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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20131006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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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빌 1:12-2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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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섭리신앙</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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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12]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13]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14]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니라 [15]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16]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증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17] 그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18]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19] 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22]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23]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24]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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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제가 늘 강조합니다만, 우리 그리스도인의 사전에는 우연이란 없고 다 필연입니다. 이 모든 것이 우연을 가장한 하나님의 섭리요 경륜입니다. 무엇 하나도 주님의 주권 아닌 게 없다는 확신과 신념이 이를테면 섭리신앙입니다. 구약에서 섭리신앙의 대가를 꼽는다면, 우리는 요셉을 꼽을 수 있습니다. 창세기 45장 3-8절입니다. “[3] 요셉이 그 형들에게 이르되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니이까 형들이 그 앞에서 놀라서 대답하지 못하더라 [4]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이르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5]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6] 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 년은 밭갈이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7]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8]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요셉이 형들을 만나서 한 말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 세상에서 요셉이 당한 배신과 아픔과 고통보다 더 큰 비애가 있을까요? 요셉의 불행보다 더 큰 불행이 있을까요? 어떻게 형들이 공모해 어린 동생을 죽이려고 구덩이에 던집니까? 어떻게 형들이 동생을 상인에게 돈을 받고 노예로 팔 수 있습니까? 애굽에 팔려가서는 얼마나 고생하고 모함을 당하며 억울한 옥살이를 했습니까? 요셉의 발이 착고에 상하고 혼이 쇠사슬에 매었다고 했습니다. 우리 같으면 형들을 저주하며 복수의 칼날을 갈았을 터인데, 요셉은 어디에도 형들을 원망하거나 자기 연민에 빠져 신세 한탄을 하는 모습이 없습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애굽의 국무총리가 된 요셉과 형들이 맞닥뜨립니다. 형들은 이스라엘이 흉년이 들어 양식을 구하러 애굽에 온 약자이고, 요셉은 애굽의 총리대신이 된 강자로 만납니다. 그런데 요셉은 방성대곡하며 ‘당신들이 나를 팔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기근으로부터 우리 가족을 구하기 위해 당신들 앞서 나를 애굽에 보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이라는 것입니다. 도리어 형들을 위로하고 안심시켰습니다. 섭리신앙의 극치입니다. 인륜을 범한 형들의 범죄까지도 하나님의 심오한 뜻으로 해석했습니다. 요셉이야말로 섭리신앙의 선각자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그 어떤 아픔과 상처, 배신도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들이고, 그 어떤 사건도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라 해석하고 수용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불행이 없습니다. 모든 게 은혜요 복입니다. 날아가는 새 한 마리도 하나님 허락 없이는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는데 이 세상 그 무엇이 하나님 경륜 아닌 게 있겠습니까? 요셉의 섭리신앙을 배워야 합니다. 그럴 때에만 그 어떤 험악한 세월도 가혹한 현실도 인내하며 감사할 수 있습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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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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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구약에서는 요셉이 섭리신앙의 대가이고 신약에서의 대가는 누구입니까? 바울입니다. 바울 역시 누구보다 철저한 섭리신앙의 투사였습니다. 그는 자기의 모든 처지와 시련, 환경을 하나님의 섭리로 수용한 사람입니다. 모든 현실을 무섭도록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으로 수용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모든 것을 감사하고 기꺼이 수용할 수 있었습니다. 본문이 속한 성경 빌립보서는 옥중서신입니다. 그럼에도 빌립보서의 별명이 &lt;기쁨의 서신&gt;입니다. 감옥과 기쁨은 반대말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며 처할 수 있는 최악의 환경이 감옥입니다. 거기에서는 도저히 기쁨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빌립보서는 기쁨의 서신입니다. 지독한 역설입니다. 