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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20131117n 역설의 감사(고후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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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20131117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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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고후 1:3-11</p>
<!-- paragraph:p0003 -->
<p class="p1">역설의 감사</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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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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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3]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6]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7]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10]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11]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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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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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본문은 3절에서 “찬송하리로다”로 시작합니다. 11절 하반절도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로 끝납니다. 본문은 찬송에서 감사로 끝나는 겁니다. 바울은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할 지라도 찬송과 감사할 수 있다고 합니다. 어째서 바울은 이런 역설적 감사를 주장할 수 있을까요? 보통은 일이 잘 되거나 형통할 때 감사하는 게 상식인데 말입니다. 바울은 무슨 근거로 이렇게 주장할까요?</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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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우선 환난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한 위로를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위로라는 말이 매 절마다 나옵니다. 많은 사람이 환난 중에, 고난 중에, 시험 중에 하나님을 만납니다. 환난 가운데 하나님의 각별한 위로를 체험합니다. 우리 믿는 자들에게는 환난이 환난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환난이 마침내는 복이 되고 위로와 격려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환난 중에도 감사하는 게 맞고, 그럴 수 있습니다. 사업에 실패하고 마음에 상처를 입고 고통당할 때, 주님은 나를 찾아오십니다. 나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가지십니다. 3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바울이 하나님을 이렇게 부릅니다. “자비의 아버지,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환난 당할 때 우리 가까이에 다가오십니다. 설교가 스펄젼은 몸이 약해 늘 병상생활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수시로 찾아와 그를 위로했습니다. 그때 스펄젼은 ‘고통보다 주님이 더 가까이 계신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만큼 제가 고통스럽지 않습니다.’ 라고 대답했스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성도에게 어떤 고난이 발생하면, 시련이 닥치면, 그 시간부로 성령은 비상체제에 돌입합니다. 더 큰 관심으로 성도를 돌보고 지킵니다. 그래서 어떤 고난의 장이라 할지라도 성도는 고아가 아닙니다. 나의 아픈 상황보다 성령이 더 가까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나와 함께 있어 주시고, 아파해 주시고, 울어주십니다. 바울이 고백하기를, 몰라서 그렇지 우리가 연약할 때가 실은 가장 강할 때라고 합니다. 내가 시험에 처할 때, 고난당할 때 가장 강하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역설입니다. 여러분, 환난 중에도 위로의 주님을 만나십시오. 그러면 그 환난이 불행이 아니라 내게 다시없는 은혜와 복이 됩니다. 바울은 그랬습니다. 본문을 보시면 환난, 고난이라는 말이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집니다. 그러나 그 환난 중에 진심으로 주님의 성호를 찬양할 수 있었던 이유는 환난 중에 남다른 주님의 위로와 격려를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환난 중에 주님의 은혜를 체험하십시오. 그야말로 역설적인 감사, 전천후의 찬양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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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 paragraph:p0011 -->
