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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육사의 <청포도>

벌써 청포도의 계절인 7월입니다. 흘러가는 세월의 헛헛함과 본격적인 폭염 그리고 늦장마의 눅눅함에 조금은 지치고 짜증스러운 요즘, 저는 해마다 이맘때면 이육사의 <청포도>를 떠올립니다. 


내 고장 7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절이주절이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 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두렴


상큼한 청포도 향에 침이 다 고일 지경인 이 시는 눈이 시리도록 아름답고 슬프고 가슴에 사무치는 그리움의 노래이자 조국 해방을 염원하는 가장 서정적인 기도입니다. 이육사는 1904년 4월 4일(음) 경북 안동군 도산면(도산서원이 있는) 원천리 불미골에서 태어났습니다. 본명은 원록, 후에는 다시 활(活)로 개명하는데 호인 육사(陸史)는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대구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를 때 주어졌던 수인번호 <264>에서 따온 것입니다. 그는 이퇴계의 14대손으로 6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안동군 예안면의 보문의숙에서 신학문을 배웠고 대구 교남학교를 다녔으며 1921년 결혼한 뒤에는 형 원기, 동생 원유와 함께 항일독립운동 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했는데 1925년 10월에는 <의열단>의 임무를 띠고 북경으로 갑니다. 이듬해 귀국한 그는 일제에 억압받는 민족 현실을 안타까워하다 다시 중국으로 가 북경 사관학교에 입학하여 군사훈련을 받기도 했습니다. 1927년 재입국한 육사는 곧 터진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대구 형무소에 수감되는데 그 이후 무려 17차례나 투옥과 출옥을 반복합니다. 1929년에는 출옥하자마자 다시 중국으로 건너가 북경대학 사회학과에 적을 두고 만주와 중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독립투쟁을 벌였습니다. 


시작 발표는 1933년 귀국해 <신조선>사 등의 언론기관에 근무하면서부터 <육사>라는 필명으로 시작됐는데 한 때는 폐결핵으로 요양생활을 해야 할만큼 건강은 매우 좋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계속 북경과 서울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하다 1943년 4월 마침내 서울에서 체포되어 북경으로 압송됐고 이듬해인 1944년 건강이 더욱 악화되어 결국은 광복도 보지 못한 채 북경 감옥에서 쓸쓸히 세상을 떠났습니다. 일제 말기 대부분의 문인들이 변절하여 친일로 돌아선 데 반해 이육사는 한 번도 그의 뜻을 굽히거나 타협한 적이 없는 올곧은 지사요 절개 굳은 문사였습니다. 그의 유해는 고향인 낙동 강변에 안장되었고 시비도 거기에 세워졌습니다. 그의 시는 전편이 일제 강점기의 민족적 비극을 소재로 깨끗하고도 강렬한 저항의지를 담고 있는데,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광야>야말로 그의 저항시의 면모를 가장 잘 드러낸 걸작으로 꼽힙니다. 현재 그의 출생지인 원천리 불미골에는 <이육사 문학관>이 세워져 각종 사료와 기록물들을 모아 전시하며 육사의 혼, 그의 독립정신을 기리고 있는데 육사의 따님인 옥비 여사가 전시관 해설사로 활동하고 있기도 합니다. 


올 휴가 때는 육사의 고향이자 제 고향이기도 한 <청포도>의 마을 안동으로 내려갈까 합니다. 

육사의 생가인 태화동 고택에서 하룻밤 자는 것도 좋을 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