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id": "xe-42889",
  "title": "20130915m 명절이 가까운지라(요 6:4-13)",
  "authors": [],
  "category": "sermon",
  "dates": {
    "registered_at": "2013-09-15T23:58:55",
    "original_updated_at": "2013-09-15T23:58:55",
    "published_on": null,
    "delivered_on": null
  },
  "tags": []
}
---
<!-- paragraph:p0001 -->
<p class="p1">20130915m</p>
<!-- paragraph:p0002 -->
<p class="p1">요 6:4-13</p>
<!-- paragraph:p0003 -->
<p class="p1">명절이 가까운지라</p>
<!-- paragraph:p0004 -->
<p class="p2"><br></p>
<!-- paragraph:p0005 -->
<p class="p1">[4]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5]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6]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7]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8]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9]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시니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가 오천 명쯤 되더라 [11]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12]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13]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p>
<!-- paragraph:p0006 -->
<p class="p2"><br></p>
<!-- paragraph:p0007 -->
<p class="p1">4절을 다시 봅니다.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오병이어의 기적은 유대인의 최대 명절인 유월절을 며칠 앞두고 일어난 사건입니다. 우리 민족의 최대 명절은 추석입니다. 굳이 말하자면 명절을 며칠 앞둔 오늘쯤 주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다가올 명절을 보다 넉넉하고 풍성히 쇠라는 것입니다. 부디 주님의 깊으신 뜻대로 떡과 고기를 배불리 먹고도 12광주리나 남는 풍성하고 넉넉한 추석을 보내시길 바랍니다.</p>
<!-- paragraph:p0008 -->
<p class="p2"><br></p>
<!-- paragraph:p0009 -->
<p class="p1">오병이어의 기적이 어떻게 발생했는지 구체적으로 보겠습니다. 6절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주님께는 이 난감한 문제를 풀 수 있는 대책이 있다는 겁니다. 다만 제자들이 이 문제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살피기 위해서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게 하겠느냐?’고 물으셨다는 겁니다. 주님은 자주 이렇게 하십니다. 당신에게는 문제해결의 방도가 있으시지만 우리에게 그 대처방안을 물으십니다. 우리가 그 시험을 잘 통과하면 은혜를 베푸시고 기적을 허락하십니다. 주님은 함부로 기적을 남발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그릇이 되는지, 주님의 은혜를 누릴 채비가 되어 있는지를 먼저 시험하십니다. 그래서 감당할 수 있는 자에게만 은혜와 기적을 베푸십니다. 그래야 기적이 복이 되고, 은혜가 은혜 되기 때문입니다.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지 않으십니다.</p>
<!-- paragraph:p0010 -->
<p class="p2"><br></p>
<!-- paragraph:p0011 -->
<p class="p1">당시 시험대에 오른 제자들의 성적을 보겠습니다. 빌립니다. 빌립의 반응는 7절입니다.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계산 한 번 빠릅니다. 주님의 말씀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 앉은자리에서 계산이 끝났습니다. 이 사람들에게 조금씩 나눠준다 해도 200데나리온, 요즘 돈으로 2천만 원쯤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은 불가능하다는 대답입니다. 빌립은 이해타산에 밝은 지독한 현실주의자였습니다. 모든 것을 치밀하게 계산하고, 승산이 없으면 미련 없이 포기합니다. 대단히 이성적입니다. 그러나 신앙적이지는 않습니다. 신앙은 때로 산술적인 계산을 뛰어넘습니다. 이성이나 합리적 사고를 초월해야 신앙입니다. 믿는 자는 반드시 돈으로만 떡을 구하지 않고, 은혜와 기적으로 떡을 얻기도 합니다. 빌립 같은 사람은 바로 이것을 부정하는 겁니다. 빌립은 이성적 판단으로 불가능하다고 답했습니다. 빌립의 답안은 주님이 기대하신 답이 아닙니다. 주님이 출제하신 문제는 수리가 아니라 신앙적 문제였는데, 빌립은 산술적인 답안을 작성한 것입니다. 그래서 빌립이 재수한 겁니다.</p>
<!-- paragraph:p0012 -->
<p class="p2"><br></p>
<!-- paragraph:p0013 -->
<p class="p1">다음은 안드레입니다. 8-9절입니다. “[8]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9]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그래도 안드레는 빌립보다는 낫습니다. 빌립은 앉은자리에서 계산만 하다가 불가능하다고 했는데, 안드레는 실제 먹을 것을 찾아 현장을 누비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그 역시도 주님이 바라신 답은 하지 못했습니다. 오병이어를 발견하고도 그가 한 말은 ‘그러나 이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안드레는 비관주의자입니다. 오병이어가 실제 어림도 없다는 겁니다. 이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떡을 찾아다니지만 늘 어렵다, 안 된다, 불가능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삽니다. 주님은 빌립같이 계산에 능한 현실주의자나 안드레처럼 일은 하지만 비관적인 사람을 통해서는 기적을 베푸시지 않습니다. 이들은 아직 주님의 은혜를 경험하기에는 준비가 덜 된 사람입니다.</p>
