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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27m 하나님의 나라(막 1:14-15)

20131027m

막 1:14-15

하나님의 나라


[14]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1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오늘은 종교개혁 496돌 기념주일입니다. 주님이 공생애를 3년간 사셨는데, 3년간 동분서주하며 복음을 외친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일까요? 본문 15절을 다시 보십시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이것이 주님의 공생애 제1성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사도행전 1장 3절을 보겠습니다.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이 땅에 40일간 계셨는데, 그 동안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전하신 복음의 핵심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무엇입니까? 헬라말로는 <바실레이아 투 데우>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니 영토 개념으로 생각합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죽어서 가는 저 세상, 천국, 낙원 같은 세계로 생각합니다. 물론 죽어서 가는 천국도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는 반드시 죽어서 가는 세상만은 아닙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 나라는 영토 개념이라기보다 주권적 개념입니다. 하나님의 지배, 통치, 정치, 주권이 <하나님의 나라> 개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죽어서 가는 천국은 완벽한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는 곳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우리가 주님의 지배를 철저히 받으며 살면, 내 안에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된 것입니다. 우리 가정이 하나님의 지배 하에 놓이면 내 가정이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된 것입니다. 초막이든 궁궐이든 주님 뜻대로 살면 거기가 곧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죽어서 가는 천국은 이미 이 땅에서 이룬 하나님의 나라의 연장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천국 생활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서 이미 실현된 천국의 연장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영토 개념이 아니라 주권 개념입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를 주님이 3년간 치열하게 선포하고 가르치셨습니다.


한 가지 여쭙습니다. 여러분이 갖고 계신 주님에 대한 이미지는 어떤 것입니까? 제 생각에는 주님이 혁명가라던가, 투사라던가, 전사라던가, 개혁가 같은 이미지로 여러분의 머릿속에 계실 것 같지는 않습니다. 주님이 전투적이고 호전적인 분으로 여러분의 뇌리에 각인되어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주님은 자비롭고 우리의 모든 허물을 용서하시는 관대한 분으로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게 전부는 아닙니다. 주님의 다른 면이 있습니다. 주님이 당신의 공생애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다는 것은 절대 주님의 정서나 사역이나 공생애가 정적이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 나라를 향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세상 왕들의 주권을 향해 하나님의 주권을 관철하시기 위해 선포하시고 가르치신 분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주님의 공생애는 매우 역동적이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굉장히 투쟁적이었습니다. 공생애 제1성이 하나님의 나라, 통치, 주권이었고, 부활하신 후 40일간 이 땅에 계실 때에도 계속 하나님의 나라를 외치셨습니다. 결코 주님의 이미지가 유순하지만은 않았습니다. 투쟁적이고 모험적이고 역동적이며 개혁적이고 호전적인 부분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본문 14절입니다.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이 구절은 주님이 공생애를 시작한 시점을 밝히고 있습니다. 요한이 잡힌 후라고 합니다. 요한이 왜 헤롯에게 체포되었습니까? 헤롯의 악정과 허물을 고발하고 선포하다 정치범으로 잡혔습니다. 그 소식을 주님이 광야에서 듣고 갈릴리로 오셔서 하나님 나라를 외치며 공생애를 시작하신 것입니다. 이 사실은 중요합니다. 그 시작 장소도 요한이 체포된 그 현장 갈릴리에서입니다. 그러니까 헤롯의 권력, 주권, 통치가 횡포 하는 현장으로 오셔서 아직 분위기는 살벌한데 거기에 하나님의 주권을 외친 것입니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선전포고입니다. 헤롯의 권력에 대한, 현실 정치에 대한, 살아 있는 권력에 대한 선전포고입니다. 


헤롯에게 도전장을 낸 그 다음 주님의 행보는 어떻습니까? 주님은 예루살렘으로 상경하십니다. 요한복음 2장 13절 이하입니다. “[13]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14]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15]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16]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17]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18]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 [1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그러니까 공생애 첫 사역지였던 갈릴리에서의 하나님 선포가 사회개혁을 의미했다면, 여기 예루살렘에서의 두 번째 사역은 종교개혁을 뜻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유대교의 본산입니다. 따라서 주님이 유대교의 심장에까지 돌진하셔서 성전을 숙정하시고 성전을 헐라고 하신 것은 당시 타락한 종교에 대한 격렬한 도전이었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분명히 사회개혁과 종교개혁의 확실한 모범을 보이신 분입니다. 공생애에 들어가자마자 사회개혁과 종교개혁을 도발하셨습니다. 


