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교회 아카이브

20130602m creatio ex nihilo(창 1:1-5)



20130602m

창 1:1-5

creatio ex nihilo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3]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4]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5]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오늘은 환경주일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창조론의 가장 고전적인 명제는 소위 무(無)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입니다. 고색창연한 성서적 창조론의 대전제요 명제입니다. 무로부터의 창조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이미 존재하던 질료를 조합해서 이 세상을 만드신 게 아니고, 아무것도 없는 무에서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존재하던 것을 조합해서 만드는 것을 창조라고 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무도 절대 무입니다. 헬라말로는 우크온입니다. 


그러면 성경이 무로부터의 창조를 말씀하고 있을까요? 하나님이 엿새 동안 창조하셨습니다. 이레째 쉬신 날을 안식일로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창조사역 첫날 빛을 창조하셨습니다. 본문 3절 이하를 보십시오. “[3]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4]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5]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첫째 날 빛을 창조하시기 전에는 어떤 상태여야 합니까?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어야 합니다. 우크온의 상태여야 합니다. 그런데 실제는 어떻습니까? 3절 앞에 2절이 있습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혼돈한 땅, 공허, 흑암, 깊음, 수면이 있습니다. 첫째 날 빛을 창조하셨다면 그 이전에는 아무것도 없어야 하는데, 뭔가 있습니다. 절대 무의 상태가 아닙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이것은 무로부터의 창조와 어떻게 조화될 수 있습니까? 


어거스틴은 이 난제를 풀기 위해 플라톤의 우크온과 메온을 가져옵니다. 메온은 상대 무입니다. 절대 무에서 첫째 날 빛으로 가신 게 아니라, 일단 메온이라는 상대 무를 경유하셨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절 1절 이전이 절대 무입니다. 거기서부터 창세기 1장 2절인 상대 무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 상대 무에서 첫째 날 빛을 창조하셨습니다. 창조의 수순은 절대 무에서 상대 무, 상대 무에서 빛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명제가 왜 중요합니까? 하나님의 방대한 창조사역을 왜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명제에서 풀어야 합니까? 우선, 하나님의 절대 주권 때문입니다. 피조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 소유권이 있습니다. 먼지 하나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절대 무에서부터 하나님이 창조하셨습니다. 무로부터의 창조를 부정하면 피조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소유권이 흔들립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자연을 절대 인간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창세기 1장 26절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8절도 보십시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을 인간에게 맡기시며 다스리라고 하신 것은 소유권이 아니라 관리권의 위탁입니다. 소유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는 주인이 아니라 청지기입니다. 자연에 대한 주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연을 관리해야지 무자비한 폭군이 되거나 주인 행세를 하며 제멋대로 해치면 안 됩니다. 이것은 월권입니다. 악한 청지기의 모습입니다. 이 세상에는 내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 명의로 된 재산도 내 것이 아닙니다.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맡겨 당신 뜻에 따라 집행하게 하신 것들입니다. 내 생명, 내 건강도 내 것이 아닙니다. 내 맘대로 되는 것은 세상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 것이 아니어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면 그 시간부로 세상을 떠나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무로부터 창조라는 명제를 통해 이 세상 모든 만물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뼈저리게 고백하며 하나님 면전에서 겸허하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교만한 것은 자기가 주인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주인은 따로 있습니다. 