<!-- paragraph:p0014 -->
<p class="p2"><br></p>
<!-- paragraph:p0015 -->
<p class="p1">한 아이를 보십시오.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안드레가 먹을 것을 찾으니 한 아이가 자기 도시락을 내민 것입니다. 안드레가 비웃을 만 합니다. 장정만 5천명이 넘는데 어린 아이가 내민 도시락이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당시 그 아이는 무슨 생각으로 자기 도시락을 내밀었을까요? 빌립처럼 계산했을까요? 그럴 리는 없습니다. 계산했으면 못 바쳤을 겁니다. 안드레처럼 비관적이긴 하지만 주님이 뭔가 하실 것이라는 기대로 바쳤을까요? 그것도 아닐 것입니다. 이 아이는 그저 바친 겁니다. 주님이 먹을 것을 찾으시니 단순 소박하게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그냥 주님 말씀에 단순히 반응을 보인 것입니다. 남의 이목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의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안드레는 비웃지만 거기에 굴하지 않고 자기 도시락을 내민 것입니다. 그런데 뜻 밖에도 주님은 그 아이의 도시락으로 놀라운 기적을 베푸십니다. 주님은 이름 없는 아이의 헌상을 통해 당신의 역사를 행하십니다. 계산 빠르고 이해에 밝은 빌립이 아니라, 회의적이고 부정적인 안드레가 아니라, 말씀에 단순히 순종하고 결단하는 한 아이를 주님은 늘 원하십니다.</p>
<!-- paragraph:p0016 -->
<p class="p2"><br></p>
<!-- paragraph:p0017 -->
<p class="p1">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오해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이 사건이 주님이라고 해도 최소한 오병이어는 있어야 기적을 베푸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주님은 작으나마 우리가 뭔가 성의를 보여야 그것을 소재로 뻥튀기하듯 기적을 베푸실 수 있다는 생각은 아닙니다. 주님은 오병이어가 없이도 기적을 행하실 수 있습니다. 주님은 다만 우리의 중심을 보고 싶어 하십니다. 따라서 주님이 받으시는 것은 한 아이의 남루한 도시락이 아니라 거기에 담긴 그 아이의 중심, 믿음, 사랑입니다. 그것을 접수하시고 그 오병이어와는 상관없이 당신의 무한하신 능력으로 기적을 행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절대 무에서 이 우주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따라서 반드시 오병이어가 있어야만 기적이 일어나는 게 아닙니다. 주님이 확인하고 싶어 하신 것은 우리의 중심입니다. 오병이어에 담긴 우리의 믿음, 주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보리떡 다섯 개가 아닐 한 개면, 물고기 두 마리가 아니라 한 마리라도 주님은 기적을 행하십니다. 오병이어가 아니라 주님이 당신의 능력으로 그 많은 사람을 먹이고 남기신 것입니다. 부디 오늘 여러분의 중심을 담은 오병이어를 바치십시오. 주님은 반드시 놀라운 기적을 베푸실 것입니다. </p>
<!-- paragraph:p0018 -->
<p class="p2"><br></p>
<!-- paragraph:p0019 -->
<p class="p1">주님은 빌립 같은 이성주의자나 안드레 같은 회의주의자는 외면하십니까? 주님이 그들더러 낙제했다고 사도직을 내놓으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의 이 오병이어의 기적 속에는 빌립 같은 이성주의자나 안드레 같은 회의주의자에 대한 배려도 숨어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비합리적이거나 반자연적 사건이 아닙니다. 주님은 오병이어가 아니라 오천 명, 오만 명을 먹이시고도 12바구니가 아니라 120바구니도 남기실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오병이어로 기적을 행하신 것은 이 땅의 이성주의자, 회의주의자들에 대한 속 깊은 배려입니다. 오병이어가 절대 자연적인 질서를 해치지 않습니다. 순리를 파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최대한 자연 질서와 순리를 존중합니다. 주님이 언제 돌로 떡을 만드셨습니까? 주님이 언제 나무 막대기로 고기를 만드셨습니까? 무화과로 포도주를 만드셨습니까? 이것은 다 자연의 법칙이요 순리입니다. 보리떡 다섯 개로 보리떡 오만 개 못 만듭니까? 여러분도 저도 만들 수 있습니다. 보리떡 다섯 개의 씨앗을 뿌리고, 수확하고, 또 뿌리고 수확해서 오만 개를 만들 수 있는 분량이 되었을 때 떡을 만들 수 있습니다. 포도주도 마찬가집니다. 물고기도 마찬가집니다. 문제는 시간문제입니다. 요즘은 유전자 조작으로도 시간을 앞당길 수 있습니다. 하물며 주님이 보리떡이나 물고기를 증식시키지 못하겠습니까? 주님의 기적은 억지가 아니라 순리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기적 때문에 회의에 빠지지 마십시오. 성경의 사건을 비이성적 미스터리로 치부하지 마십시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얼마든지 떡과 물고기를 만드실 수 있음에도 굳이 오병이어로 떡과 물고기를 만드신 것을 이해하십시오. 다만 한 아이처럼 여러분의 마음을 주님께 순수하게 헌상하십시오. 명절이 얼마남지 않은 오늘 여러분의 감사를 접수하사 놀라운 기적을 베푸셔서 우리가 배불리 먹고도 12바구니나 남는 은혜를 베푸실 것입니다.</p>
<!-- paragraph:p0020 -->
<p class="p1"><br></p>
<!-- paragraph:p0021 -->
<p class="p1"><br></p>
<!-- paragraph:p0022 --><span class="archive-media-placeholder"><a href="https://www.youtube.com/embed/TVnyUUvmKlQ" title="미디어 원본"></a></spa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