<p class="p1">다음은 환난을 통해서 고난당하는 이웃을 이해할 수 있기에 감사해야 옳다고 합니다. 본문 4절 하반절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얼마나 정확한 말씀입니까? 환난을 겪어본 사람만 지금 고난당하고 있는 사람들의 애로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환난을 통해 하나님의 위로를 체험해본 사람만이 환난 가운데 있는 이웃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환난은 사람을 성숙하게 하고, 더욱 인간미가 넘치게 합니다. 주님이 우리의 진정한 위로자가 되는 필연적인 이유는 주님 자신이 짧은 생애 가운데 친히 많은 환난과 상처를 받은 분이시기에 그렇습니다. 주님은 멸시, 천대, 모욕, 배신의 극한까지 가신 분이기에 우리의 모든 아픔, 절망을 가장 잘 아시고, 우리의 모든 고난을 가장 깊이 이해하는 분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진정한 우리의 위로자가 되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고난을 겪어봐야 비로소 주님처럼 고난당하는 이웃을 이해할 수 있고, 그들을 위로하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환난이 올 때, 시련이 닥칠 때, 고난 중에 있는 이웃을 생각하십시오. 그들을 더 깊이 이해하시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지금 나의 환난이 가이없는 주님의 은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주변의 고난당하는 이웃을 더 많이 이해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나를 고난 중에 두신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 자신만을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웃을 위해 기도하며 사는 제사장들입니다. 주님이 내게 환난을 주실 때 그 환난을 아파하기보다는 지금도 내 주변에 고난당하는 이웃을 더 깊이 이해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시길 기원합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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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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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환난은 나로 하여금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는 복입니다. 그래서 환난당할 때 충분히 감사할 수 있습니다. 9절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우리로 하여금 환난을 겪게 하시는 주님의 깊은 뜻이 여기에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든 자기나 세상을 의지하지 말고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환난은 은혜요 복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환난 중에도 하나님의 성호를 찬양하며 감사할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당시 바울을 비롯한 일행이 당한 환난이 얼마나 처절하고 극심했으면 사형선고를 받았다고 했겠습니까? 실제 바울은 어떤 때는 돌에 맞아 혼절했습니다. 사람들이 바울이 죽었다고 갖다 버렸습니다. 그런 처절하고 절망적인 고난을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요 복이라고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주님만 의지하게 하려는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현실에서 당하는 시련을 이렇게만 믿음으로 수용할 수 있다면 그 어떤 고난도 다 무색해질 것입니다. 고난이 우리에게 결코 위해를 가하지 못할 것입니다. 다윗의 경우를 보십시오. 사울에게 쫓겨 다니며 늘 생명의 위협을 느낄 때는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았습니다. 수많은 찬양과 시를 썼습니다. 그런데 편안히 궁중생활을 했을 때는 한 편도 못 썼습니다. 그만큼 기도생활 못하고 찬양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밧세바 사건 이후 다윗은 비로소 참회와 탄원의 시를 쓰기 시작합니다. 다윗은 이 사건을 통해 다시 살아난 겁니다. 그러므로 고난, 시험, 시련은 우리에게 불행만은 아닙니다. 잘 아는 록펠러는 33세에 이미 백만장자가 되었습니다. 43세에 미국 최고 갑부가 되었고, 53세에 드디어 세계 최고의 부호가 됩니다. 그에게는 치명적인 병이 있었습니다. 머리가 빠지고 눈썹이 빠지며 하루하루 몸이 바짝 마르는 병입니다. 어느 날 주치의 6명이 모여 소견을 냈습니다. ‘당신은 1년밖에 못 삽니다. 죽음을 준비하십시오.’ 저녁 6시부터 록펠러는 침대에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게 조금만 더 죽음을 연장해 주십시오. 저는 아직 열심히 세상을 사느라 주님 만날 준비가 안 되어있습니다. 좀 더 주님 뜻에 합당한 좋은 일을 하고 죽을 수 있도록 말미를 달라고 했습니다. 밤이 새도록 기도하면서 새벽을 맞았습니다. 그날부터 록펠러의 인생이 변합니다. 제일 먼저 한 게 맨해튼에 있는 리버사이드 교회를 짓습니다. 록펠러 재단을 만듭니다. 그런데 건강이 갈수록 좋아졌습니다. 일체 약을 다 끊었는데 건강이 회복되기 시작합니다. 본인도 주변인도 다 그렇게 보았습니다. 록펠러는 신이 나서 더욱 신앙생활을 잘 했습니다. 의사가 54세를 못 넘긴다고 했는데, 98세까지 삽니다. 주님이 때로 사형선고를 내리는 것은 전적으로 주님만 바라보라는 계시입니다. 그래서 그런 극단한 고난도 은혜입니다. 절망적일 때 오직 하나님만을 붙잡고 늘어지면 그 사람은 생애 최대의 은혜를 얻습니다. 고난이 올 때 이것은 주님만을 바라보라는 계시라고 생각하고, 더욱 하나님께 다가가십시오. 그러면 그렇게 믿는 믿음 그대로 일생일대의 은혜가 될 줄 믿습니다. 위대한 신앙의 선배들은 그렇게 최대의 위기를 최대의 복으로 바꾸었습니다. 바울도 마찬가집니다. 그래서 환난 중에도, 시련과 시험 중에도, 절망 가운데도 우리는 얼마든지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하며 주님의 성호를 높일 수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바울의 확신이요 간증입니다. 바울의 전천후적 감사와 찬양이 여러분께 은혜와 도전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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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b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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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b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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