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id": "xe-4235",
  "title": "빈 그물을 씻고 있을 때",
  "authors": [],
  "category": "column",
  "dates": {
    "registered_at": "2011-04-23T11:15:28",
    "original_updated_at": "2011-04-23T11:15:28",
    "published_on": null,
    "delivered_on": null
  },
  "tags": []
}
---
<!-- paragraph:p0001 -->
<div>
밤새 그물을 던졌지만 고기는 한 마리도 잡히지 않았습니다. 벌써 동이 터오자 낙향하여 첫 고기잡이에 나섰던 제자들은 몹시 허탈했습니다. 고기잡이라면 일가견이 있었지만 그날 만큼은 방법이 없었습니다. 여기서 채이고 저기서 밟히다 보면 평소 잘하던 일도 주눅이 들어 되지 않듯 그렇게 의기소침하여 그물을 접고 있을 때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셨습니다. </div>
<!-- paragraph:p0002 -->
<div><br>
&lt;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gt; 아니, 밤새 그물질을 했는데 왜 오른편이라고 안 던져 봤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의아스러울 만큼 선뜻 그 말씀에 순종했고, 이어서 놀라운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고기가 너무 많이 잡혀 그물을 끌어 올릴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시 그들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아직 그가 누군지도 확인되지 않은 마당에 무조건 씻어 놓은 그물을 다시 내린 걸까요? 지금까지의 자신들의 이력, 고기잡이라면 누구 못지않았을 능력을 내세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적어도 자신들의 경험에 고집스럽게 집착하면서 주님의 충고를 미리부터 거부하는 심사를 가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 방면에 뛰어난 재능을 가졌다 해도 스스로의 한계와 부족을 인정하는 겸허함과 &lt;열린 마음을 가진 존재들&gt;이었다는 겁니다. 교만한 사람들은 대개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감정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경험만을 절대시하며 아예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립니다. </div>
<!-- paragraph:p0003 -->
<div><br>
반면 제자들은 실패의 수렁에서 벗어날 수 있는 구원의 줄을 제대로 붙잡을 줄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그 실패의 경계선을 훌쩍 뛰어넘는 신앙, 자신의 경험 속으로만 움츠러들지 않는 열려있는 마음을 요구합니다. 그것이 곧 매사에 자신감을 잃고 무기력증에 빠진 우리 인생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참된 동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미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도 선뜻 그의 증인으로 나서지 못했던 베드로도 이 날의 체험으로 다시 한 번 헌신을 결단하게 됩니다. 말하자면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자신을 열 줄 아는 마음이 가져다 준 축복의 정체를 확연하게 깨달은 셈입니다.</div>
<!-- paragraph:p0004 -->
<div><br>
부활의 주님은 언제나 그렇게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우리가 인생살이에서 어떤 실패를 겪었든, 우리의 삶에 그 어떤 쓰라림이 있었든 그걸 앞세우지 말고, 그것에 묶이지도 말고 무엇보다 먼저 주님이 격려하시는 음성에 귀를 기울이라는 것입니다. 한계가 분명한 자신의 지식과 경험, 그리고 삶을 더욱 초조하게 할 뿐인 욕심을 비우고 오로지 주께서 우리의 영혼에 속삭이시는 세미한 음성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미명의 새벽에 이슬처럼 맺히는 그 분의 음성에서 피할 수 없는 인생사 갖가지의 좌절을 딛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길을 발견하라는 것입니다. 이렇듯 부활하신 주님은 온밤을 밝히며 혼신의 힘을 다했음에도 아무런 성과가 없어 낙심천만 할 때 우리에게 &lt;재기의 용기&gt;를 불어넣으시며 소망을 꺾지 않도록 도와주십니다. 그래서 막혔던 기도가 터지게 하시고, 분노의 파도를 잠재우시며 상처받은 사랑이 다시금 그 열정을 회복하게 하십니다. </div>
<!-- paragraph:p0005 -->
<div><br>
그리고 또 하나 기억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그날 베드로는 홀로가 아니었다는 겁니다. 그에게는 함께 고기를 낚던 형제들이 있었습니다. 실패의 모진 밤을 같이 보내며 쓰린 가슴을 보듬어 주던 이웃이 있었습니다. 홀로 외롭게 만난 그리스도가 아니라 형제와 함께 만난 부활의 그리스도, 이는 곧 서로 뜨겁게 격려하고 더불어 기도한 공동체가 있었음을 뜻합니다. 마침 오늘은 부활절이자 우리 교회 창립기념주일입니다. 다시 한 번 우리들의 사람 낚는 현장을 찾아오신 부활의 주님이 밤새 허탕 친 우리의 빈 그물에 희망과 사랑을 가득 채워주시길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div>
<!-- paragraph:p0006 -->
<div><br>
</div>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