에 진학합니다. 당시 숭실전문학교에는 양주동, 이효석 등이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는데 특히 양주동은 김현승의 뛰어난 감수성과 재능을 인정하여 그의 시를 동아일보에 적극 추천해 1934년 5월 25일자 동아일보 문화란에 그의 시가 2편이나 발표되면서 단 번에 그의 이름이 문단에 오르게 됩니다. 그의 시가 지상에 발표되자 정지용, 김기림, 이태준 등의 선배 시인들이 즉각 편지를 보내 그를 격려할 만큼 반향이 컸습니다. 졸업 후 그는 부모님이 계시는 광주로 돌아와 모교인 숭일중학에서 교편을 잡는 한 편 왕성한 시작활동을 벌이는데, 1938년에는 돌연 절필을 선언하기도 합니다. 부친이 목회하던 양림교회가 신사참배 거부로 큰 시련을 당하면서 그 자신은 물론 부친과 누이동생, 다수의 교회 청년들까지 연행되어 모진 물고문과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결국 누이동생이 사망했고 석방된 후에도 교사직을 박탈당하는 등 고통을 겪다 더 이상 일본어로 작품을 쓸 수 없다며 붓을 내던진 것입니다.
한 편 그는 양림교회 장로의 딸이자 당시 수피아여고 음악교사였던 장은순과 결혼합니다. 그리고 해방이 되면서 1946년에는 숭일중학교 교감으로, 1951년에는 조선대학교 문학부 교수로 임용되는데 이는 그동안 출강하던 김기림 시인이 납북되어 그 자리가 비어있었기 때문에 그의 뒤를 이어 강의를 맡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1960년부터는 다시 숭전대로 옮겨 재직합니다. 그는 평생 아무런 파당이나 기타 그 어떤 문학 단체에도 가담하지 않은 시인으로도 유명합니다. 1975년 4월 11일 다소 이른 6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다형. 그것도 숭전대학교 채플시간에 기도를 하다 뇌출혈로 쓰러져 영영 소천한 것입니다. 부친과 아들은 목사였고 그 또한 장로였기에 누구보다도 영예로운 죽음을 맞았다고 봐야 옳을 것입니다.
사실 한국 시문학사에서 김현승 만큼 지성적이고 고독했던 시인도 없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가 커피를 너무 즐겨 건강을 해쳤다고도 하지만 정작 본인이 그런 말을 듣는다면 펄쩍 뛸게 뻔합니다. 올 봄호 <대산문화>에 기고한 그의 막내딸 순배(피아니스트)씨의 글을 보면 <원통의 양철통 속의 원두커피는 아버지가 늘 가장 소중하게 여기신 보물이었다>고 회고하며 아버지의 서재는 언제나 커피향으로 가득 차 있었다고 전합니다.
따뜻한 커피 한 잔이 그리운 이 11월 늦가을, 다형의 시 한 편이 찬 가을비에 젖은 우리의 가슴을 진한 커피향처럼 부드럽게 감싸주길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