지금으로부터 496년 전에 루터와 칼빈 같은 사람이 종교개혁을 일으켰습니다. 이들의 종교개혁 정신도 주님의 이런 개혁정신의 계승을 뜻합니다. 잘 아시는대로 종교개혁으로 출범한 개신 교회가 두 개입니다. 칼빈주의의 장로교와 루터주의의 루터교입니다. 지금은 교단이 무수히 많습니다만, 처음에는 이 두 개 교단으로 출범합니다. 재밌는 것은 루터교는 아니고 장로교만을 개혁교회라고 합니다. 종교개혁을 통해 루터교와 장로교가 나란히 출범했는데, 사람들은 장로교만을 개혁교회라고 부릅니다. 루터교는 루터란 처치라고 부르고, 장로교는 리폼드 처치라고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나라에 들어온 장로교는 미국에서 들어왔습니다. 미국이나 호주 같은 데서는 칼빈주의를 장로교라 부르는데, 유럽쪽에서는 정작 장로교라고 하면 모릅니다. 개혁교회라고 불러야 아하 칼빈주의라고 이해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 루터교에 대해서는 개혁교회라 부르지 않을까요? 


우선 루터교에는 유명한 교리인 두 왕국설(Zwei-Reiche-Lehre)이 있습니다. 철저히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를 구분하는 것입니다. 불간섭의 원칙입니다. 정교분리의 원칙이 루터주의의 두 왕국설입니다. 영미쪽에서는 다 그 원칙을 수용합니다. 교회와 국가, 정치와 종교를 엄격히 구분합니다. 이것이 두 왕국설입니다. 칼 바르트라고 하는 유명한 신학자가 히틀러의 만행 앞에서 독일교회가 그토록 무능했던 이유를 루터주의자들의 두 왕국설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일리가 있는 주장입니다. 물론 루터가 종교개혁의 중요한 착안점으로 두 왕국설을 제기한 역사적 당위성도 있습니다. 왜냐면 중세 천 년의 암흑기는 정치와 종교의 야합 때문이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권력화되고, 정치가 종교에 예속되면서 천 년의 암흑기가 연출되었지 않습니까? 그래서 정치와 종교가 철저히 타락했지 않습니까? 그래서 종교개혁의 필요성이 대두되었지 않습니까? 그래서 루터는 맨 먼저 정교분리의 원칙부터 내세우며 두 왕국설을 주장한 것입니다. 이것이 중세 암흑기의 종지부를 찍는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루터주의는 철저히 두 왕국설을 믿습니다. 그래서 세속 정치에 대해서는 일체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오직 교회에만 몰입합니다. 신앙세계만이 고유의 영역이라 믿었습니다. 


그런데 칼빈주의는 다릅니다. 칼빈주의는 일원론입니다. 칼빈은 루터의 두 왕국설과는 달리 그리스도 통치설(Koenigsherrschaft Christi-Lehre)을 내세웁니다. 교회와 사회를, 정치와 종교를, 세속과 하나님 나라를 구분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 모든 분야에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 관철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문화도 정치도 경제도 사회도 종교도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부분에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실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못한 부분이 있다면, 개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개혁은 하나님의 주권을 실현시키는 작업인 것입니다. 우리의 문화, 정치 등 모든 분야에 하나님의 주권이 실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개혁의 작업이 하나님 나라의 확장입니다. 그리고 모든 성도가 개혁의 전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기도할 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소서” 라고 기도합니다. 우리 삶의 전 영역에 하나님의 주권이 관철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칼빈의 개혁사상인 그리스도 통치설입니다. 이 개념 때문에 장로교회만 개혁교회일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는 바로 이런 유수한 개혁교회 전통에 서 있는 교회입니다. 이 전통을 바르게 이해하고 제대로 계승합시다. 그래서 늘 주님의 개혁 정신과 종교개혁가들의 사상을 교회와 사회 속에서 제대로 구현하며 삽시다. 그것이 개혁교회의 정체성을 지키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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