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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20130929m 무한 용서(마 18: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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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20130929m</p>
<!-- paragraph:p0002 -->
<p class="p1">마 18:21-35</p>
<!-- paragraph:p0003 -->
<p class="p1">무한 용서</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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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 paragraph:p0005 -->
<p class="p1">[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23]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24]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26]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28]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29]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31]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32]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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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 paragraph:p0007 -->
<p class="p1">본문은 용서에 관한 주님의 교훈입니다. 주님 당시 용서에 대한 유대 사회의 일반적인 가르침은 우선 바리새인들의 기준이 있습니다. 그들은 두 번까지 용서합니다. 그 이상은 비굴한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랍비들은 세 번 용서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세 번 이상을 용서하는 것은 용서 받는 사람을 망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당시 유대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용서에 관한 기준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들의 가르침을 따라 두 번이나 세 번 용서하였습니다. 그런데 본문 21절을 보면, 베드로가 형제가 내게 죄를 범했을 때 일곱 번까지 할까요? 라고 묻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두 번, 랍비들은 세 번이라고 했지만 우리는 적어도 일곱 번까지 하면 되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뜻밖의 답을 하십니다. 일곱 번을 한 세트로 하여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490번까지는 용서하고 491번부터는 용서하지 말라는 뜻입니까? 무제한으로 용서하라는 뜻입니다. 무한 용서입니다. 그러면 바리새인과 랍비들과는 달리 주님은 무슨 근거로 일곱 번씩 일흔 번을 용서하라고 하셨을까요? 이것은 너무 비현실적이고 과격하고 극단적이지 않습니까? 이에 대한 해명이 본문 23절 이하에 나오는 주님의 비유입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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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 paragraph:p0009 -->
<p class="p1">어떤 나라 왕이 나라 살림을 맡고 있는 관료들을 감사하다고 한 관리가 국고를 무려 일만 달란트나 축낸 사실을 발견하고 경악을 금치 못합니다. 일만 달란트는 어마어마한 돈입니다. 데나리온으로 환산하면 1억 데나리온입니다. 한 데나리온이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습니다. 한 가족이 하루를 살 수 있는 최저 생계비였습니다. 1억 데나리온이면 천문학적인 숫자입니다. 1억 가정이 하루를 살 수 있는 어마어마한 돈입니다. 로마가 식민지로 지배하던 예수님 당시 팔레스틴에서 피를 짜듯 수탈해간 세금이 1년에 800달란트였습니다. 그러니 일만 달란트면 얼마나 큰 금액입니까? 아무리 잘 사는 나라였다고 해도 나라 살림이 휘청할만큼 엄청난 돈을 한 관리가 해먹은 겁니다. 왕은 그 관료를 잡아들여 네 몸과 처와 자식, 모든 소유를 팔아 그 빚을 갚으라고 합니다. 그 관리는 조금만 참아 달라며 다 갚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돌연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뚜렷한 이유도 없이 갑자기 왕이 태도를 바꾸어 엎드려 비는 종의 잘못을 용서하고 그가 진 천문한적인 빚을 몽땅 탕감해 줍니다. 그 이유라면 그 종을 불쌍히 여긴 것입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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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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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문제는 그 다음에 발생합니다. 불쌍히 여김을 받아 용서와 탕감을 받아 풀려난 종이 집으로 돌아가다 자기에게 100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만납니다. 그가 그 사람의 멱살을 잡고 당장 빚 갚으라고 합니다. 동료는 곧 갚겠다고 사정을 합니다. 그러나 그는 기어이 그를 끌고 가 감옥에 처넣습니다. 자기도 금방 용서 받고 탕감 받았음에도 비정하게 푼돈 빚진 동료를 감옥에 가둡니다. 그 모습을 본 주위 사람들이 분개해서 왕에게 진정합니다. 왕이 노발대발하며 그 관리를 다시 잡아들입니다. 32절 이하입니다. “[32]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어떤 주석가는 100데나리온이 한 주머니에 다 넣을 수 있는 돈이고, 만 달란트는 장정 8600명이 지고 가야할 돈이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많은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이라면 한 주머니에 담을 빚쯤은 마땅히 탕감해 주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무려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사람이 자기에게 100데나리온 빚진 자의 멱살을 잡고 옥에 가두었다는 것은 언어도단입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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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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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우리는 하나님이 나를 불쌍히 여김 같이 내 형제와 이웃을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자기는 다 용서 받았음에도 형제의 하찮은 잘못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본문이 말하는 악한 종입니다. 