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교회 아카이브

삭개오와 뽕나무

그는 언제나 그랬습니다. 키 크고 힘 있는 사람들에게 이리 밀리고 저리 치여 결국은 가장자리로 밀려나곤 했습니다. 몸피가 작았기 때문에 도저히 무대 중심으로는 나아갈 수 없었던 좌절, 그것은 이전에도 그가 수없이 겪어온 아픔이었습니다. 툭하면 크고 힘센 녀석들에게 짓밟혔고 예쁜 여자 아이들마저도 루저라며 그를 상대해 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높은 뽕나무 위로 올라가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자기보다 좀 약해 보인다 싶으면 밖으로 밀어내고 아래로 깔아뭉개고 밟아 버리기 일쑤인 세상을 이길 방도란 자신의 작은 키를 대신해 줄 큰 나무위로 올라가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좋다, 너희들을 죄다 머리 꼭대기에서 내려다 보리라!> 그런데 당시 삭개오가 택한 그 크고 강한 뽕나무란 바로 로마제국이었습니다. 그는 그 나무를 기어오르고 또 올라서 마침내는 동족의 피를 빠는 세리의 우두머리가 되었습니다. 내심 얼마나 통쾌했을까요? 누구도 감히 덤빌 수 없게 되었을 뿐 아니라 비록 뒷담으로 욕을 할망정 앞에서는 설설 길 수밖에 없었으니 역시 필사적으로 나무 위를 기어오른 보람이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제 그의 삶의 철학은 오직 <남보다 먼저 높이 오르자!>입니다. 따라서 그런 그가 여리고성을 지나시는 주님을 보기 위해 냉큼 뽕나무 위로 올라간 것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돌발행위였다기 보다는 그가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의 당연한 연장이었을 뿐입니다. 그런 비상함이 아니고서는 자기 앞을 가로막고 있는 수많은 무리들을 뚫고 주님 앞으로 나가기란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실은 오늘 우리나라가 바로 그런 삭개오를 꼭 빼닮았습니다. 작고 힘없는 반도, 오랜 세월 이 나라 저 나라에 짓밟히고 시달리다 결국은 일제 강점 36년간 온갖 분탕질을 다 당해야 했습니다. 국권을 되찾았다는 뜻의 <광복>, 그러나 나라는 다시 <분단>됐고, 동족상잔의 <6.25>로 폐허가 됐으며 가난하고 힘없는 민족으로 각인되어 국제사회에서까지 갖은 무시와 모멸을 다 당해오지 않았습니까? 그럼에도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있겠느냐며 기를 쓰고 오른 것이 오늘날의 이 대한민국입니다. 그러다보니 모두가 남들 머리꼭대기까지 올라가 아래로 내려다보는 일에는 익숙해도 더불어 살고 양보하며 사는 일, 정의롭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방식에는 갈수록 더 낯선듯하여 안타깝기 그지없는 이즈음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집니다. 어느 교회나 그저 남보다 먼저 뽕나무에 올라가지 못해 안달입니다. 그래서 웅장한 건물을 짓고, 수천 수만이 모이는 요란한 집회를 열어야 직성이 풀리고, 내노라 하는 유명 강사들을 초빙해야 비로소 주님을 만날 수 있다고 믿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아무튼 다 남보다 먼저 나무 위를 오르려고 아웅다웅하는 게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 아닌지 냉정하게 반성해 볼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나무 위에서 내려다보는 주님이란 기껏해야 우리가 움켜 쥔 것을 더 늘려주거나 더 꽉 움켜쥐게 하는 존재 그 이상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뽕나무 위에 올라간 삭개오가 주님의 눈길과 딱 마주친 순간 주님이 <삭개오야!>하고 그를 부르셨습니다.  그것은 이리 채이고 저리 밀려나 인생의 가장자리 밖에는 차지할 수 없었던 그를 세상 사람들이 다 지켜보는 가운데서 다시 세상 중심으로 불러내신 사건이고, 세상살이가 억울하고 서러워 독한 마음을 품고 올라간 나무 위에서 당장 내려오라고 하신 분부이기도 한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또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고도 하셨습니다. 삭개오 일개인 뿐 아니라 그의 집 전체의 구원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한 사람의 극적인 변화가 그가 속한 공동체 전체를 살리는 실마리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주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변화의 실체요 한국교회가 오늘 우리 사회 안에서 실현해야 할 구원의 진정한 모습일 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