바울은 감옥조차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거기에 처함을 감사했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허세입니까? 과장입니까? 위선입니까? 아닙니다. 섭리신앙의 열매요 결과입니다. 비극이나 우연, 아픔, 무의미한 사건이 아니라 다 하나님의 뜻이요 은혜며 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하고 기쁘다는 것입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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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바울은 구체적으로 자신의 현실을 수용했습니까? 본문 12절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여기서 ‘내가 당한 일’이란 바울 자신의 투옥입니다. 그는 절대 그 사건을 비관적으로 해석하지 않았습니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나의 사역이 여기서 끝났다며 유감스럽다고 하거나 불안하거나 안타까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이것이 복음전파의 진전이라고 했습니다. 상식적으로는 비관해야 맞는데 그는 그런 부정적인 정서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복음전파의 진전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며 기뻐했습니다. 이어지는 13절을 보십시오.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lt;시위대&gt;란 로마 황제를 경호하는 근위대를 가리킵니다. 바울은 감옥에 있으면서 그들에게 전도했습니다. 감옥에 있다 보니 그 사람들 가까이서 복음을 전할 기회를 얻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수감생활을 로마의 심장부를 공략하게 하는 하나님의 섭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골로새서 4장 3절을 보면 바울의 이런 확신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 일 때문에 매임을 당하였노라.” 우리 같으면 하루 빨리 내가 석방되도록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런 부탁이 아니라 감옥 속에서도 담대히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고 했습니다. 감옥에 갇힌 것이 주님의 섭리라는 것입니다. 석방이 아니라 열악한 환경이지만 여기에서 담대히 복음을 증거할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대단한 확신입니까? 내가 갇힌 것은 부당한 일도 아니고 억울한 일도 아니고 순전히 복음의 진전을 위해 주님이 친히 행하신 섭리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를 감옥에 가두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석방을 위해 기도하기보다 감옥 안에서 담대히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할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는 것입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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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본문 15절을 보면 당시 바울이 겪은 인간관계의 아픔이 보입니다.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17절에서 바울은 “그들은”이라고 부릅니다. 이들은 정말 잔인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바울이 감옥에 갇히자 기뻐했습니다. 차라리 모르는 사람이 고통을 주면 괜찮습니다. 그런데 곁의 사람이 나를 괴롭히면 참기 힘듭니다. 15절의 사람들은 시기심으로 복음을 전하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들을 섭섭해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어떤 것으로 전하든 전파되는 것은 복음이니 그것으로 괜찮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확신의 섭리신앙이 아니고서는 갖기 어렵습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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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죽음의 위협입니다. 바울은 언제 끌려 나가 참수를 당할지 모르는 사형수였습니다. 그럼에도 사형수의 초조함이나 공포, 불안이 어디에도 안 보입니다. 달관한 경지입니다. 오늘이든 내일이든 끌려 나가 목이 잘릴 사람인데도 전혀 위축되지 않았습니다. 이게 대체 어디서 온 초연함일까요? 20절 이하입니다. “[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내가 사느냐 죽느냐보다 나를 통해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느냐 아니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주님의 섭리와 처분만을 따르겠다고 합니다. 어거스틴이 심한 열병으로 혼절했을 때 주님을 만납니다. 주님이 어거스틴에게 ‘낫고자 하느냐?’며 물었습니다. 어거스틴은 ‘제 원대로 마시고 주님의 처분대로 하십시오.’ 라고 답합니다. 다음 순간 깜짝 놀라 눈 뜨고 일어나 보니 몸이 날아갈 듯 가벼워 졌다고 했습니다. 유명한 백작 한 사람이 자기의 신분, 직위, 재산을 다 버리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 맨발로 거리에 나섭니다. 사람들이 미쳤다고 했고 그 꼴이 뭐냐며 노골적으로 비웃자 그 친구들에게 난 아직도 너무 사치스럽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내가 주님을 위해 더 고독하고 가난하게 더 처절하게 죽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이 저 유명한 경건주의의 아버지 진첸도르프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사람에게는 감옥도, 동료의 배신도, 굶주림도, 죽음도 다 무색합니다. 그 어떤 사건도 버릴 게 없습니다. 그래서 불행해 하지도 슬퍼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바울처럼 기뻐합니다. 그는 불행,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경륜으로 믿습니다. 여전도회 헌신예배를 드리는 여러분, 요셉처럼 바울처럼 섭리신앙으로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여러분의 처지와 형편을 섭리신앙의 눈으로 해석하고 수용하시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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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b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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