용서는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의 본질입니다. 내가 용서 받은 것처럼 나도 형제를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게 너무도 어렵습니다. 어쩌면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본문의 얘기를 듣고 분개하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나오는 악한 종이 누구일까요? 우리는 다 하나님께 도저히 갚을 길이 없는 큰 빚을 졌던 사람입니다. 무려 만 달란트나 되는 천문학적인 빚을 진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오직 불쌍히 여겨 모든 빚을 탕감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죄 용서를 받을 만한 짓을 한 게 없습니다. 오직 주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탕감의 은총을 잊지 않고 살아야 할뿐 아니라 사랑의 빚진 자로서 남을 탕감해 주며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자의 마땅한 도리요 의무요 사명입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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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그럼에도 본문의 악한 종은 자기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총을 망각했습니다. 자기에게 100데나리온을 빚진 자의 멱살을 잡은 것은 자기를 탕감해 준 주인에 대한 돌이킬 수 없는 배신입니다. 우리가 악한 종일 수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두려움이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얼마나 남을 용서하지 못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말 한 마디, 표정 하나, 느낌 하나도 용서하거나 이해하지 못하고 오해하고 원수를 맺고 살아갑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일만 달란트나 되는 천문학적 금액을 탕감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100데나리온 빚진 자를 만나면 멱살을 잡습니다. 용서는 용서를 받아 본 사람이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용서 받음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남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하라고 하신 것을 저는 극단적이라고 했습니다. 비현실적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날마다 그렇게 용서하고 계십니다. 다른 이가 아니라 우리가 주님의 무한 용서의 수혜자들입니다. 그럼에도 정작 나는 남을 용서하는 데 인색합니다. 다시 한 번 깊이 자성하십시다. 누가복음 17장 4절을 보면 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 죄를 얻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하거든 용서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루 일곱 번은 고사하고 1년에 한 번 남을 용서하는 것도 어렵습니다. 주님은 날마다 일곱 번씩 일흔 번을 용서하고 계십니다. 자신에 대해서는 그렇게도 너그러운데 남에 대해서는 안 됩니다. 용서는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용서하지 못하면 내게 독이 됩니다. 나치 피해자들 가운데 후에 그들을 용서한 사람들은 새 삶을 시작할 수 있었는데, 끝내 용서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 말로가 행복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늘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한 것 같이 우리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곤혹스런 기도입니다. 쉬운 기도가 아닙니다. 황금률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 13절입니다.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고 하십니다.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믿으며 또 용서함을 받으며 사는 사람들은 남을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의 용서를 바라신다면 먼저 남을 용서하십시오. 그게 율법과 선지자들의 가르침입니다. 복수하면 복수하는 자와 당하는 자 모두 파멸합니다. 그러나 용서하는 자는 용서 받는 자까지 살립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4장 32절에서 ‘너희는 서로 불쌍히 여기며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한 것 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한 것을 생각하면 우리는 용서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유라고는 불쌍히 여겨서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해 주신 것을 생각하면 용서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남을 용서하는 데 인색합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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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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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악한 종의 최후 운명을 보십시오. 극적으로 받은 은혜가 다 취소되고 옥졸에게 넘겨집니다. 여기에 나오는 옥졸은 고문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일만 달란트나 되는 빚을 언제 다 갚습니까? 이제 틀렸습니다. 이게 바로 용서할 줄 몰랐던 종의 말로입니다. 이 교훈의 결론이 마지막 절에 있습니다. 35절입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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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br></p>
<!-- paragraph:p0019 -->
<p class="p1"><b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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