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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20m 부자와 거지(눅 16:19-31)

20131020m

눅 16:19-31

부자와 거지


[19]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20]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21]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23] 그가 음부에서 고통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24]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25]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26]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27]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28]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29]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30]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31]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뜻 밖에도 많은 분이 사후 세계를 얘기하면 불편해 합니다. 심지어 믿는 사람조차도 내세를 얘기하면 거북해 합니다. 한편으로는 죽으면 어떻게 될까 궁금해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죽으면 그만이요 모든 게 끝이라는 생각으로 막연한 불안감을 잠재웁니다. 왜냐면 다른 무엇보다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천국 갈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너무 잘 압니다.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말입니다. 그래서 사후 세계란 과제가 소망이나 격려가 아니라 오히려 큰 부담이 되는 겁니다. 죽는 것으로 끝난다고 하면 좋겠는데 그렇지 않다고 하니 고민스러운 겁니다. 전에 어떤 자리에서 어떤 분이 그랬습니다. 여러분은 왜 예수를 믿습니까? 지옥 가기 싫어서? 천국 가고 싶어서? 기독교가 그렇게도 천박합니까? 대학 총장까지 지낸 분이 그렇게 강연하니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사실 제가 나설 자리는 아니었습니다만, 염치 불구하고 그분에게 여쭤봤습니다. 그러면 장로님은 왜 예수를 믿습니까? 그분의 대답은 거침이 없었습니다.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몸과 마음을 수양하고 참 가치를 추구하기 위해 예수 믿는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게 바로 잘난 체 하는 현대인이 가장 속기 쉬운 대목입니다. 지옥 가지 않기 위해서 천국 가기 위해 예수 믿는다고 하니 왠지 치사해 보이니까 자꾸만 엉뚱한 것, 고상한 것을 갖다 붙입니다. 여러분 속지 마십시오. 문화생활 차원이나 고상한 가치를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는 천국 가기 위해 예수를 믿습니다. 천국 외에 그 어떤 구실도 명분도 우리 신앙생활의 정답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게 싫으면 그만 둬야 합니다. 교양을 위해서라면 백화점 문화교실이 더 좋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천국입니다. 천해도 할 수 없고, 덜 고상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천국 가기 위해 예수 믿습니다. 


오늘 본문은 천국과 지옥을 주제로 말씀하신 주님의 유명한 비유입니다. 한 부자가 호화스럽게 살았습니다. 본문을 19절을 보면, 그는 자주색으로 염색한 최고급 겉옷에 베옷을 입고 날마다 파티를 열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대단한 부자와는 달리 딱하기 그지없는 병든 거지가 등장합니다. 몸은 피부병으로 말이 아니었고, 부잣집 대문간에 버려진 채 누워 있었습니다. 그가 거기에 누워있었던 것은 늘 잔치가 벌어지기에 음식 찌꺼기라도 먹을까 해서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고, 오직 개들이 와서 그 헌 데를 핥았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부자의 초화판의 삶도, 병든 거지의 최악의 삶도 영원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부자도 거지도 죽었습니다. 22절을 보면, 부자는 죽어서 장사되었다고 하는데, 거지에게는 그냥 죽었다고 합니다. 장사 언급이 없습니다. 병든 거지에 남의 대문간에서 객사했으니, 거적때기에 싸서 힌놈 골짜기에 내버렸을 겁니다. 무연고변사 처리한 겁니다. 여기까지가 연극으로 치면 제1막입니다. 부자와 거지의 극단한 대비의 삶을 그린 겁니다. 


제2막은 이 세상이 아니라 저 세상의 삶입니다. 부자와 거지가 그들의 영혼이 육신을 떠난 순간 믿기 어려운 놀라운 반전이 일어납니다. 두 사람의 처지와 운명이 완전히 뒤바뀝니다. 거지는 쓸쓸히 죽음을 맞았지만 세상을 떠나는 순간 천사들이 와서 그 영혼을 아브라함의 품으로 인도했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이 찾아와 애도하고, 대리석관에 수 백 평 무덤을 준비한 부자는 저승사자들이 와서 그 영혼을 음부로 데려갔다고 합니다. 음부는 하데스, 게헨나입니다. 오늘 본문은 마치 가려진 베일을 찢듯이 무덤 저편의 세계를 보여줍니다. 거지의 영혼을 아브라함의 품으로 데려갔다고 했는데, 이 표현은 유대인의 전통 표현으로 천국을 의미합니다. 반면 부자는 음부, 곧 하데스로 갔는데, 거기는 불신자들이 가는 지옥입니다. 하데스는 우리말 성경에 음부로 번역되고, 게헨나는 지옥이라고 번역되었습니다. 다 같은 의미입니다. 보십시오. 죽으면 끝이 아닙니다. 자살하는 사람은 죽음이 끝이라 생각해서 고통스러운 삶을 끝내기 위해 목숨을 끊지만, 그것은 치명적인 오판입니다. 그곳이 아브라함의 품이든 불 타는 하데스든 죽음은 절대 끝이 아니라, 영원한 시작입니다. 죽음이 무서운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으면 그 사후 운명이 오늘 본문의 부자 아니면 거지입니다. 아브라함의 품 아니면 하데스입니다. 천국 아니면 지옥이지 제3의 공간이나 연옥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질문이 생깁니다. 오늘 본문의 두 주인공인 부자와 거지는 그들의 사후 운명이 왜 아브라함의 품이고, 음부입니까? 거지는 이 땅에서 노숙자여서 천국 갔고, 부자는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아서 음부로 간 것입니까? 오늘 본문에서 단서를 찾아보겠습니다. 왜 거지가 천국에 갔습니까? 이 세상에서 가난하게 살아서 천국 간 게 아닙니다. 그의 이름을 보십시오. 나사로입니다. 나사로는 하나님이 도우신다,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이름이 그대로 이 병든 거지의 신앙적, 영적 정체성을 뜻한다고 이해하셔야 합니다. 나사로라는 이름 하나만으로 그가 경건한 신자였다고 단정하는 것은 지나친 해석이 아니냐고 하실지 모르나 본문은 실화가 아니라 주님이 인물을 설정하시고 거기에 의도적으로 이름을 붙이신 겁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거지에게 나사로라는 이름을 부여하신 것은 계시적 의미가 있다는 겁니다. 여러 이름 가운데 일부러 나사로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것입니다. 특히 주님이 여러 비유 가운데 이름을 갖고 등장하는 캐릭터는 오늘 본문의 거지가 유일합니다. 주님이 의도적으로 거지에게 나사로라는 이름을 붙이셨습니다. 부자에게도 주지 않은 이름을 말입니다. 이 병든 거지는 그 이름 그대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산 사람입니다. 실제 그는 그랬습니다. 이 세상 그 어디에서도 도움을 받을 수 없었고, 그 어디에도 의지할 데 없어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바랄 수밖에 없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천국으로 간 것입니다.