다음은 인간의 원초적인 정서와 본능에 관한 문제 때문에 무로부터의 창조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어디서 왔습니까? 천국에서 살다가 어머니 뱃속을 경유해 세상에 태어났습니까? 아닙니다. 어디서부터 왔냐면, 무로부터 왔습니다. 하나님이 무로부터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윤회설을 믿는 불교도나 힌두교도들은 무가 아니라 전생에서 왔다고 합니다. 모든 중생이 삼계육도를 끊임없이 윤회한다고 믿습니다. 그 업보에 따라 돌고 도는 게 윤회설입니다. 기독교는 전생이 아니라 절대 무로부터 왔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원초적인 정서 가운데 무에 대한 그리움이 있습니다. 허무에 대한 동경이 있습니다. 연어만 회귀본능이 있는 게 아닙니다. 사람에게도 원적지에 대한 강한 향수가 있습니다. 실향민을 보십시오. 명절 때마다 벌어지는 민족 대이동 현상을 보십시오. 이것은 사회학적 현상 이전에 모천(母川)을 향한 회귀본능의 발동입니다. 두려움은 그 대상이 있습니다. 그래서 두려움의 대상을 없애면 됩니다. 불안은 그 대상이 없습니다. 그래서 무섭습니다. 폴 틸리히는 불안을 존재론적 개념이라고 했습니다. 불안의 실체가 무엇입니까? 원초적인 허무가 나를 위협하는 현상입니다. 허무가 나를 꾀는 것입니다. 소극적으로는 허무에 대한 그리움이 불안입니다. 우리는 다 허무에서 왔기 때문에 그에 대한 동경이 있습니다. 때로 우리는 허무의 유혹에 시달립니다. 그 불안이 병증으로 나타나면 그것이 우울증입니다. 우울증을 극복하지 못하면 허무에 투신합니다. 자살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불안합니다. 무에서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나 자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 잠재적 자살자들입니다. 견딜 수 없는 불안에 시달리면 우울증이 되고 그것을 치료하지 못하면 결국은 무에 자기를 던지게 됩니다. 이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누구나 자살할 수 있습니다. 우울증은 허무에 대한 향수병입니다. 창세기 1장 2절의 상태에 시달리는 것입니다. 혼돈, 공허, 심연, 흑암 등의 상대 무에 시달리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OECD 국가 중 자살율 세계 1위가 된 지 10년이 넘었습니다. 지금도 42분마다 한 사람이 자살합니다. 하루에도 34명, 작년에는 15,000명이 자살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이 자살을 막을 수 있을까요? 


사람에게는 허무에 대한 원초적인 향수가 있을 뿐만 아니라 허무로부터 나를 지으신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원초적인 그리움도 있습니다. 이것을 종교심이라고 합니다. 사람에게는 종교심이 있습니다. 아버지 품에 대한 그리움이 있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런 점에서 무신론자는 없습니다.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입니다. 다 불안하고 다 우울한 것처럼 누구에게나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곧 종교심이 있습니다. 아버지를 찾다가 잘못 찾은 케이스가 우상이고 미신입니다. 짝퉁이나 사이비를 찾은 겁니다. 어떻게 저런 교리에 넘어갈까? 넘어갑니다. 인간에게는 원초적인 종교적 본능이 있기 때문입니다. 말도 안 되는 교리에 넘어가 패가망신합니다. 누구도 못 말립니다. 종교심 때문입니다. 그래서 폴 틸리히는 인간을 경계선상의 존재라고 했습니다. 절대 무로부터 왔기에 한 발은 허무에 딛고 있고, 절대 무로부터 참 존재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지음을 받았기에 존재에도 발을 딛고 있다는 것입니다. 허무 쪽으로 기울면 불안에 시달리다 자살하게 되는 것이고, 존재 쪽으로 기울면 하나님의 평안 안에 삽니다. 어거스틴은 고백록 제1권에서 고백합니다. “인생은 누구나 하나님 아버지 품에 안기기 전에는 평안이 없습니다.” 누구나 하나님 아버지 품에 안겨야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아무리 술이나 마약을 한다한들, 쾌락에 탐닉한들 그 불안과 우울증은 극복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품에 안겨야 합니다. 인생의 원적지인 아버지 품으로, 존재의 품에 안겨야 합니다. 그래야 허무가 극복됩니다. 


무로부터 왔다는 이 창조의 비밀을 깊이 깨달으셔서 허무가 아니라 참 존재이신 하나님 품에 안기시길 빕니다.

원문 자료와 첨부