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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11m 자유에 대하여(갈 4:1-11)



20130811m

갈 4:1-11

자유에 대하여


[1]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2] 그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나니 [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 노릇 하였더니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8]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 하였더니 [9]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10]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11]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사르트르의 작품 가운데 <자유의 길>(Der Weg zur Freiheit)이라는 장편소설이 있습니다. 주인공은 철학교사인데, 가정이라는 굴레가 싫어 독신주의를 고집합니다. 그러나 곧 그는 성적 욕망의 노예가 되어 밤마다 소녀에게 드나들다가 결국 그 소녀를 임신시킵니다. 성적 욕망의 노예로 살다가 소녀를 임신시키고, 그 책임으로부터 자유하기 위해 돈의 노예가 됩니다. 자유를 위해 노예로 살다가 생애 딱 한 번 자유롭게 삽니다. 독일군에게 총을 쏘며 광장 한가운데로 나가다 거기서 죽습니다. 실존주의가 말하는 자유란 살아있을 동안은 불가능하고 죽음에 자신을 내던질 때 가능하다는 결론입니다. 그러나 죽은 자의 자유는 인간의 자유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 실존주의의 영향으로 한 때 유럽의 젊은이들이 유행처럼 자살했습니다. 성경의 중심 메시지 가운데 하나도 <자유>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5장 13절도 보십시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우리로 하여금 자유인이 되기 위해, 자유를 누리며 살게 하기 위해 주님이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부르셨다는 겁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자유>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오늘 본문을 통해 어린 아이와 성인을 비교합니다. 본문 1절 이하를 보십시오. “[1]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2] 그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나니.” 어린 아이는 종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아직 완전한 자유인도 아닙니다. 유대 사회에 의하면 12세까지는 법적으로 아직 자유인이 아닙니다. 아들이지만 후견인의 통제를 받아야 합니다. 12세가 되면 성인식을 치르며 한 사람의 자유인이 되는 겁니다. 종은 아닌데 거의 종이나 다름없는 상태가 유대 사회에서의 어린 아이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어떤 자유인입니까? 어린 아이입니까? 성인입니까? 우리는 성인으로서의 자유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자유는 완전한 성인의 자유입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종과 아들을 다시 비유합니다. 종과 아들은 어떻게 구분합니까? 아들은 아무리 못나도 아들이고, 종은 아무리 착해도 종입니다. 아들이 날마다 사고를 쳐도 사고뭉치 아들일 뿐이지 종이 되는 법은 없습니다. 종이 아무리 착하고 부지런해도 종이 아들 되는 법은 없습니다. 주인에게서 종은 하나의 기능이요 재산일 뿐입니다. 그러나 아들은 고유한 인격이고 주체며 주인의 분신이고 후에 주인의 모든 것을 물려받을 상속자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우리가 어린 아이가 아니고 성인이라고 합니다. 종이 아니라 아들이라고 합니다. 완전한 자유인이고 주체적인 인격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자유니 해방이니 하는 말처럼 막연하고 추상적인 말도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자유> 개념을 아주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무엇으로부터의 자유며 해방인지를 짚어줍니다. 우선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바울 당시 갈라디아교회가 안고 있던 가장 큰 문제는 율법주의였습니다. 율법주의는 복음뿐만 아니라 율법도 믿어야 구원을 얻는다는 가르침입니다. 복음도 믿어야 하지만 할례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 2절 이하입니다. “[2]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3]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통렬한 비판이고 극단적인 책망입니다. 우리는 율법으로부터 해방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더는 율법으로 구원을 얻거나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받지 않습니다. 지금은 복음의 시대, 은혜의 시대입니다. 전에 우리는 율법을 지킴으로써 의로워지고 구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고행이나 수도생활을 강조하는 가톨릭도 다분히 율법주의적 경향이 있습니다. 바울의 비판은 율법주의자들을 향한 비판입니다. 율법주의는 주님의 십자가를 무효화하는 범죄입니다. 도덕, 윤리, 치성 등을 강조하는 세상의 모든 종교는 다 율법주의입니다. 착하게 살아야 죽어서 좋은 데 간다는 종교는 다 율법주의입니다. 인간의 정성이나 치성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게 복음주의입니다. 하나님의 율법 기준을 충족해서 천국 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는 다 똑같습니다. 여러분, 율법의 행위로써 의롭다 할 육체는 없다는 게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면 율법으로 구원 받는 게 아니라면 더는 율법이 필요 없습니까? 율법 폐기, 율법 무용론을 주장해도 됩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왜냐면 전에는 우리가 구원을 받기 위해 율법을 지켰다면, 지금은 우리의 성화 때문에 지키기 때문입니다. 구원 받은 사람의 지상목표는 성화입니다. 우리는 율법을 지키는 만큼 거룩해집니다. 그래서 율법주의도 틀린 것이지만, 율법이 더는 불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다음으로 우리의 자유는 죄로부터 자유입니다. 로마서 8장 1절 이하입니다.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사실 이보다 더 놀라운 자유의 의미, 경이로운 해방의 의미는 없습니다. 죄로부터의 자유요 해방입니다. 우리는 자유인입니다. 죄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우리는 더는 정죄 받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 믿으며 여전히 죄를 짓습니다. 죄로부터 해방이 되었으나 여전히 죄를 짓습니다. 바울 같은 위대한 사도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3-24). 구원파에서는 이런 상태를 아직 완전한 구원을 받지 못했다고 가르칩니다. 바울이 그토록 괴로워했던 것이 아직 완전한 구원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옛 습성 때문입니다. 옛 생활의 관성 때문입니다. 맹렬하게 죄지으며 달렸는데, 한순간 설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죄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은 우리의 신분, 정체성, 소속이 새로워졌다는 뜻이지 우리의 정서, 기호, 죄에 대한 미련까지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겐 아직도 죄에 대한 욕구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나왔습니다. 그런데도 툭하면 애굽 생활을 그리워하였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분명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기회만 주어지면 죄를 짓습니다. 


그러면 죄를 지으면 옛 신분으로 돌아갑니까? 아닙니다. 더는 정죄함이 없습니다. 우리가 비록 죄를 지어도 이제 우리를 정죄하고 단죄할 법은 없습니다. 죄와 사망의 법이 해소되었습니다. 오직 내게는 생명의 법, 성령의 법만 적용됩니다 죄로부터 자유라는 의미를 잘 새깁시다. 


마지막으로 초등학문으로부터 자유입니다. 본문 9절 이하입니다. “[9]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10]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11]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바울 당시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은 율법과 죄 문제뿐만 아니라 세상 초등학문으로부터도 자유하지 못했습니다. 초등학문은 당시 희랍문화권에서 유행하던 점성술을 가리킵니다. 새번역 성경은 이 세상 초등학문을 원시종교, 즉 미신으로 번역했습니다. 교회 다니면서 사주, 궁합, 토정비결, 신문에 나오는 오늘의 운세까지 챙깁니다. 그런 것에 종노릇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그것들로부터도 해방되었습니다. 손 없는 날 따지지 마시고, 차라리 손 있는 날 이사하면 더 저렴합니다. 오늘의 운세 보지 마시고 그 시간에 오히려 성경을 읽으십시오. 철학관 가서 아이나 손자, 손녀 이름 짓지 마십시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을 향해 어리석다고 합니다. 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종노릇하느냐고 합니다. 


자유하십시오. 믿음에 굳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매지 마십시오. 종이 아닌 아들, 어린 아이가 아닌 자유한 성인들로 사십시오. 주님의 기대요 바람입니다. 그런 해방된 자유인으로 살아가게 하기 위해 주님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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