그러면 부자는 왜 지옥으로 갔습니까? 이 세상에서 부요하게 살아서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성경에는 그가 부정축재를 했다는 말도 없습니다. 지옥에 간 그는 물 한 방울이라도 달라고 합니다. 참으로 딱합니다. 부자의 잘못은 무엇입니까? 27절에 나오는 부자와 아브라함 사이의 대화를 보십시오. 부자는 세상에는 아직 자기의 다섯 형제가 살고 있는데, 나사로를 보내서 이곳 사정을 증언하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부자의 이 간청에 아브라함은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가 있다고 합니다. 구약, 곧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는 겁니다. 굳이 나사로가 안 가도 된다고 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모세오경과 선지자들의 글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말씀이 있기 때문에 그들은 그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들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부자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죽은 부자도 역시 생전에는 다른 형제들처럼 모세와 선지자를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면 대문간의 거지 나사로를 그렇게 버려두지 않았을 겁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을 의지해서 살았습니다. 그 많은 부로 가난한 이를 도우며 살기 보다는 자신만의 영화를 위해 살았습니다. 30절 말씀도 마찬가집니다. 만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서 그들에게 가면 내 형제들이 회개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 발언 역시도 그가 어째서 하데스에 떨어진 것인지를 말해 줍니다. 즉 그가 이 세상에서 아무 회개도 없이 살았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그래서 살아 있는 형제들이라도 절대 이곳에 오지 않게 해달라고 간청하는 겁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대답은 참으로 대단합니다. 산 자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사람은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 말씀을 전해도 안 믿는다는 겁니다. 말씀을 믿을 때 표적과 기사가 의미가 있습니다. 모세와 선지자의 말씀을 부정하는 자에게는 어떤 기사나 표적도 도움이 안 되고 그것이 오히려 그들의 마음을 더 강퍅하게 합니다. 오늘 본문의 거지와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은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라비 나사로입니다. 그도 죽은 지 나흘 만에 살아난 사람입니다. 그 때 유대인들이 항복하고 주님께 투항했습니까? 아닙니다. 주님을 믿기는커녕 더 길길이 뛰었고, 주님뿐만 아니라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했습니다. 안 믿는 사람은 죽었다고 다시 살아난 사람이 권해도 안 믿습니다. 


그러면 부자가 간 하데스를 좀 더 보겠습니다. 이것은 이글거리는 불구덩이라는 뜻입니다. 타서 죽거나 없어지진 않고 영원히 불에 타는 고통이 계속되는 세계가 게헨나요 하데스입니다. 문제는 거기는 소멸이 없다는 겁니다. 불에 타죽는 고통만 영원히 계속되는 세계가 하데스입니다. 얼마나 그 고통이 극심했으면 나사로를 보내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해달라고 했겠습니까? 그런데 물 한 방울을 간청하는 부자에게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그리로도, 거기서 여기로도 건너올 수 없다고 합니다. 이것은 누구도 사후의 운명을 변경할 수 없다는 겁니다. 죽으면 그 운명이 고정된다는 것입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사후 운명이 고정되었다는 것입니다. 군에서 제대하는 순간 그 사람의 계급이 고정되는 것과 같습니다. 가능성이나 기회는 오직 살아 있을 때 뿐입니다. 살아있을 때 믿고, 회개하고, 전도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부자가 나사로를 보내 형제들을 회개시켜 달라고 한 것도 살아있을 때 해야 합니다. 죽은 후의 기도는 쓸 데 없다는 겁니다. 기도도 생전에 한 번이라도 더 해야 합니다. 이 부자의 참혹한 비극이 우리에게 주는 깨달음은 살아있을 때 신앙생활 열심히 하고, 자선도, 이웃 사랑도 힘껏 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만이 나의 영원한 운명에 도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 비유의 말씀이 우리에게 큰 깨달음과 도전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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