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의 아픔
읽기 설정
미리보기 인용
복사되는 내용은 인용 정보와 미리보기 주소다.
현재 미리보기 주소:
6월은 아픔의 달입니다. 우리에게는 6월이 잔인한 달입니다. 6월 항쟁도 가혹했지만 6.25는 더 더욱 비극적이었습니다. 6월의 장미가 붉디 붉은 이유, 6월의 신록이 시리디 시린 이유는 꽃다운 젊음과 그들이 바친 뜨거운 피가 어우러진 달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내일 모레가 6.25 63돌입니다. 전쟁을 경험한 세대는 이제 다 노인이 되었고, 앞으로 통일시대를 열어갈 주체는 다음 세대인데 최근 한 언론사가 실시한 청소년 역사의식 조사에서 응답 고교생의 69%가 6.25를 <북침> 전쟁이었다고 답했다니 정말 할 말이 없습니다. 이게 이 시대 우리들의 슬픈 자화상입니다. 한 가족이면서도 적이 되어야 했고, 한 혈육이면서도 남보다 더한 대립과 반목으로 살아 온 지난 60여년의 상흔이 지울 수 없는 아픔이 되어 다가옵니다.
6.25로 남북은 각각 133만과 272만의 희생자를 냈습니다. 그중 민간인 사망자는 남한이 전체 희생자의 50%, 북한은 80%에 달해 전투원보다도 비전투원의 희생이 훨씬 더 컸던, 그래서 전쟁의 비인간적인 속성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 전쟁이었습니다. 또 전쟁기간 동안 5백만의 전재민과 1천만의 이산가족이 발생했습니다. 전쟁 후에도 남과 북은 제각기 채택한 이데올로기에 매몰되어 그저 일시적 분할일 것이라고만 생각했던 국토 분단을 반세기가 넘도록 고착시켜 왔습니다.
전쟁이 한참이던 1951년 1월 국방부가 소위 특수 유격전을 임무로 하는 대대급 규모의 부대를 급조합니다. 그들은 짧은 훈련 후 서둘러 적 후방 깊숙이 투입됐습니다. 영화에서 봤듯 그들은 북한군 복장으로 위장을 하고 잠입하여 적에게는 치명적인 손상을 입히고 아군의 작전에는 결정적인 기여를 합니다.
그러나 전체 600여명의 요원 중 생존자는 고작 200여명, 사망의 가장 큰 요인은 동사, 아사였고 억울하게도 인민군 복장을 하고 작전에 임한 탓에 적으로 오인되어 아군에게 사살 당한 요원들도 적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천신만고 끝에 귀환한 대부분의 요원들이 포상은 커녕 특수임무요원이라는 보안상 이유 때문에 군적에도 등록되지 않아 다시 징집을 당해 이중으로 군복무를 치렀다고 하니 참으로 통탄할 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아픈 6월에 우리는 평화의 노래를 불어야 합니다. 평화의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전쟁의 바람이 부는 이 광야에서 목숨을 걸고라도 원수됨의 장벽을 허무신 주님을 고백해야 합니다. 또 그분의 평화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하나하나가 용기 충천한 평화의 사도가 되는 것만이 이 위기의 시대를 구하고 부끄럽고도 아픈 역사를 반복하지 않는 길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